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자이푸르 시티팰리스의 하와마할. 바람의 궁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곳은, 왕실과 하렘의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낼 걱정 없이 자이푸르 시장의 활기 넘치는 광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건축한 곳이다.
 자이푸르 시티팰리스의 하와마할. 바람의 궁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곳은, 왕실과 하렘의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낼 걱정 없이 자이푸르 시장의 활기 넘치는 광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건축한 곳이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아그라에서 자이푸르로 오는 기차 안. 춥다고 창문을 닫으려다 창문이 작두처럼 내리치는 바람에 손을 심하게 찌었다. 숙소에서 밴드를 얻어 알싸하게 쓰라린 손가락을 감쌌다. 한숨 자고 나니, 새 살도 나고 피로도 어느 정도 달아났다. 무식하게 아그라역에서 노숙이나 하고, 밤에 제대로 눕히지도 않고 덤벙대며 이곳저곳 피나 흘리는 주인과는 다르게, 회복이 빠른 기특한 몸이다. (관련기사 : 이렇게 더럽고 불결한 천국이 다 있나 )

그나마 쪽잠이라도 잔 나와는 다르게, 밤새 아그라역 대기실에서 쥐들과 사투를 벌이느라 한숨도 못 잔 더스틴은 아직 회복 전이다. 회복은커녕 오한이 오는지 몸을 부르르 떤다.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지. 자이푸르가 또 식도락의 도시 아니겠어? 여기서 제일 맛있다는 카레 집으로 데려갈게."

몸이 안 좋아 가기 싫다는 더스틴을 끌고 간 곳은 자이푸르의 한 고급 식당.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추천 메뉴인 라자스탄 스타일의 매운 양고기 카레를 가져다 주었다. 매운 음식이라면, 게다가 그게 카레라면 사족을 못 쓰는 더스틴이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에 매운 음식을 퍼부으니 병만 더 도졌다.

자이푸르의 한 고급식당.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추천 메뉴인 라자스탄 스타일의 매운 양고기 카레를 가져다주었다. 매운 음식이라면, 게다가 그게 카레라면 사족을 못 쓰는 더스틴이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에 매운 음식을 퍼부으니 병만 더 도졌다.
 자이푸르의 한 고급식당.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추천 메뉴인 라자스탄 스타일의 매운 양고기 카레를 가져다주었다. 매운 음식이라면, 게다가 그게 카레라면 사족을 못 쓰는 더스틴이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에 매운 음식을 퍼부으니 병만 더 도졌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호텔 방에 몸져누운 더스틴을 보고 있자니, 어젯밤 쥐를 쫓게 하고 혼자 잘만 자던 내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하다. 그렇다고, 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 계속 갇혀 있을 수는 없다.

"뭐 좀 사다 줄까? 약을 좀 먹어보면 어때?"
"아니, 약은 됐고. 사이다나 한 병 사다 줘. 그리고 캔디도 좀…."


오한에 사이다와 캔디라니.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은가 보다.

"알았어. 캔디 사다 줄게. 그리고…. 나가는 김에 자이푸르 시장도 좀 보고 오겠어."
"이렇게 아픈 남편을 홀로 두고 갈 거야?"
"잘 생각해 봐. 네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뭐야. 쇼핑이지? 자이푸르는 무엇보다도 쇼핑의 도시라고, 쇼핑. 어차피 너는 몸을 쉬어야 하고, 나는 여기 시장 구경을 꼭 하고 싶거든."


쇼핑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더스틴은 금세 설득이 되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럼 다녀와. 조심해. 가면서 길 잘 보고. 꼭 사람 많은 길로 다니고. 이상한 사람이 쫓아오면 사람 많은 곳으로 피하고. 그리고…. 사이다와 캔디는 절대 잊지 말고."

몸져누운 남편을 버리고 즐긴 쇼핑 천국, '핑크 시티' 자이푸르

'핑크 시티'라고도 불리는 자이푸르는 우리가 이제 막 발을 들인 인도 북서쪽에 있는 라자스탄 주의 주도이다. 1728년 암베르 성의 통치자 자이 싱 2세가 건설했으며, '자이왕의 성'이라는 뜻으로 왕의 이름을 본떠 자이푸르라고 이름 지어졌다.

암베르에서 자이푸르로 수도를 옮겨온 자이싱 2세는 마하라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였다. 자이푸르에 있는 잔타르 만타르는 자이싱 2세가 세운 석조 천문 관측소다. 자이싱 2세는 자이푸르를 포함해 델리, 우자인, 바라나시, 마투라에 잔타르 만타르를 세웠으며, 이는 1940년대까지 천문대로 이용되었다.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암베르에서 자이푸르로 수도를 옮겨온 자이싱 2세는 마하라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였다. 자이푸르에 있는 잔타르 만타르는 자이싱 2세가 세운 석조 천문 관측소다. 자이싱 2세는 자이푸르를 포함해 델리, 우자인, 바라나시, 마투라에 잔타르 만타르를 세웠으며, 이는 1940년대까지 천문대로 이용되었다.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자이푸르의 천문 관측소 잔타르 만타르
 자이푸르의 천문 관측소 잔타르 만타르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자이푸르는 인도 중세에 건설된 도시로는 보기 드문 계획도시로 6개의 도시 구역이 중앙의 팔라스 쿼터(Palace quarter)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올드 시티(Old City)라고 불리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팔라스 쿼터에는 하와 마할(Hawa Mahal)과 왕궁의 정원 그리고 작은 호수가 들어서 있다. 격자 무늬로 구획 지어진 6개의 어반 쿼터(Urban quarters)는 담홍색으로 칠해진 셀 수 없이 많은 상점의 나열로 촘촘하다.

