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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Itimad-Ud-Daulah)로 가는 길에서 본 야무나강(Yamuna River)의 풍경. 사람들이 강변에 천을 늘어놓고 초록, 빨강의 물을 들이고 있다.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Itimad-Ud-Daulah)로 가는 길에서 본 야무나강(Yamuna River)의 풍경. 사람들이 강변에 천을 늘어놓고 초록, 빨강의 물을 들이고 있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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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새벽 5시에 떠난다. 그러니까 검은 공기가 아직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을 때. 숙소를 떠나 기차역으로 가야 한다. 물론 저녁 7시에 떠나는 기차를 탈 수도 있다. 저녁 7시에 떠난다면 밤 12시에 자이푸르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둑한 밤 낯선 도시에 떨어져 숙소를 찾아 헤맬 용기는 아무래도 없다.

"이렇게 하자. 새벽 5시 기차를 타는 거야. 대신 5시 전에 밖으로 나오면 아직 날이 어둡고 위험할 테니까, 그 전날 저녁에 기차역으로 가자."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는 듯 더스틴의 얼굴이 자랑스럽게 빛났다. 못할 것도 없다.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 길로 기차표를 사러 아그라역으로 향했다. 어제도 봤고 그제도 봤던 기차역 주변 슬럼가의 익숙한 풍경이 다시 시야로 들어왔다. 나는 다시 이곳에 오게 될까. 그때도 이곳은, 이 모습 그대로일까. 그럴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아그라 야무나강(Yamuna River) 서쪽에 위치한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Itimad-Ud-Daulah). 무굴제국 제4대 황제인 제항기르의 장인인 미르자 기야스 백(Mirza Gyiyas Beg)의 묘로 자항기르의 아내 누르자한(Nur Jahan)이 지었다.
 아그라 야무나강(Yamuna River) 서쪽에 위치한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Itimad-Ud-Daulah). 무굴제국 제4대 황제인 제항기르의 장인인 미르자 기야스 백(Mirza Gyiyas Beg)의 묘로 자항기르의 아내 누르자한(Nur Jahan)이 지었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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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흘러가는 시간, 그 기차역의 다양한 사람들

일단 표는 손에 쥐었지만, 기차역의 삭막한 풍경을 보아 하니 내일 밤이 심히 걱정이다. 기차역 내의 숙소인 '리타이어링룸(Retiring Room)'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예약이 안 된다던 리타이어링룸은 어찌 된 일인지 다음날까지 모두 다 차 있었다. 다 차 있다던 방을, 힌두어를 하는 인도 아저씨는 잘만 얻어갔다. 외국인인 우리는 절대로 방을 차지할 수 없는 구조였다. 따지는 것도 지쳤다.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내가 재잘재잘 떠들어대든 말든, 기차역 직원은 시큰둥하기만 하니.

다음 날, 짐을 챙겨 숙소를 나오니 아직 벌건 해가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뭉그적거릴 시간이 한참 더 남았지만 그건 내 기준일 뿐이다. 비행기를 탈 때도 출발 4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안심이 되는 더스틴이다. 기차도 예외일 순 없다. 불안해하는 사람 기준에 맞춰야지 어쩌겠는가.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6시. 기차 출발까지는 12시간이 남았다.

아무리 봐도 갈 곳이 없었다. 플랫폼은 이리저리 이동하는 사람들로 혼잡했다. 삼등석 대기실로 갔다. 커다란 짐에 둘러싸인 사람들이 가득하다. 콜카타로 가는 가족.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젊은 남자. 장시간 대기를 위해 담요와 망토를 챙겨온 할머니. 우리도 한쪽 구석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우리처럼 내일 새벽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시간은 단 한숨도 거르는 적 없이, 한 초 한 초 짚으며 꼬박꼬박 흘러갔다. 이따금 몇 분 정도 뛰어넘을 법도 하건만. 우리 곁으로 수명의 여행자가 적당한 시간 동안 기차를 기다리다 떠나갔다. 여행자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친구끼리 온 두 일본 여자는 커다란 캐리어를 옆에 두고 서로 조용히, 각자의 두꺼운 일기장에 글을 적었다. 친구와 같이 여행하다 헤어지고 처음으로 혼자 밤 기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영국에서 온 캘리. 조드푸르로 가서 3개월 정도 머무르며 의사 실습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혼자,' '처음'이라는 단어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그래도, '설렘'이라는 아우라가 캘리의 앞날을 밝히는 듯하다.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Itimad-Ud-Daulah)는 타지마할보다 13년 앞서 건축되었으며, 타지마할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베이비 타지마할’이라고도 불린다.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Itimad-Ud-Daulah)는 타지마할보다 13년 앞서 건축되었으며, 타지마할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베이비 타지마할’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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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이 문을 열어주면 안 돼요"

책 읽기와 카드 게임 하기를 번갈아가며 20번 정도 하자, 밤다운 밤이 찾아왔다. 기차는 대기실의 공기를 후덥게 채우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챙겨 싣고 떠나갔다. 이윽고 세 명의 남자만 남아 우리와 함께 조용히 대기실을 지켰다. 이제 오롯이 앉아 밤을 새울 준비를 해야 한다. 잠바를 꺼내 입고 목에 둘렀던 스카프를 풀러 머리를 감쌌다. 내가 할 수 있는 노숙 준비의 전부다.

