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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오입 개헌 당시, 민주당 이철승 의원이 자유당 소속인 최순주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는 모습.
 사사오입 개헌 당시, 민주당 이철승 의원이 자유당 소속인 최순주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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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기자활동을 하는 시기 한국사회는 요동쳤다.

정부를 비판했던 <동양통신>편집국장 정국은이 정부전복 음모로 처형되고(1953년 8월), 자유당은 이기붕을 2인자로 지명(9월)했다. 제3대 민의원 총선에서 관권선거로 자유당이 압승하고(1954년 5월),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이루어지고(동년 11월), 관제데모에 학생을 동원한 것을 비판한 사설을 쓴 <대구매일신문>이 피습되고 (1955년 9월), 민주당이 창당되었다.(1955년 9월).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자유당), 부통령 장면(민주당)이 당선되고(1956년 5월), 서울대 문리대 학보 필화사건(무산대중체제로의 지향)으로 글 쓴 학생이 구속되고(1957년 12월), 이승만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진보당 간부 7명을 간첩혐의로 구속하고(1958년 1월),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1958년 5월), 자유당이 야당 의원들이 점심시간에 자리를 빈 틈을 타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3분 만에 처리했다.(1958년 12월).    

김자동은 어지러운 시국에 분노와 개탄을 거듭하면서 생업에 열중하였다. 사촌 가족까지 부양했던 그는 한동안 타 언론사의 기자를 겸직했다. 급료가 적어서였다. 

<조선일보>에 근무하면서 한동안 동양통신 외신부 기자를 겸했다. 물론 떳떳한 일은 아니었다. <조선일보> 경영진만 모르고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겸직의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석동형 가족 4명과 할머니, 어머니를 부양하고 있었다. 입사 이듬해인 1955년에는 결혼을 하여 식구가 더 늘었다. <조선일보>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았다. 통신사 외신부는 타 부서보다 월급을 배 가까이 더 주었다.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여전히 빠듯한 살림이었다. (주석 22)

외신부에 근무했던 터라 겸직이 가능했다. 할 일이 많지 않아서, 오전에는 <조선일보>, 오후에는 <동양통신>에서 근무했다. 당시에는 더러 있었던 일이다. <동양통신>에는 영어를 잘 하는 기자가 없어서 가능했다고 한다. 미국에 연수를 가면서 그만두었다. 그만큼 가정의 생계가 어려워졌다. 

1957년 1월 언론계에 친목모임이 결성되었다. 지금까지 이어진 관훈클럽이다.

중견 언론인들의 친목을 목적으로 결성된 관훈클럽은 미국무부 초청연수를 다녀온 박권상(동아일보 편집국장, KBS 사장 역임), 조세형(한국일보 편집국장, 국회의원 역임), 최병우(코리아타임즈 편집국장 역임) 등이 앞장서 결성하였다.

초창기에는 모두 외신부 기자들이 많았다. 일단 영어가 되고 미대사관과의 친분도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관훈클럽 창립 때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

관훈클럽 회원 가입은 운영위원회에서 투표로 결정하였다.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며 내게도 가입하라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나는 가입하지 않았다. 가입 권유를 받은 사람 중에서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나 말고는 없는 것으로 안다.

내가 관훈클럽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미국을 별로 좋지 않게 봤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미국은 한국을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는데 분단 책임도 따지고 보면 미국에 있다. 나는 역대 한국 정권이 미국의 괴뢰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이후 미국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나 스스로를 굳이 반미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미국이 '제국'이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주석 23)

스물일곱 살이던 1955년 어머니의 소개로 결혼하였다. 
신부는 스물세 살(1933. 4. 28생)의 김숙정(金淑貞)이다. 신부의 아버지는 김석황, 어머니는 김말주, 신부는 전북 김제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김제교육청에서 공문발송 등 일반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이었다.

어머니가 임시정부에서부터 친면이 있던 해공 신익희(당시 국회의장)에게 부탁하여 그가 주례를 섰다. 김자동은 맞선을 보았는데 "키도 늘씬하고 인상이 괜찮아" 첫눈에 들었다고 한다. 결혼 후 시어머니를 성심껏 모시고 살았다. 

김자동은 기자생활에 회의감을 느꼈다. 시국상황과 함께 신문사의 논조가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김자동 : 내가 58년까지 조선일보에 있었어요. 그런데 외신부에서는 주로 번역이나 하고, 간혹 해설기사를 써도 내용에 대해서 제약을 많이 받고. 또 정치부는 경무대하고 외무부 출입을 했는데, 거기는 뭐 어느 신문이나 똑같은 불러주는 내용 전달하는 데에 그치어 기자생활이 의의를 점점 느끼지 않아. 그래서 이럴 바에는 뭐 딴 일을 해보겠다. (주석 24)


주석
22> <회고록>, 309쪽.
23> 앞의 책, 309~310쪽.
24> <면담집>, 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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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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