직선으로 난 곧은 길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가 돼 버리기 십상이다. 화려한 보석과 사리로 치장한 인도 여인들에 눈이 팔리다 보니, 내가 지나쳐 온 길이 어디였는지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매우 탐나지만 전혀 쓸모가 없을, 고운 무늬를 새긴 가죽 신발이 잔뜩 쌓인 길. 커다란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를 진열해 놓은 보석 상점들. 이미 한 잔 했지만, 다시 입맛을 다시게 하는 북인도 최고의 라씨(버터 밀크와 지방 함량이 높은 우유로 만든 인도의 차가운 요구르트 음료) 상점에 길게 늘어선 줄. 이러저러한 자이푸르의 풍경들을 이정표 삼아 길을 걸었다.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섰다. 세상 모든 화려함이 응축된 듯한 색의 잔치. 라자스탄 특유의 화려한 사리를 파는 상점들의 골목이다. 알록달록한 초록, 분홍, 빨강의 천들이 거리에 펼쳐져 있다. 한 상점에서 엄마와 딸처럼 보이는 예쁜 인도 여인 둘이 비단을 파는 상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는 화려한 색감과 활기찬 사람들의 에너지에 넋이 빠져,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내가 떠나온 곳과 그리 멀지 않은 이곳.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천을 만들고, 보석을 팔고, 음식을 먹고, 색을 입으며 살고 있다. 새삼 드는 생각. 내가 살던 작은 세상은 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다. 내가 보고 있고 듣고 있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이토록 활기찬 모습으로 하루를 힘차게 살아내고 있다. 세계는 내 인정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알아주지 않아도, 세계는 무심하고 담담하게, 하루의 시간을 쓸어담으며 다음 시간으로 건너간다.

자이푸르 시티팰리스 하와마할 앞의 거리
 자이푸르 시티팰리스 하와마할 앞의 거리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나에게 주어진 돈은 500루피(한화 약 1만 원). 무엇을 살까 보다 무엇을 사지 않아야 할까가 더 큰 고민이다. 업보와 같은 내 배낭에 단 10g의 무게라도 더할 가치가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니 금세 물건이 추려졌다. 배낭 앞으로 멜 작은 가방을 사러 한 상점으로 들어갔다.

"이거 얼마죠?"

한국에서는 절대 메지 않을 듯한 알록달록한 가방을 하나 골랐다.

"150루피. 어디서 왔어요? 짜이 한 잔 줄게 앉아요."

가방 상인은 한국에서 왔다는 나를 반기며, 천이 가득 쌓인 곳에 내가 앉을 작은 공간을 내어줬다.

"고아랑 마날리 가봤어요? 내 거기에도 상점이 있지. 200명의 직원이 일하는 천 만드는 공장도 하나 있고."

200명의 직원은 다 어디로 갔을까. 주먹만한 가게에 홀로 앉아 가방을 팔고 있는 회장님의 말은 조금 믿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왔다고? 우리 와이프가 일본 사람이에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도 아주 많이 알지. 한국에서도 사업을 시작하면 아주 잘 될 거 같은데…. 내가 한국 친구들은 많은데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단 말이야. 어때, 천 띠어 줄 테니 한국에서 한 번 팔아 보겠어요?"

내가 인상 하나는 끝내 주나 보다. 만난 지 10분밖에 안 된 내가 오래 알던 한국 친구들보다 더 믿음직하다니. 뻔한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아저씨와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왜, 가방 안 사? 그럼 어디 악수나 한번."

까짓 악수. 나는 아저씨의 손을 꽉 움켜잡고 악수를 했다. 바라나시에서만 해도 손이라도 잡아 보려는 변태 같은 상인들의 속셈이 마음에 안 들어 절대 응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또 아무러면 어떤가 싶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열심히 꾸며 준 아저씨에게, 작별의 뜨거운 악수 한번 해 줄 수 있지.

머리가 저릴 만큼 깊은 고민 끝에, 셔츠 하나와 가방 하나를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직 내 처진 자루처럼 뉘어 있는 더스틴을 위해, 알록달록한 새 셔츠를 입고 코믹 버전의 인도 여인 댄스를 선사했다. 더스틴은 피식 웃더니 알약과 더운 물 대신 캔디 한 팩과 사이다 한 병을 입에 털어냈다. 그것도 약이라고, 조금 기운을 차린 듯하다.