잘 수는 없었다. 누군가 우리의 전 재산인 35리터짜리 배낭을 들고 가 버릴지도 모른다.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잘 곳이 없다는 게 이렇게 불안한 일이라는 걸, 근 30년을 살아온 지금에야 깨달은 걸 보면 나도 나쁜 팔자는 아니었나 보다. 우리는 하던 대로 책 읽기와 카드게임을 무한 반복했다. 그렇게 자정이 넘었다.

밤이 꽤 깊었다고 생각할 무렵. 경비 한 명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이상하게 생긴 외국인 두 명이 대기실에 들어앉아 있는, 예상치 못한 광경을 발견한 경비.

"여기서 뭐 해요? 몇 시 기차예요?" 

새벽 5시라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들은 경비는, 우리와 함께 앉아있던 남자 두 명을 밖으로 내보냈다.

"내가 나가면 여기 이 문을 잠가요. 누가 열어 달라고 해도 절대로 열어주면 안 돼요."

우리가 앉아 있던 대기실 뒤쪽 공간에는 단단한 쇠문이 달려 있었다. 많이 위험한 건가. '절대로'라는 말에 머리가 하얘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쫓겨난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먼저 살고 볼 일이다. 더스틴이 문을 조심스럽게 닫아 잠갔다.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Itimad-Ud-Daulah)의 전경. 타지마할에서 4km 떨어져 있다.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Itimad-Ud-Daulah)의 전경. 타지마할에서 4km 떨어져 있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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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기차역, 쥐들과 벌인 5대 1의 외로운 사투

다시 자리에 앉았다. 책을 읽는 것도, 게임을 하는 것도, 잡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이제는 힘에 부친다. 밤새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는데. 그것도 놀고먹을 때 얘기다. 온종일 돌아다니다 잠자리 걱정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공간이 확보되자 피로가 쏟아졌다.

"안 누워. 저 바닥엔 절대로 안 누워…." 

대기실 바닥에는 몇 시간 전 인도 가족이 먹다 흘린 주황색 탈리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내 발자국을 포함해, 소똥과 온갖 오물이 가득한 인도 거리를 활보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닿은 곳이다. 그야말로 인간이 몸을 뉘일 수 있는 가장 불결한 바닥이다. 내 아무리 피곤해도, 저 바닥에 누워 잘 순 없다. 누가 누우라고 권한 것도 아니다만. 나는 절대로 안 눕겠다고 주문을 외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까 그 아줌마가 망토 깔고 바닥에 눕던데. 그 망토 덕에 바닥이 조금 닦이지 않았을까?' 
'삼등석 기차 침대에는 잘도 눕잖아? 그 침대나 이 바닥이나 비슷한 수준일 걸?'

피로에 조여오는 몸이 질세라,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불결함에 대한 나의 강렬한 거부감도, 천금처럼 쏟아져 내려 눈두덩을 무자비하게 짓밟아대는 피로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의지가 박약한 나다. '절대로' 눕지 않겠다던 나의 다짐은, 5분도 안 돼 무너져 내렸다.

"안 되겠다. 침낭 깐다."

지난 5분간 내 머릿속에서 벌어진 치열한 투쟁의 역사를 알 리가 없는 더스틴이 맘대로 하라는 듯 나를 힐끔 쳐다봤다. 불결함에 대한 마지막 보류로, 배낭 커버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침낭을 깔았다. 풀썩 누웠다. 아 좋다. 천국 같다. 이렇게 더럽고 불결한 천국이 다 있나.

아그라 삼등석 대기실 바닥에는 몇 시간 전 인도 가족이 먹다 흘린 주황색 탈리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내 발자국을 포함해, 소똥과 온갖 오물이 가득한 인도 거리를 활보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닿은 곳이다. 하지만 불결함에 대한 나의 강렬한 거부감도, 천금처럼 쏟아져 내려 눈두덩을 무자비하게 짓밟아대는 피로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 바닥에 침낭을 깔았다. 풀썩 누웠다. 아 좋다. 천국 같다. 이렇게 더럽고 불결한 천국이 다 있나.
 아그라 삼등석 대기실 바닥에는 몇 시간 전 인도 가족이 먹다 흘린 주황색 탈리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내 발자국을 포함해, 소똥과 온갖 오물이 가득한 인도 거리를 활보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닿은 곳이다. 하지만 불결함에 대한 나의 강렬한 거부감도, 천금처럼 쏟아져 내려 눈두덩을 무자비하게 짓밟아대는 피로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 바닥에 침낭을 깔았다. 풀썩 누웠다. 아 좋다. 천국 같다. 이렇게 더럽고 불결한 천국이 다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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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은 나와 다르다.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곳에서, 정신을 잃고 잠에 빠져들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졸리면 만사 상관 않고 잠들어 버리는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은 나를 믿고 자다간, 기차를 놓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너는 자. 나는 보디가드를 하겠다."

