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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기자말]
문일민의 삶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을 한 명 꼽으라면 단연 '도산 안창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0대 시절부터 안창호를 흠모하며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문일민은 상하이에 와서야 비로소 안창호를 처음으로 대면할 수 있었다. 문일민은 안창호와의 첫 만남을 '영광'이라 회고했다.

"선생의 온유하신 그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친절함과 다정함이 나타나 있고 그 부드러운 눈은 방금 자기를 해하려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이를 원망하거나 혹은 살기를 내는 눈초리가 없고 반대로 이 가해자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눈초리를 가졌으며 무거운 두 입술은 비밀이라도 감춰두신 듯 무언이었고 필요 이외의 말씀은 하시지 않는 또한 남을 악하게 평할 줄 모르는 입술이었다. 선생의 태도는 내가 여지껏 보지 못하였던 침착성이 있었고 위엄이 있었다." - 문일민, '시키지 않고 하게 하는 指導力', "새벽", 1954.9.

문일민은 "나의 모든 취하고 악한 마음이 선생에 비추어 반대되니 마치 더러운 몸을 가진 사람이 거울 앞에서 그 더러운 곳을 찾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나의 결점이 다 드러난 듯 느꼈다"라고 했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비로소 자신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흥사단에 입단하다

문일민은 1930년 5월 13일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興士團)에 정식으로 입단했다. 그에게 부여된 단우번호는 239번이었다.

흥사단은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된 단체로서 무실역행(務實力行)·충의용감(忠義勇敢)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점진적인 실력 양성을 통한 민족의 독립을 추구한 단체였다.

그런데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안창호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면서 1920년 9월 20일 미주 흥사단의 지부로서 상하이에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遠東臨時委員部)'가 문을 열었다. 상하이에서 입단식을 치른 문일민 역시 자연스레 원동위원부 소속이 됐다.

미주 흥사단이 인격 개조 및 실력 양성 등 수신(修身)에 좀 더 중점을 두었다면 원동위원부는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각 분야의 인재 양성과 자금 마련 등 보다 직접적인 독립운동에 주력했다.

원동위원부 소속 단우들은 주거와 활동 지역에 따라 반(班)으로 나뉘었고, 각 반에는 다시 도서부(圖書部)·강론부(講論部)·운동부(運動部)·음악부(音樂部)·접제부(接濟部) 등을 두어 동맹독서 및 동맹운동 등을 수행했다. 또 정기적으로 강론회를 열고 강연 및 토론을 통해 상호 간의 의견 교환 및 친목을 도모했다.

한편 안창호가 국민의 기본적인 의무로 강조한 개업(皆業)·개납(皆納)·개병(皆兵)의 의무에 따라 원동위원부 단우들 역시 각자 생업에 종사하면서 의무금과 동맹저축금 등을 기부했다. 기부금은 독립운동을 위한 후원금으로 활용됐다.

원동위원부에서는 세계대공황 이후 경제적 처지가 더욱 어려워진 교민 사회를 안정시킬 요량으로 1931년 3월 25일 공평사(公平社)를 창립했다. 공평사는 일종의 소비자 협동조합이었다. 즉 상점을 개설하고 그 자금을 저축하여 신용합작과 생산합작의 단계로 발전시킴으로써 회원들의 자활(自活)과 자위(自衛)를 꾀했다. 문일민 역시 공평사 사원으로 활동하며 고본금(股本金)·저축금(儲畜金) 등을 성실히 납부했다.
 
두 아들 정진·찬진과 함께 (1930년)
 두 아들 정진·찬진과 함께 (1930년)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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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삼 판매하며 기부 활동 참여

흥사단 입단 당시 문일민은 고려인삼을 판매하는 고려물산공사(高麗物産公司)에서 일하고 있었다.

인삼 판매는 당시 상하이 지역 한인들의 주요 생계수단 중 하나였다. 한국의 특산품이었던 고려인삼은 중국에서 죽은 사람들도 살린다는 영약(靈藥)·불로초(不老草) 등으로 불리며 기호품으로 자리잡았다.

이에 따라 상하이 지역 한인들 중에는 생활비 혹은 학비 마련을 위해 인삼 장사에 뛰어드는 이들이 많았다.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인삼 판매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이들도 있었다.

