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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제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기자말]
1947년 10월 25일

1947년 10월 25일 점심 무렵, 서울 중앙청(미군정청) 2층 식당 앞. 한 초로의 사내가 지팡이를 짚은 채 비장한 표정으로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이윽고 품 속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품에서 나온 손에 들려있는 것은 시퍼런 면도칼이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오전 근무 후 퇴근 중이던 미군정 직원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내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모두의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내가 칼로 자신의 배를 그은 것이다. 사내는 복부에서 피를 쏟으며 바닥에 엎어졌고, 직원들은 눈 앞에서 벌어진 사고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곧바로 수위가 달려왔다. 출혈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사내는 신음하듯 낮게 읊조렸다.

"독립을... 독립을..."

사내는 인근 적십자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어 응급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정 직원들은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현장에서는 여러 통의 유서가 발견됐다. 직접 쓴 한시(漢詩), 부인 앞으로 남긴 유서, 김구·김규식·유동열에게 남기는 유서 등이었다. 유서 중에는 '환국 이래 독립은 아직 멀고 민생은 날로 도탄에 빠지니 30년간 혁명투사의 피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오며 시체는 도산 안창호 선생 무덤 옆에 묻어달라'는 내용도 있었다.

이윽고 그의 신원이 확인됐다.

이름: 문일민(文一民)
거주지: 서울 종로구 팔판동
직업: 국민의회(國民議會) 대의원(代議員)
소속: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그는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던 중 해방을 맞아 귀국한 독립운동가였다. 임시정부의 중진으로 활동하던 원로 독립투사의 할복 자살 기도 소식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했다.
 
1947년 10월 25일, 중앙청 청사에서 할복 후 쓰러져 있는 문일민
 1947년 10월 25일, 중앙청 청사에서 할복 후 쓰러져 있는 문일민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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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들은 앞다투어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8.15 이후 3년이 되도록 조국의 독립은 안되고 외국인에게 아첨하는 폐풍은 날로 격심해가는 현상에 의분을 금치 못한 나머지 군정청에 가서 군정직원들에게 보아라 하듯이 배를 가르고 자결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어제 25일 오전 11시 45분, 중앙청 2층 식당 앞 우편측 통로상에서 국민의회 대의원 문일민씨는 면도칼에 손수건을 감아들고 하복부를 5촌(16.5cm - 옮긴이 주) 가량이나 가르고 자결하였는데 절명은 되지 않았으며 피투성이가 된 가슴 위에는 '문일민 유서(文一民遺書)'라고 쓴 글발을 남기고 '나는 조선독립이 안되어서 죽는다'고 가쁜 숨결로 부르짖고 있었다." - '外人 아첨에 痛憤코 文一民氏 中央廳서 割腹', <독립신보>, 1947.10.26.


보도가 나가자 원로 독립투사의 희생에 감격한 시민들이 그가 입원한 적십자병원을 찾아와 수혈(輸血)을 자청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수혈 덕분에 문일민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간신히 의식을 회복한 그에게 담당 의사가 할복한 이유를 묻자 문일민은 무거운 신음과 함께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한국 독립"

그는 왜 해방된 조국에서 또 다시 독립을 부르짖었을까. 스스로의 배를 가르면서까지 호소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문일민의 생애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시작될 이야기는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했던, 그러나 역사의 그림자로 가려진 채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이다.

문일민을 아시나요?

문일민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문일민은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1920년 8월 3일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 폭탄대 소속으로 일제 식민통치기구였던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져 일제를 놀라게 했다.

1925년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탄핵을 주도했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 정의부(正義府)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1930년대에는 흥사단(興士團)·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한국군인회(韓國軍人會) 등 여러 단체에 관계하며 민족운동에 투신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정처 없이 방랑할 때에는 그를 따라 상하이-항저우(杭州)-난징(南京)-충칭 등을 옮겨다니며 해방 직전까지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해방을 맞아 환국한 문일민은 조국이 남과 북으로 나뉜 채 군정 아래 놓인 현실을 개탄하며 1947년 10월 25일 중앙청에서 할복 의거를 결행했다. 이러한 공로들을 인정 받아 문일민은 1962년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건국훈장 독립장)
 
무강 문일민 (1894~1968)
 무강 문일민 (1894~1968)
ⓒ 문일민 후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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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내외를 넘나들며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삶을 살았음에도 이러한 스토리는커녕 그의 이름 석 자조차도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서 문일민의 삶을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제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고자 한다.

- 2부에서 계속 -

덧붙이는 글 | 본 연재는 글쓴이의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의 생애와 민족운동>(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22)을 평전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태그:#문일민, #무강, #무강로드, #문일민평전,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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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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