더스틴의 민감한 성격 덕에 조금 눈을 붙였다. 10분인지 10시간인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잠이 깼다. 눈을 뜨니 더스틴이 사나운 눈으로 위를 바라보며 "스~! 스~!"하는 괴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해?"

더스틴은 나에게 흘깃 눈치를 주더니 다시 위쪽을 바라봤다. 졸음에 절은 나의 눈이 더스틴의 눈짓을 따라갔다. 천장 벽에서 쥐 다섯 마리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것들이 우리 눈치를 살피고 있어. 바닥에 있는 음식 부스러기를 노리는 게 분명해. 자칫 방심하다간, 이쪽으로 내려올 거야."

내가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사이, 더스틴은 쥐들과 1대 5의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상대적으로 머릿수가 밀리는 우리 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더스틴 곁에 앉아 쥐들을 노려봤다. 쥐들이 아래로 내려오려고 움찔거릴 때마다, 더스틴은 어디에서 쥐 쫓는 소리는 배웠는지
"스~! 스~!" 하고 사납게 울어댔다. 나도 어설프게나마 "스~!" 하고 울었다. 효과가 있는지 쥐들은 금세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우리를 내려다봤다.

아그라 삼등석 대기실. 천장 벽에서 쥐들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더스틴은 밤새 "스~ 스~" 하고 사납게 울며, 쥐들과 1대 5의 외로운 사투를 벌였다.
 아그라 삼등석 대기실. 천장 벽에서 쥐들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더스틴은 밤새 "스~ 스~" 하고 사납게 울며, 쥐들과 1대 5의 외로운 사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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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는 동떨어진 우리 관계, 그러나 고맙다

쥐들을 노려보고 있자니 눈이 더 피로하다. 더스틴을 돕겠다던 의지도 금세 또다시 피로에 꺾였다. 나는 다시 나의 천국 침낭 위로 돌아갔다. 쥐를 쫓는 더스틴의 울음소리에 흠칫 놀라 잠깐씩 깼다 다시 잠에 빠지기를 반복했다. 한 번은 용감한 쥐 한 마리가 더스틴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잽싸게 창문 아래로 내려와 뭔가를 집어 올라갔다.

측은해라. 사람들이 흘리고 간 부스러기를 실컷 먹을 수 있는 밤 시간만을 기다려왔을 텐데. 괜한 불청객인 우리 탓에 주객전도로 눈치만 보고 있는 쥐들도, 한밤에 홀로 쥐와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더스틴도, 측은해라 측은해….

"내가 보디가드 할게. 너도 좀 자."

미안한 생각이 들어 더스틴에게 내 침낭 자리를 내 주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내가 그 말을 믿고 잤다가는, 잠에서 깨어난 즉시 옆에서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널 발견하게 될 거다."

쳇.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신경한 나를 저리 잘 알다니. 나는 바로 인정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의지,' '의존,' '보호' 같은 단어와는 동떨어진 우리 관계다. 그래도 고마운 줄은 알아야겠다. 더스틴이 없었다면 인도의 좁은 길 구석구석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없었을 거다.

밤에 길을 잃어도 두려운 생각이 없었던 건 더스틴이 옆에 있었기 때문일 거다. 생명의 위협 없이 기차역 삼등석 대기실에서 밤을 지새울 수 있었던 것도…. 아니 이건 아니지. 더스틴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 짓도 안 했겠구나. 어쨌든 고맙다.

염색 작업 중인 야무나 강변 사람들
 염색 작업 중인 야무나 강변 사람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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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것 같던 밤도, 해가 다가서자 조금씩 자리를 비켜주었다. 잠시나마 눈을 붙였지만 몸이 부서질 듯 피곤하다. 기차에 올랐다. 꿈 세계와 기차 세계 사이를 왔다갔다 오가며 꾸뻑꾸뻑 졸았다. 졸음과 함께 내 머리통도 창문에 박아 휘청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5시간. 기차가 자이푸르 역에 도착했다.

춥다고 창문을 닫으려다 창문이 작두처럼 내리치는 바람에 손을 심하게 찌었다. 기차역 노숙은 아무래도 무리였는지,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20년간 무슨 짓을 해도 나오지 않던 코피가 터졌다. 일 주일간 달고 산 코감기와 목감기에 생리까지 겹쳐 몸도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몸이 이곳저곳에서 애통하게 피눈물을 흘리며 나를 원망하는 듯하다.

아무렴 어떠냐. 내 옆에는, 기차 시간도 잘 지키고 용케 쥐 쫓는 소리도 낼 줄 아는 더스틴이 있지 않은가.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에서 본 야무나강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에서 본 야무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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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아그라, #아그라 기차역, #자이푸르, #인도 기차,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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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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