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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평도 곳곳에는 이처럼 버려진 폐쓰레기로 가득하다.
ⓒ 오마이뉴스 공희정

지난 6월 30일 오후 5시경.

그날 오후 1시 연안부두에서 출발한 실버스타호가 연평도 당섬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 여객선에는 각 언론사에서 파견한 약 50명의 기자가 타고 있었다.

사건 발생 하루가 지나서야 기자들이 현지에 도착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연평도에 들어가는 배는 월, 수, 금, 일요일에만 있다. 공교롭게도 서해교전이 발발한 6월 29일은 토요일이었다.

연평도의 총 면적은 대연평도와 소연평도까지 합해도 약 7㎢. 여의도(8.5㎢)보다 조금 작은 섬이다. 그나마 3분의 2는 군사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전면 통제된다. 그후 들어온 기자까지 포함할 경우 기자 수는 연인원 100여 명에 육박한다. 그 많은 기자가 일주일 동안 이 좁은 섬을 휩쓸고 다닌 셈인데, '기자 반 주민 반'이라는 우스개소리는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교전 당시 현장목격 어민의 증언 / 김정훈 기자

'기자 반 주민 반'이라는 말은 연평도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연평도가 해방 직전 조기 황금 파시로 황해 어업의 메카였던 당시 연평도 앞바다는 '물 반 조기 반'이었다고 한다. '기자 반 주민 반'이라는 말은 바로 거기서 연유한 것이다.

한편 6월 30일 저녁 숙소를 정한 기자들은 곧바로 밖으로 쏟아져나와 주민들과 접촉하는 등 본격적인 취재에 돌입했다.

그런데 '맨 땅에 헤딩하기' 식으로 무작위적으로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 달리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들을 것인지를 데스크로부터 미리 통보받고 온 언론사 기자들도 있었다. 물론 그 언론사는 MBC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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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르포 기사에서 자세히 밝혔듯이,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그보다 꼭 하루 전인 6월 29일 오후 5시경. 서해교전 당시 근방에서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어민들의 증언을 듣는 한편 당섬 선착장에 실려온 전사자의 시신과 부상병을 지켜본 연평도 주민 신남석씨(연평면 재향군인회장)가 MBC 보도국에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은 요지의 제보를 한 것이다.

"서해교전이 발발하던 당시 현장에서는 어선들이 '월선조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 해군 경비정은 그 어선들을 통제하던 중 북한 경비정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월선조업 행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우리 어민들이 서해교전 발발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전화를 했다."

신남석씨는 전화를 받은 사람이 최아무개 차장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최아무개 차장'은 최문순 취재부 차장. 보도국에 복귀하기 전까지 언론노조위원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그 전화가 걸려온 직후에도 연평도 어민이라고 신분을 밝힌 사람 몇 명으로부터 비슷한 내용의 제보 전화를 더 받았다고 한다.

물론 신남석씨는 MBC에 전화를 하기 직전에 KBS 보도국에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KBS는 그의 제보를 묵살했다.

국방부 최초 발표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제보 받은 MBC는 연평도 현지로 달려가는 기자들에게 이 사실을 주지시켰다. 제보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이 연평도 주민인지 확인하는 한편 제보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취재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6월 30일 저녁과 7월 1일 이틀 동안에 걸쳐 현지에서 제보자들을 만난 MBC 기자들은 취재 결과 제보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러한 증언은 제보자가 아닌 다른 주민들에게서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연평도 현지에선 '월선조업'이 그렇게 새삼스런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오마이뉴스> 특별취재팀이 현지에서 만난 주민들과 기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6월 30일과 7월 1일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주민들은 "문제의 핵심은 꽃게"라고 기자들에게 증언한 것으로 확인됐다.

MBC가 다음과 같은 제목의 뉴스를 7월 1일 밤부터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배경이 전제돼 있었던 것이다.

●<어민들 반성 '꽃게 때문에'> <어선 통제 안됐다> <국방부 발표 목격담과 다르다>(이상 7월 1일) <어민들 사전 담합> <조업 중 총격전> <해군도 손 못썼다> <꽃게 어장 노다지>(이상 7월 2일) <조업구역 이탈> <교전 직전 급증> <가구 당 빚 수 억원>(이상 7월 3일).

물론 MBC는 그러한 뉴스를 보도하는 한편 북한의 선제공격을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들을 내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설사 '월선조업' 사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북한이 선제공격을 한 것은 잘못됐다는 주장의 기사였다.

