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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핵발전소
▲ 울진핵발전소 울진핵발전소
ⓒ 김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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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당신에게 울진은 어떤 도시입니까?

울진,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대게, 금강소나무 숲, 왕피천으로 유명하며 해안도로인 동해안 7번 국도가 지나가는 지역으로 울진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7번 국도는 동해안의 아름다운 바닷길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핵발전소가 있는 고리-월성-울진을 지나간다. 2013년 5월 그마저도 핵발전소 이름을 '울진'에서 '한울'로 바꿔, 핵발전소가 울진에 있는지조차 직관적으로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울진에 핵발전소가 있다. 핵발전소가 있는 다른 지역(고리, 영광, 월성)에 비해 '핵발전소에 대한 의존이 가장 높은 지역'이라거나, '지역에서 싸우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도 불린다. 이번에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이규봉의 말마따나 "지리적, 사회적 오지"라서 그런 걸까.

울진 핵발전소 관련 인문·사회학적 연구나 기사의 수도 다른 핵발전소에 비하면 현저히 적다. 그래서, 그런 만큼 다른 곳보다도 울진에서 묵묵히 싸우고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고, '울진에도 탈핵하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2023년 6월 24일 무더웠던 여름, 이규봉씨가 농사를 짓는 곳에서 3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30년 넘게 탈핵하는 이규봉 핵으로부터 안전하게 살고 싶은 울진사람들(아래 핵안사) 대표를 소개한다.

자포자기가 아닌 당신을 향한 고백
 
피켓시위를 하는 이규봉 핵안사 대표
▲ 피켓시위를 하는 이규봉 핵안사 대표 피켓시위를 하는 이규봉 핵안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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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동시(啐啄同時).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서로 합심하여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 사자성어야말로 이규봉이 지역에서 해왔던 지난 30년간의 탈핵운동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이 아닐까.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는 반핵운동의 성과도 있었고, 지역의 다양한 조직, 사람들과 함께 싸우기도 했지만, 이제 그는 "외부의 환경단체, 시민단체로부터의 연대와 지원이 없으면, 안에서만 싸우고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라고 말한다. 처음엔 오랜 시간 외롭게 싸워온 활동가의 자포자기로 들리기도 했지만, 지난 40년간 단단해지는 핵발전소의 영향력을 밖에서 함께 깨고 부술 누군가를 향한 고백 같기도 했다.

"여기 울진에도 탈핵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소수의 힘과 의지만으로 오랜 시간 두텁게 자리 잡은 겹겹의 핵발전소 영향력을, 주민들이 핵발전소와 함께 살아온 역사를, 종속와 의존의 구조들을 깨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요. 그래서 밖에서 우리와 함께 싸워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86학번으로 89년에 총 부학생회장을 맡았고, 집시법 위반 등으로 감옥에 2년간 다녀왔어요. 1986년에 체르노빌 사고가 나고,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89년부터는 울진에서도 농민회, 초기 전교조와 울진이 고향인 대학생들이 반핵활동을 조금씩 했어요. 그때 총학생회에서 연대 차원으로 스티커랑 유인물을 만드는 등 울진 반핵운동을 지원했죠. 출소한 뒤에는 아무런 미련 없이 고향인 울진에 돌아왔고요. 울진에 온 게 93년이니 30년간 반핵운동을 해 온 셈이네요. 30년 넘게 울진에서 사무국장, 대표, 또 사무국장, 대표를 반복하면서 지금까지 왔어요."

핵발전소 최우선 후보지, 울진에서 반대를 외치다
 
울진군민들과 함께 반핵집회하는 모습
▲ 울진군민들과 함께 반핵집회하는 모습 울진군민들과 함께 반핵집회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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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 이규봉은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해왔을까? 이규봉은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했는데, 대표적으로 울진반투위, 울진반핵연대, 울진참여자치연대, 울진생태문화연구소 그리고 핵안사 등이 있다.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는 울진 군민이나 다양한 단체들이 반핵을 지지하고 특히 '고향'을 지키자는 명분으로 핵발전소를 반대했어요. 사실 지방에서 반핵운동에 성공하거나 어떤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은데, 우린 그래도 승리의 기억들이 있어요. 2000년대 초반에는 울진 7, 8, 9, 10기 핵발전소가 추가로 건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청 앞에서 철야농성과 서명운동, 수요집회 등을 했고, 울진 핵발전소 앞과 서울 명동성당 등에서도 반대운동을 했고요."

울진은 2003년 노무현 정부 당시에 핵폐기장 4개 후보지 중 하나로 포함되었고, 2005년 주민투표로 결정된 중저준위 방폐장이 들어설 유력한 후보지 중 하나였다. 2005년 7월 <전력신문>은 다음과 같이 울진을 '방폐장을 유치할 가장 유력한 후보'라고 설명했다.
 
