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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종이 따로 필요 없는 숙소. 창문 옆 나무에는 매일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나타나 한 이십 분 어간을 재잘거리며 내 달콤한 새벽잠을 방해하는, 조금은 잘난 척 하는 별난 새 한 마리가 있으니, 녀석은 내 숙소와 이웃집을 번갈아 가며 쫑알거리는데, 아침 일찍부터 잠기지도 않은 목청이 어찌나 큰지 모른다. 친구도 없고 딱 한 놈인데도 누구에게 무슨 말을 새벽부터 해대는 것일까? 오늘도 이름 모를 들새의 점호와 함께 아침을 맞는다.

 

아침 여섯 시, 서울보다 더한 출퇴근 시간의 교통체증을 피하려 일찍 집을 나섰다. 건축전문가 서강열 상무의 숙소를 방문하여 짧게 아침을 먹고 한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전날 복사해 둔 도면과 시방서, 물량내역서 등을 차례차례 책상 위에 배열하고, 볼펜과 물을 준비하는 서비스까지 발휘하니 9시가 막 넘었다. 이 즈음부터 업체에서 하나 둘 대사관을 방문하기 시작, 설명회를 시작할 열 시가 되니 우리가 초청한 열두 개의 업체 대표가 모두 참석하였다.

 

애초에 신청서를 제출한 서른 여덟 개의 업체 중 1차를 통과한 업체는 12개 업체. 중국업체 두 개와 영국업체는 1차 자격 선정에서 탈락하고, 12개 업체 모두 가나 현지 업체가 되었다.

 

국제입찰 및 가나 현지 입찰 규정을 철저히 따른 것인데 결국 어찌되었든 가나 업체가 최종 선별 업체로 예상이 되었으니 천만 다행이다. 스물 두개의 학교를 짓는 사업을 가나 건축업체를 통해 수행하게 되어, 결국 가나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원조사업의 원칙을 잘 준수하게 된 것이다. 

 

 

입찰설명회는 팽행한 긴장 가운데 진행되었다. 참여한 12개 업체 가운데, 적게는 1개 많아야 4개 업체를 최종 선정하게 되는 지라, 오늘 참여한 업체의 대다수도 결국에는 탈락하게 되는 것이다. 참여한 업체 대표들은 하나라도 놓칠 새라 숨을 죽인 채 추가로 제출할 서류와 차후 일정을 하나 하나 확인하였다.

 

한국 정부 대표로 주가나 한국대사관 류호권 참사관, 가나 정부 대표로 교육부의 건축담당 선임인 스미쓰 씨가 서두 인사를 하고 바로 입찰 설명에 들어가, 조목 조목 차후 일정과 제출 서류를 안내하고나니 한 시간 반 가량이 흘렀다.

 

이번 사업의 가장 큰 목적이, 가나 동부지역의 어린 학생들이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강조하며, 이윤에만 너무 집착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끝인사를 가름했다. 이렇게 건축업체 입찰을 위한 첫 행사가 순조롭게 끝이 나고, 다음으로 5월 중순에 있을 최종 평가를 준비해야 한다.

 

입찰설명회를 끝내고 서강열 상무의 귀국을 준비했다. 시내로 나가 가나 최대의 시장인 막골라 시장에 잠시 들렀다. 막골라 시장으로 가는 시내 도로는 언제나 차가 막힌다. 남대문 시장 못지않은 규모에, 버스 정류장까지 들어서 있어서 시골에서 막 내려온 사람들과 돌아가는 사람들에 더해, 하나라도 더 팔 요량으로 정신없이 인파를 헤집고 다니는 날품 파는 사람들로 더욱 북적이는 시장.

 

 

하수구로 둔갑한 조그만 냇가에는 내다 버린 망고씨앗, 깎아낸 파파야 껍질, 그리고 아이를 씻겨낸 물이 뒤섞인 채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이따금 이는 먼지바람과 함께 시커먼 비니루 봉지가 용틀임을 하다 다시 곤두박질친다. 그러나 여기는 사람이 살며 사람이 오가는 시장. 고약한 냄새는 땀냄새와 뒤섞이고 땀냄새는 사람들의 작은 희망과 버무려져 둘숨 날숨 시장 이곳 저곳에서 피어오른다.

 

시장 어귀의 도로 풍경, 몽치로 여기저기 힘껏 두들겨 맞기나 한 듯 매끄럽지 않은 차체는 모서리마다 황달이 뜬 듯 우둘투둘 녹이 슬었다. 세계 각지의 중고차란 중고차는 다 모인 것 같아, 말년의 차들이 여생을 보내는 '허름한 차들의 실버타운'이라고나 할까? 그중 택시로는 우리나라에서 이미 단종이 된 티코와 프라이드가 그 주를 점하고 있다.

 

아크라 시내에서 가장 폐품에 가까운 중고차는 단연 택시와 트로트로이다. 가나 서민들의 주 교통수단, 트로트로. 우리말로 하자면, '찔끔찔끔' 정도. 주요 도시의 간선도로를 달리는 제대로 된 번듯한 교통수단인 '버스'가 있긴 하나 아크라 시내, 출퇴근하는 가나 사람들의 유일한 수단은 바로 이 트로트로이다.

