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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한국광복군 환송기념사진. 첫번째 줄 김구를 중심으로 이시영, 차리석, 박찬익, 조완구 지사가 자리해 있다. 맨 뒷줄에 조성환, 조소앙, 지청천, 이범석, 양우조 지사가 서 있다.
 1942년 한국광복군 환송기념사진. 첫번째 줄 김구를 중심으로 이시영, 차리석, 박찬익, 조완구 지사가 자리해 있다. 맨 뒷줄에 조성환, 조소앙, 지청천, 이범석, 양우조 지사가 서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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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소년'이 부모따라 중국 각지를 이동하면서 자라고 있을 때 대륙의 정세는 크게 바뀌고 임시정부도 많은 변화가 따랐다. 1937년 7월 7일 일제의 베이징 부근 노구교 도발사건은 중·일전쟁의 시발점이 되고, 중국의 양대 진영이 국공합작을 급속히 구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장제스는 노산회의에서(7월 17일) "만약 일단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토지의 남북을 불문하고 노소를 구분할 것 없이 누구든지 국토를 지키고 항전할 책임이 있다"고 호소하고, 일본군이 상하이까지 점령하자 국민당정부는 항일자위선언을 발표한데 이어 300여 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뒤늦게나마 본격적인 항일전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일제의 중국침략전쟁은 거칠 것 없이 강행되었다.

점령지구는 1937년 8월부터 남구→장가구→대동→보정→창주→집념→포두→석가장→나태→덕주→안양→대명→태원→남경→상해로 이어졌다. 그리고 1938년 말까지 산서→산동→하북→치하얼→수원→서주→무한→광주로 전개되었다. 그야말로 '중원'이 일제의 점령지로 떨어졌다.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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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군의 공격은 주로 점(占)과 선(線)으로만 연결되었다. 그들이 실제로 점령한 것은 대도시와 주요철도선 뿐이었다. 여전히 광대한 대륙은 중국·중공군의 영역에 있었다. 1937년 9월 팔로군이 평형관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1938년 3월 산동성 태아장의 승리, 하북성 중구와 태행산 등 곳곳에 항일유격근거지가 마련되고 민병이 구성되어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임시정부는 1941년 10월 10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 명의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국치 31년 만에 우리 정부가 일본에 공식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순한문으로 쓰여진 '선전성명서'는 조소앙이 기초하여 의정원의원에서 의결을 거친 내용이다. 당시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약헌> 제2장 10조는 "주외사절의 임면 및 조약의 체결과 선전·강화를 동의함에는 총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선전성명서'는 전문과 5개 항의 성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번역한 것이 <소앙선생문집>에 실려 있다. 이 번역문은 약간 소략하게 처리된 부분이 있고 어투도 고문체인 것을, 김희곤 교수의 번역을 소개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우리는 3천 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영국·미국·캐나다·네덜란드·오스트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해 선전을 선포한 것이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축하하면서,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이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軸心國)에 전쟁을 선언한다.

2. 1910년의 합방조약과 일체의 불평등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국가가 한국에서 합리적으로 얻은 기득권익이 존중될 것임을 선포한다.

3.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항전한다.

4. 일본세력 아래 조성된 장춘과 남경 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독립을 실현하는 데 적용되기를 견결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진영의 최후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외교부장  조 소 앙
                                                          대한민국 23년 12월 10일.


일제에 선전포고를 한 임시정부는 외교활동의 영역을 나누었다. 중국국민당 정부에 대해서는 김구와 조소앙이 나서서 활동하도록 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이들로 하여금 교섭하도록 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는 중경주재 판사처에 머물고 있는 대표들을 통해 접촉하는 방안을 택하였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명의로 발표한 <대한민국건국강령>(건국강령)을 채택했다. 건국강령은 조소앙이 기초한 것이지만, 형식을 임시정부가 광복 후의 민족국가 건설계획으로 제정 발표한 것이다. 당시 조소앙은 외무부장 겸 선전위원회 주임위원이었다. 임시정부 기관지 <임정공보> 제72호에 <건국강령> 전문이 게재되었다.

임시정부가 건국강령을 제정한 시점은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기 40일 전이다. 임시정부는 미·일전쟁을 내다보고, 그리고 일제의 패망을 예측하면서 조소앙에게 건국강령의 기초를 맡긴 것이다. 머지않아 도래할 해방을 앞두고 임시정부는 새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구상하면서, 이 분야에 전문성을 인정받아 온 조소앙에게 역사적인 건국강령을 위촉하였다. 

세계식민지 역사상 해방 후 국가건설과 관련하여 체계 있는 방략을 갖춘 민족은 그 사례를 찾기 쉽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1년 4월에 이미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언>을 통해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기반하는 광복 후 건설할 민족국가의 대강(大綱)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삼균주의 원칙의 건국방략은 1930년 1월 창당한 한국독립당의 당의·당강이 되고, 1935년 11월 김구의 주도하에 결성한 한국국민당, 1940년 5월 재건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이 통합하여 결성한 한국독립당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가 하면 좌익진영의 주요 정당들도 삼균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하였다. 1935년 7월 의열단,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 등 5개 정당이 통합하여 결성한 민족혁명당이 이를 수용하면서 1930년대 중국관내에서 활동하던 좌우익 주요 정당들이 삼균주의를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좌우익 정당들이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상을 보이면서도 정치 이념과 해방 후 신국가건설의 건국방략으로 삼균주의를 기본골격으로 삼은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다. 삼균주의 사상이 그만큼 독립운동가(정당·단체)들의 공통적인 이념과 정책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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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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