투표율에 따라 방폐장 유치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지역주민 수가 비교적 적은 울진군의 성공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한수원 한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이러한 분석이 나오면서 인구가 20~30만 명에 가까운, 군산, 경주, 포항 등 보다는 인구가 6만 명에 불과한 울진이 성공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규봉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서 당시 군수와 군의회를 설득해 유치동의안 자체를 부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때 내가 울진반핵연대 대표였는데, 중저준위 방폐장 유치동의안을 제출하기 전날 출장 중이었던 울진군수를 관사 앞에서 밤 11시까지 기다렸다가 2시간 동안 설득했어요. 핵안사 회원들은 군의원들을 1:1로 만나 설득했고요. 정말 겨우 막았지.

당시 군수님이 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를 유치한 분이고, 왕피천 생태경관보전지역을 만드는 데 협조를 해줬어요. 무엇보다 군수가 사업가 출신이었는데, 당시 한나라당이 중앙 차원에서 지금보다는 소극적인 친원전 상황이라, 지금보다는 군수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새벽 1시까지, 울진의 미래만 얘기했어요.

중저준위 방폐장이 들어오면, 300년이 아니라 영원히 울진에 손해를 끼치기 때문에 절대로 받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원전이 아닌 생태, 청정, 자연자원을 활용한 관광으로 가야한다고 말했죠. 그렇게 군수를 설득하고 군의원들을 설득했어요. 결국 경주에 중저준위 방폐장이 들어섰지만, 시민단체도 미약한 울진에서 주민투표 자체를 부결시켰으니 그것 자체가 대단한 성과였죠."


이규봉이 울진에서 참여한 활동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핵안사 대표로서 울진 핵발전소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성명서를 쓰고 마이크를 잡았다. 또한, 그는 울진생태문화연구소를 만들어 왕피천 유역에 사는 2000종이 넘는 동식물을 기록했다. 왕피천은 녹지 자연이 8등급 이상으로 우수한 식생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보유한 낙동정맥의 중앙부에 위치한 녹지 축으로 멸종위기종과 희귀 야생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생태조사하고 있는 이규봉씨
▲ 생태조사하고 있는 이규봉씨 생태조사하고 있는 이규봉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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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천을 보존해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만들었고 금강소나무 숲길도 만들었어요. 특히 10여 년간 생태조사를 해서 약 2000종이 넘는 동물과 식물을 기록하고 데이터로 남긴 것은 울진을 '생태관광의 수도'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여기는 바다, 금강소나무 숲과 산 등 아름다운 자연이 많은데, 우리도 제주도나 남해안의 도시들처럼 자연을 바탕으로 한 관광으로도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죠. 원전이 더 안 들어와도 이곳은 생태관광으로 충분히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요. 그것만이 이 지역의 모든 경제가 핵발전소에 종속된 역사를 막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뤄가는 대안이라고 생각했어요."


금덩어리 빼앗겼다고 말하는 주민들

반핵운동을 수십 년 동안 지속하기도 어렵지만, 지역 사람들에게 핵발전소가 아닌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 연구자나 활동가, 주민들 역시 보통은 핵발전소를 비판하는 것에 집중할 뿐, 어떻게 전환이나 변화를 이뤄갈 수 있는지 고민하거나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규봉은 왜, 어떻게 대안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반핵운동 초기에는 (관련 활동을 하다가 깡패들에게) 납치도 당했어요. 아내도 당시 10년 넘게 울진에서 살았는데 무섭대. 지금은 애들이랑 대구에서 일하면서 따로 살고 있어요. 와이프가 여기서 사는 거 싫어해. 반핵운동 한다고 납치당하고, 동네 주민들한테 욕먹고. 게다가 지금 주민들이 중저준위 방폐장을 유치하지 못한 것을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요? '금덩어리' 빼앗겼대, 금덩어리..."  

고향을 지키기 위해 핵발전소를 비판하고 핵폐기장을 거부해왔던 승리의 역사가 20년이 지난 후에는 고향을 지키기 위해 핵발전소를 유치하는 사회로 극적으로 바뀐 것이다. 이규봉의 설명처럼, 일부 주민들은 중저준위 방폐장 유치신청서를 제출하지 못하도록 군수를 설득한 그를 향해, '너 때문에 황금덩어리를 경주에 빼앗긴 것'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많은 울진 군민과 지역단체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핵발전소를 비판하고 막아왔지만, 왜 현재는 다수가 '고향을 지킨다'라는 명분으로 핵발전소를 유치 목소리를 내게 되었을까? 이규봉은 "지금의 울진은 핵발전소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 종속되었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 '탈핵 잇_다'(https://brunch.co.kr/@wcvictory/6)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울진핵발전소, #한울원전, #이규봉, #핵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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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수료생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고, 관련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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