하와마할에서 본 자이푸르 거리.
 하와마할에서 본 자이푸르 거리.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하와마할 내부. 사람 하나가 들어가서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다. 좁은 공간에 틀어앉아 조그만 창문으로 바깥 세상을 엿보았을 여인들을 상상하니 처연하다.
 하와마할 내부. 사람 하나가 들어가서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다. 좁은 공간에 틀어앉아 조그만 창문으로 바깥 세상을 엿보았을 여인들을 상상하니 처연하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발리우드 영화, 폭발하는 근육과 초절정 섹시 댄스의 조화

뉘엿뉘엿 지는 해의 노릇함과 뿌연 모래바람이 섞인 어지러운 길을 따라 라즈 만디르로 갔다. '왕의 궁전'이라는 뜻의 라즈만디르는 그 이름만큼이나 웅장하게 지어진 영화관이다. 은은한 조명. 레드 카펫. 클래식한 음악. 멋진 겉모습처럼 내부도 고상하다.

반전은 그 안에서 상영되는 영화다. 오늘 상영되는 영화를 안내하는 포스터.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새빨간 분노를 눈에 가득 담은 남자 주인공이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다. 제일 비싸다는 2층 다이아몬드 석의 가격은 120루피(한화 약 3천 원). 우리의 선택은 70루피짜리 1층 에메랄드 석.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며 보는 것이 발리우드 영화를 관람하는 태도라고 하니, 어디 땀 냄새나는 마초들 사이에 섞여 맘껏 즐겨보자.

라즈만디르에서 본 발리우드 영화.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새빨간 분노를 눈에 가득 담은 남자주인공이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다.
 라즈만디르에서 본 발리우드 영화.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새빨간 분노를 눈에 가득 담은 남자주인공이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라즈만디르 영화관에서 제일 비싸다는 2층 다이아몬드 석의 가격은 120루피(한화 약 3천원). 우리의 선택은 70루피짜리 1층 에메랄드 석.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며 보는 것이 발리우드 영화를 관람하는 태도라고 하니, 어디 땀 냄새 나는 마초들 사이에 섞여 맘껏 즐겨보자.
 라즈만디르 영화관에서 제일 비싸다는 2층 다이아몬드 석의 가격은 120루피(한화 약 3천원). 우리의 선택은 70루피짜리 1층 에메랄드 석.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며 보는 것이 발리우드 영화를 관람하는 태도라고 하니, 어디 땀 냄새 나는 마초들 사이에 섞여 맘껏 즐겨보자.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인도 영화에서는 키스를 비롯한 어떠한 성적인 행위의 묘사도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금기란 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성행위의 묘사가 금지된 인도 영화는 그렇기에 더욱, 노골적인 성묘사가 있는 서양 영화들보다 야릇하다. 비에 젖은 연인의 댄스, 반쯤 감은 눈으로 긴 머리칼을 날리며 마초들 중심에 서서 남자 주인공을 유혹하는 여인. 여느 걸그룹의 털기 춤을 능가하는 초현란 댄스. 보란 듯이 욕구 불만을 뿜어내는 이런 식의 장면들이 영화의 반을 차지한다.

힌두어라 하나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끝 간 데 없이 직설적인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잘생긴 주인공은 선이고 못생긴 대머리 뚱보 아저씨는 악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부모와 사랑하는 여인을 죽게 한 악당을 마침내 처치한다. 잘생긴 선의 승리! 못생긴 악마는 파멸을 면치 못한다. 세상이 이렇게 단순하다면 얼마나 이해하기 쉬울까. 그리고 또 얼마나 싫을까.

'왕의 궁전'이라는 뜻의 라즈만디르는 그 이름만큼이나 웅장하게 지어진 영화관이다. 은은한 조명. 레드 카펫. 클래식한 음악. 멋진 겉모습처럼 내부도 고상하다.
 '왕의 궁전'이라는 뜻의 라즈만디르는 그 이름만큼이나 웅장하게 지어진 영화관이다. 은은한 조명. 레드 카펫. 클래식한 음악. 멋진 겉모습처럼 내부도 고상하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권선징악의 영화 플롯은, 근육이 폭발하는 남자 주인공의 불타는 분노와 느닷없이 등장한 배꼽을 드러낸 여인의 섹시 댄스와 함께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흥분한 관객들도 절정에 다다른 스토리에 응답했다. 손뼉을 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더스틴과 나도 환호했다. 규율이 있지만 규율이 없는 인도 영화에. 영화를 보는 규율 따위는 없는 영화관에. 혼돈 그 자체인 어지럽고 시끄러운 인도 거리에. 계획 없이, 질서 없이, 규율 없이. 여기까지 용케도 여행을 이어온 우리의 용감무쌍함에. 그리고 지금 우리 손에 쥐어진 이 자유에.

하와마할에서 바라본 자이푸르.
 하와마할에서 바라본 자이푸르.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태그:#자이푸르, #자이푸르 바자르, #핑크시티, #북인도 트라이앵글, #인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