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죠? 죽겠죠? 우리 현실은 더 지옥같습니다.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을'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인태연 전국 '을'살리기 공동대표의 말에 자리를 채운 300여 명의 상인들은 묵묵히 박수를 쳤다. 지친 표정이었다.
9일 경제민주화 국민대회 및 '을' 살리기 문화제가 열린 서울 여의도공원은 뜨거웠다. 수은주도 연중 최고인 32도를 찍었다.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는 더 더웠다. 그러나 행사가 진행된 2시간 동안 자리를 뜨는 상인들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 등 야당 정치인 20여 명도 행사에 함께 참여했다. 이들은 이날 정부와 여당에 "중소상인·자영업자 살리기 8대 입법요구안을 즉각 수용하고 6월 국회에서 통과시키라"고 요구했다.
"자영업자 600만 명 '을' 살려야... 여당도 나서라"개회사를 맡은 인태연 공동대표는 '갑을 관계'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후 '을'이 희망을 꿈꾸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같은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는 남양유업 대리점주 한 분이 6개월 전 영업사원과 동반자살 하려는 의도로 우리 가게에 손도끼를 하나 마련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나이도 젊고 아내와 딸 셋 있는 대리점주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현실이 너무 막막하고 탈출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희망을 보고 다시 살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날 자리를 채운 정치인들은 이같은 요구에 응답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경제력 집중으로 인한 성장지상주의가 한계점에 이르렀고 을들이 더이상 참고 살 수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민주당은 재고품 밀어내기, 중소기업 단가 후려치기 못하게 하는 법을 꼭 통과시키겠다"고 덧붙였다.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는 87년 6·10 항쟁 얘기로 입을 열었다. 6·10항쟁이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정부와 여당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일어났는데 그때와 지금 정국이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노 대표는 "87년 당시 민정당이 오늘의 새누리당인 셈"이라면서 "그때 직선제 요구 안 받아들이더니 지금은 경제민주화 법안을 안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당은) 오늘 왜 이 자리에 안 온 것이냐"면서 "자영업자 600만 명, '을' 살리는 게 나라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여당도)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상인들은 대규모 집회에 걸맞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어려움을 토로해 눈길을 끌었다. 문구점 상인들은 자신들이 문구점에서 실제로 판매하는 제품들을 가져와 무료 시식행사를 열었다.
상인들은 "우리가 판매하는 것은 불량식품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가 불량식품을 척결해야 할 '4대 악' 중 하나로 꼽으면서 직격타를 맞았다.
대구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는 백원대씨는 "요즘 문구점에서 파는 식품들은 정부에서 허가를 다 해준 것들"이라면서 "불량식품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허가 해주고 세금 다 받아가놓고 영세한 문구점만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문구점 상인들이 준비한 진열대에는 농심 '첵스', 크래프트 사의 '오레오' 등 대형마트에서 파는 제품들도 놓였다. 내용물은 같지만 크기가 작아 슈퍼나 마트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상품이라는 게 상인들의 설명이다.
상인들과 함께 온 초등학생들은 시식을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를 추천하기도 했다. 백씨는 "국회의원들이 저렇게 많이 왔는데 새누리당 의원들은 왜 한 명도 안 보이는지 궁금하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우리는 착취대상 아니다"편의점주연합회에서는 냉커피와 음료수를 얼음이 든 컵에 무료로 나눠주는 행사를 벌였다. '캔음료 1000원, 본사수익 140원, 점주수익 37원'이라는 손팻말과 함께였다.
이날 나온 한 편의점주는 "캔음료 1000원을 팔면 200원 정도 이익이 남는데 여기서 본사가 140원을 바로 떼어 간다"면서 "그리고 거기에서 임대료, 아르바이트생 임금, 전기세 등을 빼면 37원이 남는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본사와 점주가 이익을 배분하는 구조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이 많은 청년유니온에서는 이날 편의점주들을 지지하는 연대발언을 했다. 한지혜 청년유니온 대표는 "청년들이 편의점에서 최저임금도 못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나 최저임금을 못 주는 점주나 알고보면 비슷한 처지"라고 말했다. 편의점주가 최저임금을 안 주는 게 아니라 본사의 횡포로 못 주는 상황이 많고 넓은 관점에서 보면 둘 다 사회적 약자라는 얘기다.
시민사회단체들도 행사에 나와 연대 차원의 활동을 진행했다. 현장에서 중소상인들을 위한 법률 상담을 진행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조대진 변호사는 "가맹본사 등 '갑' 측에서 대놓고 불법적으로 괴롭히는 사례도 있지만 납품관계 등 사실적 구속력을 이용해서 법률로 대항할 수 없게 만드는 사례들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 변호사와 함께 법률상담을 진행한 박범계 민주통합당 의원은 "남양유업 대리점 같은 사례가 많은데 점주분들이 순진해서 거래자료를 남겨놓지 않았더라"라면서 "법률적으로 대항하기 어려운 케이스들이 많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전국 '을'살리기 비대위와 경제민주화 국민운동본부 등이 주최한 이날 행사는 경제민주화와 '을' 살리기 선언문을 낭독하며 마무리됐다. 이창섭 남양유업대리점협회 회장은 "우리는 갑들의 착취 대상이 아니라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 관심 가져달라"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