문일민 역시 생계 유지 및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인삼 장사에 뛰어들었던 것 같다. 문일민은 1931년 고려물산공사 사장까지 역임했다. 그가 흥사단에서 요구하는 각종 의무금·기부금·고본금·저축금 등을 납부할 수 있었던 것도 인삼 장사를 통해 벌어들인 수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문일민은 국내에서 벌어지는 성금모금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충무공 이순신 유적 보존을 위한 성금 기부를 들 수 있다.

1931년 5월 충청남도 아산에 위치한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와 위토(位土: 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경작하는 땅) 일대가 빚 때문에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정인보의 사설을 통해 이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외 각지에서 성금이 답지했다. 총인원 2만여 명, 단체 차원에서는 4백여 단체가 자발적으로 성금 모집에 동참, 총 1만 6021원 30전의 성금이 모였다. 모금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빚을 모두 청산하고, 남은 돈으로 사당인 현충사도 대대적으로 중건할 수 있었다.

당시 기부자 명단에 '상하이 샤페이로(霞飛路) 1014 롱내 30호'를 주소지로 한 기부자들이 등장한다. 안창호, 송병조, 문일민, 차리석, 구익균, 장덕로 등 모두 원동위원부 멤버들이었다.
 
1931년 6월 1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충무공 유적 보존을 위한 성금 기부자 명단. 문일민(빨간색 네모 안)은 금 42전을 기부한 것으로 확인된다.
 1931년 6월 1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충무공 유적 보존을 위한 성금 기부자 명단. 문일민(빨간색 네모 안)은 금 42전을 기부한 것으로 확인된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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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민을 비롯한 원동위원부 멤버들은 민족의 성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묘소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는 꼴은 볼 수 없다며 십시일반 성금을 보탰던 것이다.

 
2022년 12월 16일 현충사 중건 90주년을 맞아 현충사 중건을 위해 성금을 기부한 이들의 후손을 찾아 감사패를 증정하는 '일제강점기 이충무공을 함께 지킨 국민영웅 후손 초청행사'가 열렸다. 사진은 문일민의 손녀 문현아씨가 최응천 문화재청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장면.
 2022년 12월 16일 현충사 중건 90주년을 맞아 현충사 중건을 위해 성금을 기부한 이들의 후손을 찾아 감사패를 증정하는 '일제강점기 이충무공을 함께 지킨 국민영웅 후손 초청행사'가 열렸다. 사진은 문일민의 손녀 문현아씨가 최응천 문화재청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장면.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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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문일민은 개인 차원에서도 기부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34년 여름 국내 삼남(三南) 지방에 폭우로 인한 수재(水災)가 발생했을 때 동아일보로 수재의연금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 원동위원부는 윤봉길 의거 이후 안창호가 피체되고 상하이 일대에 일제의 검거망이 펼쳐지면서 붕괴 위기에 처해있었다.

당시 차리석이 미주 흥사단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적이 기어이 잡으려고 하는 단우는 본인과 송병조·박창세·문일민 이런 이들이외다"라고 하면서 사방으로 도망다니느라 단의 업무도 보지 못하고 경제적 수입도 없어 생활이 곤란한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 

문일민 역시 일제의 수배를 피해 상하이와 항저우 등을 전전했는데 수입이 없어 곤란한 상황이었다. 윤봉길 의거로 상하이에 계속 머물 수 없게 되면서 인삼 장사도 관둘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조차 수해를 입은 국내 동포들의 구제를 위해 문일민은 기꺼이 자신의 주머니를 열었던 것이다.

- 11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1) <동아일보>
2) 흥사단, <제239단우 文逸民>, 1930.5.13
3) 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島山安昌浩全集> 13,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4) 흥사단사편집위원회, <興士團五十年史>, 대성문화사, 1964
5) 흥사단100년사위원회, <흥사단 100년사>, 2013
6) 김광재, <일제시기 上海 고려인삼 상인들의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7) 이명화, <興士團遠東臨時委員部와 島山 安昌浩의 民族運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태그:#문일민, #무강문일민평전, #흥사단, #안창호,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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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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