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당 고산유물전시관에 가면 여러 문헌 중에 한글로 휘갈겨 쓴 한 편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해남윤씨 인물들 중 고산 윤선도는 한문 문학의 숲에서 고아한 우리 글을 통해 문학적 업적을 남겼는데, 이러한 집안의 가풍을 이어받은 것인지 고산의 8대손 종부인 광주이씨는 '규한록(閨恨錄)'이라는 작품을 남겨놓고 있다.
규한록은 광주이씨 부인이 순조 34년 3월 초사일에 탈고한 순 한글로 쓴 작품으로 광주이씨 부인이 잠시 친정집에 가 있을 때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소회를 궁체상서(宮體上書)로 쓴 것으로 두루마리처럼 말려져 있는 것을 펼치면 약 13m에 이른다.
조선시대 궁궐이나 사대부집의 부인들이 쓴 규방(안방)문학 중 궁중의 이야기를 기록한 <한중록>이나 <계축일기> 등이 남아 있다. 이들 작품에 비해 거의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후기 우리 한글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해남윤씨의 쇠락
그런데 이 규한록이 쓰여 지게 된 배경을 보면 조선후기 해남윤씨가의 쇠락해가는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달이 차면 기울 듯이 한 나라도 흥망성쇠가 되풀이 된다. 한 가문의 흥망성쇠 또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조선왕조의 기운이 서서히 기울어 가듯 18세기 후반을 넘어 19세기에 접어들면 녹우당 해남윤씨 가문 또한 그 기운이 급격히 쇠락해 간다.
해남윤씨가 관련 기록을 보면 윤덕희의 아들인 윤종(尹悰, 1705~1757)에서부터 윤지정(持貞, 1731~1756), 윤종경(鐘慶, 1769~1810)에 이르는 동안 이들의 행적이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가장 우선적으로 이들이 관직으로의 진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집안의 종통이 잘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동안 종가의 장손이 없을 경우 가까운 일가의 형제 중에서 입양을 통해 비교적 쉽게 대를 잇곤 하였으나 윤종 대부터는 계속되어 손이 잘 이어지지 않아 종가가 그 힘을 점점 잃어간다.
이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공재 윤두서의 손자인 윤종은 연안이씨 부인으로부터 아들을 하나 겨우 얻었다. 그런데 아들인 윤지정은 자식이 없자 작은 아버지 윤탁의 아들 규상의 첫째인 종경을 입양하여 대를 잇게 한다. 하지만 종경 또한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3번째 부인인 양천허씨로부터 아들을 하나 겨우 얻는데 이가 곧 광호(光浩)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광호는 결혼하여 신행길의 처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죽고 만다. 모두 단명을 하거나 종손을 제대로 잇지 못해 거의 절손의 지경에 이른 때가 이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그동안 잘 지켜온 재산도 이로 인해 일순간에 다 흩어져 버릴 상황에 처하게 된다.
광호는 이웃 고을인 강진 병마절도사(강진에 병영이 설치되었다)의 재산을 탐낸 매질로 인해 그 후유증에 죽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를 놓고 보면 몇 대에 걸쳐 관직(벼슬)에 진출하지 못하고 대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게 됨에 따라 이 당시의 해남윤씨가는 매우 쇠락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주변의 세도가들이 토지를 비롯 해남윤씨가의 재산을 탐내려 침탈을 시도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신행도 하기 전에 남편과 사별한 기구한 여인
이러한 상황에서 해남윤씨가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 나타나는데 이가 곧 종부 광주이씨다. 광주이씨는 전남 보성(대곡)에 살고 있었으며 녹우당 해남윤씨가와 혼약이 맺어지자 광호와 결혼을 하게 되나 광호가 일찍 죽자 남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댁에 와서 평생을 홀로 살아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광주이씨는 세종대에서 연산군대에 걸쳐 권신이던 광원군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의 후손으로 이씨부인은 광원군 이래 세거해 오던 전남 보성군 대곡에서 출생하여 자라왔다.
재행 길은 처가에 여유 있게 머무는 것이 보통이지만 광호는 종손이었던 까닭에 제사 삼례 차 하루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후 병석에 누워 며칠 만에 별세하니 광주이씨 부인은 신행도 하기 전에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신행기간은 50여일 정도였다고 하는데 광호와 광주이씨 부인이 함께 있었던 기간은 혼례 때의 2일과 재행(再行)길의 1일을 합해 3일간에 불과했다.
남편의 부음을 받고 달려온 광주 이씨부인은 기구한 자신의 운명 앞에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교적 사회윤리가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효부로서의 가장 모범적인 모습이었지만 광주이씨 부인은 이를 떠나서라도 당장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광주이씨는 기구한 자신의 운명 앞에서 절식을 하려 했지만 후손이 끊길 것을 염려한 시어머니와 숙부들의 강한 만류로 죽음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광주이씨 부인은 이렇게 하여 남편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시가에 들어가 종가의 살림을 맡아 43년간의 파란 많은 일생을 살게 된다.
고려사회의 비교적 평등한 남녀관계에 비해 조선사회의 여성들이 유교 윤리 속에서 얼마나 억압받고 살아야 했는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종부의 막중한 책임은 광주이씨의 생을 너무도 힘들게 했는데, 17세에 결혼하여 신행 전에 홀로된 광주이씨 부인이 자신의 그 한스런 삶을 '규한록'을 통해 수필형식으로 써내려 간 것이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종부의 생활이 오죽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시어머니, 주변 종친들, 인척들 사이에서 여자의 몸으로 이를 이겨내야 하는 생활의 고단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문중흥의 영부(英婦)인 광주이씨 부인
광주이씨 부인은 자식이 없어 대를 잇기 어렵게 되자 멀리 충남 서천(舒川)에 친히 가서 공재 윤두서의 3째 아들인 덕훈의 5대손을 양자로 데려온다.
광주이씨는 가까운 일가들의 압력 속에서도 멀리 충청도에서 똑똑한 종손을 데려오는데, 이 아들 또한 외아들이라 그저 보내줄 리가 만무 하였다. 이에 사정하고 어르고, 부탁하고 온갖 방법을 다하여 겨우 아이를 데려온다. 하지만 아이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내고 녹우당 종가로 직접 찾아오기도 하고 여러 가지 요구를 하여 이 때문에 빚을 지게 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요구들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답답한 심정을 규한록 작품 속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광주이씨 부인은 명문사대부가의 규범과 예의범절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순종적이고 연약한 여인상과는 달리 대쪽같은 성격에 남자 못지않은 대담성과 용단, 그리고 비상한 기억력과 슬기가 있는 여인이었다.
따라서 근친들의 간섭과 시숙부들의 섭종(攝宗)도 그것이 정당치 않을 때는 용납지 않았다. 스스로 강인함을 키우지 않고서는 종가의 대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광주이씨 부인은 침체해 가던 해남윤씨가를 다시 일으키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양자로 데려온 주흥은 나중에 3남4녀를 낳고 선공감(繕工監)의 감역(監役)이 되는 등 해남윤씨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해남윤씨가에서는 광주이씨 부인을 '한실'할머니라고도 부르는데, 이 같은 업적 때문에 '가문중흥의 영부(英婦)'로 추앙받고 있다.
광주이씨 무덤은 현재 녹우당 뒷편 입향조인 어초은 묘역 아래에 남편 광호와 함께 묻혀 있다. 비석이 없어 여인에 대한 유교사회의 차별로도 느끼게 하지만 녹우당 입향조인 어초은 윤효정의 묘역에 함께 있다는 것이 해남윤씨가를 다시 일으킨 그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