 

 

이 허름한 미니버스와 중고택시는 아크라 시내의 아침과 저녁을 거의 마비에 가까울 정도로 혼잡하게 한다. 그뿐인가? 마치 최루가스를 뿜어내듯 쉴 새 없이 연통에서 터져 나오는 시커먼 매연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연신 손을 휘저으며 숨을 참아야 하는 인내를 요구한다.

 

누군가가 쓰다 버린 냉장고에 저장해둔 아침을 먹고, 누군가가 쓰다 남은 헌 옷을 입은 채, 누군가가 쓰다 내준 헌 차를 타고 일터로 나가는 아크라 시내의 가난한 시민들의 하루. 그러나 이 역시 이방인의 눈에서 바라본 시점일 뿐이다.

 

처음 얼마동안 아크라 시내를 오가며 중고차들이 토해내는 지독한 미세분진에 혀를 내두르며, 정부가 이 지독한 매연을 왜 규제하지 않는지 무척이나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해서 이곳 최대의 시장인 '막골라' 시장에 밀려드는, 시골에서 상경한 수많은 인파를 보고 나는 내 생각들을 다시 하나씩 점검해야했다.

 

망고와 바나나, 플렌틴, 오렌지, 파파야를 머리에 잔뜩 이고 내륙지방의 가난한 시골 주민들이 이곳 아크라 시내로 남향을 한다. 내 기억을 더듬어, 지난 해 이맘 때 즈음 가나 중부지역 시골을 지날 때 바구니 한 가득 담긴 망고가 1세디(천원가량)였다. 막골라 시장에서 서너 개면 1세디를 받고 넘길 수 있으니 못해도 서너배는 남는 장사. 하루 종일 망고를 부지런히 팔면 5-6 세디를, 운 좋은 날이면 10-20세디를 버니, 이 쯤이면 수지가 맞는다.

 

이렇게 가나 중부에서 아크라 시내에 오는데 50페스웨스에서 2세디(약 500원~2천원) 정도다. 중고폐차를 규제하면, 수입하는 차량이 줄어들 것이고 또한 버스요금이 올라갈 것이다. 그러면 마을에서 딴 열매를 내다파는 것이 유일한 소득인 그 많은 시골주민들은 더 이상 남는 장사를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뿐 아니다.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너댓 시간은 이어지는 그 지독한 교통체증 또한 가난한 이들에겐 중요한 생계수단의 구실을 제공해준다는 사실. 아크라 시내 곳곳에서 매일 벌어지는 교통난 속에서 날품을 팔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어림잡아 수만 명의 단위는 될 것 같아 보인다. 인근 도시인 테마와 중부 내륙 쿠마시(제2도시) 그리고 북부 타말레(제3도시) 등 주요도시를 합하면 이렇게 생활을 연명하는 사람들이 십만 단위로 넘어갈 것이 확실하다.

 

차가 막히는 틈을 타서 파는 물건은 그 종류도 가지가지다. 단연 으뜸인 상품은 비닐 포장된 물. 도매로 1페스웨스(10원) 정도 되는 이 비닐봉지 속의 물이 도로 가에 나오면 50페스웨스(50원)에 팔리니, 날품 노동의 가치가 40페스웨스 가량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시원한 냉수에 담갔다가 파는 콜라와 사이다(스프라이트)가 우리 돈 천 오백원 가량에 팔리고, 이 경우 이윤이 절반이 남는다고 한다. 그렇게 수십 혹은 수백 명이 정체된 차량행렬 사이를 비집고 다닌다. 껍질 벗긴 파파야와 사과, 과자와 빵, 신발과 옷가지, 중국산 부채와 장식품, 지도와 액자 등 그야말로 이동용 백화점이나 다름없다.    

 

폐포 속을 파고들며 이들의 건강을 심각하게도 해치는 중고 말년 차들의 행렬은 역설적이지만, 날품 파는 이들이 생계를 이어나가는 구실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기막힌 거리풍경은 개발이 주는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개발은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매정한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 개발의 십자가를 가난한 이들이 덤터기로 뒤집어 써야 하는 경우라면 더욱 말리고싶다.

 

그러나 불안하듯 이어지는 아크라 시내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마냥 어둡게만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오늘 부지런히 날품을 팔면, 예전엔 꿈도 꿀 수 없었던 말라리아 약을 5세디면(오천원) 거뜬히 살 수도 있고, 몇 시간을 걸어가 탁한 물가에 가지 않아도, 깨끗한 물을 5페스웨스(5십원)에 손쉽게 마실 수 있는 건 분명히 밝은 이야기니까.

 

이제 그들이 막 밟고 올라서기 지작한 발전의 사다리가 휘청거리지 않도록 옆에서 자그마한 힘을 보태어 지지해주는 것. 미약하나마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에, 음울한 관조보다,  힘찬 박수로 이들을 응원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개발이, 가나의 가난한 이들, '바로 그들'이 만들어내는, '바로 그들'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게!

 

막골라 시장의 사람들 냄새에 한참을 취한 후, 나는 3세디(3천원)를 주고 망고 아홉 개를 사고, 25페스웨스(250원)를 내어 트로트로를 타고 시장을 빠져나왔다.

 

참, 날품을 파는 소년에게서 50페스웨스(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서 운전사에게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시장의 일부 상인들이 사진 촬영을 싫어하셔서, 막골라 시장의 생생한 모습을  담지 못했습니다. 


태그:#가나, #막골라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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