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크라에서 북향, 230km 거리에 있는 판테아크와 군. 세 시간 가량 차를 타고 사업지역으로 내려갔다. 트로트로를 타고 가면 동부지역 수도인 코포리두아 시내 터미널에서 판테아크와 군 중심마을인 베로고 읍내로 가는 차로 갈아타야 한다.

 

가나의 행정구역은 동부지역, 서부지역, 북부지역 등 10개의 광역권으로 구분되어 있고, 그 아래로 다시 군(district) 단위로 분할되어 있다. 이번 사업의 대상지역인 판테아크와 군과 콰후노우쓰 군은 동부지역에 속해 있는데, 가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할 수 있는 볼타호수와 위와 아래로 연해 있다.  

 

도로 중간 중간이 듬성듬성 꺼져 있어 조금 주의해야 하는 것만 빼면, 판테아크와 군 입구까지 도로는 꽤 잘 정비되어 있다.

 

우기 초입을 맞아 들풀들은 지면으로 스며든 습기를 힘껏 빨아들여, 팽팽하게 윤기 나는 초록빛을 머금고 있다. 수풀은 끝없이 이어져 멀리 지평선을 만들고 있고, 이따금 도로가에서 누군가 베어낸 잡풀 냄새가 은은히 번져, 머릿속을 시원하게 훑고 지나간다. 나무들은 굴곡 없이 곧게만 자라 들판 위에서 하늘로, 하늘로 향한다.

 

사업지역 중 한 곳인 판테아크와는 볼타호수 아래에 위치해 있다. 산이 없는 평야가 대부분인 수단-사반나(Sudan-Savannah) 기후의 가나에서 유독 산과 언덕이 많은 곳이 바로 이 판테아크와 군이다. 산이 많다보니 밤마다 산에서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오고, 지나가던 구름이 지친 여정을 멈추고 한참을 쉬었다 가는 곳. 산마루에 걸려있는 먹구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여관에 행장을 풀었다.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며 창문을 두드린다. 난간으로 나가 밖을 내다보니 언덕 위 하늘 위로 방금 갈아만든 듯한 시커먼 먹물이 산 아래 마을을 삼킬 듯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숙소는 곧 정전이 되고, 창가로 불어 닥친 밤바람에, 젖힌 커튼이 요란하게 헝클어지며 파드득 거리고, 어둑어둑해진 창밖으로는 나무 한 그루가 밤비에 휘감겨 심하게 휘청거린다. 앞으로 2년간 머물 마을, 베로고. 호기심과 기대감이 뒤섞인 밤, 굵은 빗방울은 그렇게 쉴 새 없이 내 숙소 천정을 두들기며, 낯선이에게 단단히 텃세를 부리더니 새벽이 되서야 겨우 분이 풀렸는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간밤 요란한 신고식을 톡톡히 치르고, 맑은 해가 아침을 알렸다. 서둘러 수첩과 연필을 챙기고, 잠시 내리막길을 지나 다시 오르막길을 종종 걸음을 걸어 교육청으로 향했다. 학교로 나가는 꼬마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며 "아브로니, 아브로니!(백인)"를 연발하며 천진난만한 인사를 건넨다. 이른 아침 밭으로 나가는 어른들은 자꾸 눈 마주치기를 피한다. 이제 곧 이웃이 될 터인데, 먼저 인사를 나눠야겠다 싶어 가볍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굳었던 얼굴 대신 곧 하얗게 이를 드러내는 미소로 답례를 한다. 

 

군데군데 더께가 앉긴 했지만 그래도 번듯한 시멘트 건물, 교육청에 도착하고 청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이른 아침, 판테아크와 교육청 대문을 들어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월드비전에 교육사업 후원을 하시는 한 후원자의 사업 건 때문이다.

 

 

"아! 정말 뭐라고 답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분을 뵐 수 있으면 영광이겠습니다."

 

청장님과 또 회의에 함께한 교육청 공무원들이 인사 대신 그분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을 하다 몇 해 전 사임을 한 후, 평생 모은 퇴직금으로 아프리카에 학교를 짓는데 후원하시는 분. 나는 아직 그 분 이름 석자 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

 

가끔 그에게서 받는 격려의 편지가 내가 그를 알 수 있는 전부. 지난 해까지 그를 통해서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학교를 벌써 네 동이나 지었다. 이번에 사업지역을 시에라리온에서 가나로 옮긴 차에, 교육청장에게 가장 필요한 학교를 선정해달라고 오래 전에 의뢰를 하였었다.

 

 

"차선생! 대상 학교는 보쏨츠웨 초등학교입니다."

 

교육청장의 눈빛 속엔 한국의 한 후원자에게서 받은 감동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교육청장은 학교 선정 과정에 함께 한 교육청 공직자들을 모두 부르더니, 대상학교를 보쏨츠웨 초등학교로 선정한 이유를 소상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차선생, 우리가 신축대상학교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학교가 '얼마나 많이 낡았느냐'입니다. 이건 이해하기 쉽지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 더해서 '학교신축을 완공한 이후에 어떤 영향을 가져오느냐?'도 꼭 고려해야 하는 사항입니다."

 

교육청장은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환경이 안 좋은 학교가 많지요. 여기 저기 새로 지어주어야 할 학교가 많답니다. 그런데 저희가 우선순위를 매기는 기준이 있답니다. 가장 낡은 학교를 새로 지어주는 것이 맞습니다만, 그것에 아울러서 새로 학교를 지은 다음에 그 마을과 또 그 주변의 마을에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인지도 함께 생각해야 한답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가나 정부 혹은 유엔이나 기타 NGO에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 순위를 매겨놓았습니다."

 

사업 발굴 단계에서 즉흥적인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인 기준을 정하고, 그에 따라 군 전체의 학교를 대상으로 체계적으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각종 지표를 근거로 이미 신축대상 목록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보쏨츠웨 학교는 사실 그 열악한 정도에서만 보면 가장 우선순위는 아니랍니다. 그나마 진흙으로 지어져서, 아예 벽도 없고 지붕도 없이 그냥 나무 밑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학교가 있답니다. 차선생도 몇 차례 방문을 했고 또 여기 월드비전 사업보고서를 통해서 잘 아시죠?"

 

"네 잘 알고있습니다." 나무 밑에서 책상만 놓고 수업을 하는 광경, 창문도 벽도 없어 염소가 지나다니며 배설을 해서 학습 환경을 심하게 어지럽히는 모습 등 차마 학교라고 말을 하기가 거북할 정도의 안타까운 풍경을 여럿 보아온 터다.

 

"그런데 보쏨츠웨 학교가 아이들이 벌써 200명 가랑이 됩니다. 그리고 그 주변 마을이 여덟 개 마을이 되는데, 모두 합해 지역주민들이 5천 명가량 됩니다. 안타깝게도 그 지역의 아이들이 변변한 학교가 없어서, 몇 시간을 걸어가서 수업을 듣고 있지요. 보쏨츠웨 학교가 번듯하게 세워지면 아마도 그 학교는 주변 마을의 아이들로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넘쳐날 겁니다."

 

판테아크와 군 250여 개의 학교 중에 시급히 신축을 해야할 학교가 30여개가 넘고, 학교 신축의 필요성과 신축 후에 인근 마을에까지 미칠 파급효과에서 보쏨츠웨 학교가 단연 1위였다.

 

1972년 설립, 교사 8명, 교장 1명, 학생 수 200여 명. 교사 8명 중 여 교사는 2명인데 모두 비정교사, 남교사 중 2명만 정교사. 우리는 다음 날 보쏨츠웨 학교를 방문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베고로 마을로 내려온 지 이틀 째, 보쏨츠웨 초등학교를 방문하고자 읍내를 떠나자, 아스팔트길은 곧 비포장도로로 바뀌었다. 교육청직원이 직접 운전을 한다. 낡은 이륜차가 만들어내는 건조한 황토 바람이 바퀴를 따라서 계속 우리를 쫓아온다. 아이들이 떼를 지어 물동이를 이고 집으로 간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조마조마한데, 아이들의 얼굴엔 구김살 없는 함박웃음만 가득하다.

 

교육청직원은 먼지바람이 아이들의 물동이로 들어갈까 조바심을 내며 조심스레 차를 몰았고 우리는 그렇게 한 시간을 더 가서 보쏨츠웨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는 가파른 언덕에 흙벽으로 지어져있었다. 1972년에 설립된 학교라 하니, 이런 시골 두메마을에 35년도 더 전부터 학교가 있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학교를 잠시 둘러보는 사이, 교실 한 곳에 교장선생님과 아이들, 그리고 선생님과 학부모들이 두런두런 모였다. KOICA에서 지원하는 학교 신축 대상에 선정되지 못하여 한참을 아쉬워하고 있던 찰나, 우리의 방문 소식으로 그들은 벌써 고무되었다.
 

 

 

창문도 없는 흙벽 사이로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우리를 쳐다본다. 산간 마을이라 외지인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나마 차로 한 시간 거리인데다, 보쏨츠웨 학교까지 오는 그 한 시간 동안 단 한 대의 차량도 볼 수 없었으니, 아이들의 호기심은 오죽하였을까?

 

학부모위원회, 학교운영위원회, 학생들, 그리고 선생님들을 모두 모시고 학교 신축에 대한 설명과 아울러 한 후원자분의 마음을 전달해드렸다. 공식 설명회를 진행하는 사이, 이따금 아이들이 흙벽 위로 고개를 힐끔 내밀며, 소곤소곤 거린다. 

 

나는 끝내 호기심을 참지 못하여, 설명회를 잠시 빠져나와 아이들에게로 갔다. 수줍은 웃음으로 도망가는 아이들과 학교 건물을 찍는 내 카메라를 따라 슬며시 뒷걸음질치는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모습에서 가난이 아닌 넘치는 풍요를 보았다 이야기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덧붙이는 글 | 보쏨츠웨 학교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도 이어집니다.


#가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