●<서해교전 '생생하게 증언'> <서해 5도는 한반도 화약고> <연평도 내일 조업재개>(이상 7월 1일) <재도발하면 응징> <즉각 경고사격> <대북특사 재검토> <정치권 진상조사>(이상 7월 2일) <계획적 도발> <재발 땐 강력 응징>(7월 3일)

그러나 MBC의 '월선조업' 보도는 그 다음날부터 연평도 현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 연평도 전망대에서 바라본 옹진반도. 사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땅은 연평도의 일부이며 그 건너편에 보이는 땅이 북한 옹진반도. 또한 그 사이에 떠 있는 두 개의 섬도 북한땅이다. 즉 그 두개의 섬과 연평도 사이의 그 좁은 바다에 NLL이 존재한다.
ⓒ 오마이뉴스 공희정

먼저 기자들의 반응. 당시 현장 분위기를 지켜본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7월 2일 낮 MBC 기자들을 제외한 수십 명의 다른 언론사 기자들이 포구 광장에 모였다고 한다. 그들은 "MBC는 저렇게 보도했는데, 우리는 여기까지 와서 이게 뭐냐?"라는 등의 발언을 토해내며 매우 불쾌한 심사를 드러냈다고 한다.

다음 주민들의 반응. MBC 보도가 나가자 주민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월선조업' 사실을 제보했던 '비주류'쪽 어민들을 제외한 '주류'쪽 어민들이 '월선조업'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업구역을 벗어난 적은 솔직히 있었다. 그러나 '월선'이라는 말이 마치 NLL을 넘은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크다"고 해명하는 일부 '중도' 성향의 어민들도 있었다.

그날부터 당장 MBC는 어민들의 원성과 비난의 집중포화를 맞아야 했고, 취재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당신들 MBC 기자요?"

<오마이뉴스> 특별취재팀이 7월 3일 현지에 도착한 뒤 식당에 들를 때마다 들었던 말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매우 격앙돼 있었다. 일부 기자들은 "MBC 기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한 뒤 취재 협조를 부탁하면 잘 대해 준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사실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7월 3일부터 다른 방송사에서 MBC 보도를 반박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보도에는 KBS가 보다 적극적이었다. 어민회 부회장 C씨 등 화면에 등장한 취재원이 대부분 '주류'쪽 어민들로 제한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조업과 상관 없다>(이상 7월 3일) <도발 빌미 없었다> <어민 책임 반발>(이상 7월 4일).

물론 SBS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서해교전 당시 어선 한계선 넘지 않아>(7월 4일).

MBC 보도가 즉각적인 파장을 불러온 데는 우연적 요소도 작용했다. 연평도의 지리적 위치와 언론 환경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연평도에서는 신문을 찾아보기 어렵다. 관공서와 어촌계 사무실 등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일부 구독할 뿐 일반 가정이나 식당에서 신문을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여객선이 오니 '신문(新聞)'이 아니라 '구문(舊聞)'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연평도에서는 신문 보도가 여론 형성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 대신에 연평도의 방송과 인터넷 설치 현황은 웬만한 육지의 도시보다 낫다. 거의 모든 집에 위성방송 접시 안테나가 설치돼 있으며, 인터넷도 150∼160개 선 이상이나 깔려 있다.

그러다 보니 방송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고, MBC 보도는 곧바로 주민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다는 '죄 아닌 죄'로 MBC는 일부 연평도 어민들로부터 '횡포나 일삼는 언론'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특종을 빼앗겨 감정이 상해버린 다른 언론사들의 질시와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왕따'를 당했으며, 한 정당의 지도자들로부터는 '사상이 의심스런 언론'으로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

결국 '언론의 진실 보도'와 '국민의 알권리'는 북한과의 대치 상황이라는 덫에 걸려버린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진실에 부합한다고 해도 아예 귀담아 듣지 않으려는 데야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신남석 씨를 비롯한 연평도의 일부 '비주류'쪽 주민들이 현지 주민들이 피해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방송사에 제보한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많은 독자들이 여기에 궁금증을 표시해왔다.

▲ MBC 보도국에 서해교전과 관련해 첫 제보를 한 신남석씨
ⓒ 오마이뉴스 공희정
그래서 우리는 현장중계 당시 그와의 인터뷰 내용 중 주제와 관련이 없다고 판단해 제외했던 부분을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당시 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자 이런 말을 했다. 다소 길긴 하지만 그대로 소개하기로 한다.

"연평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제일 심각한 것은 환경문제다. 꽃게잡이가 끝나면 연평도에서는 폐그물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다. 원래는 육지로 옮겨서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 비용을 줄이기 위해 그냥 바다에 버리거나 섬에서 불법으로 태워 버린다. 적발 돼서 걸리면 5백만원의 벌금을 내야 하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매립지도 주민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바람에 오염된 지 오래 됐다. 10∼20년 전만 해도 많이 나오던 망둥이는 '눈탱이'가 돌아가 버렸고, 바지락과 굴도 사라졌다. 매립지에서 흘러나온 침출수 때문이다. 폐자동차는 물론이고 건축폐기물도 아무 곳에나 버린다. 지하수 관정도 수없이 뚫어놓고 폐공 처리를 하지 않는다.

연평도는 이제 청정해역이 아니다. 그러나 행정관청의 공무원들조차 개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단속반도 전혀 가동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식으로 몇 년만 간다면 연평도는 죽은 섬이 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연평도의 기득권 세력과 행정관청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서해교전 당시에도 가장 멀리 나가서 '월선조업'을 한 것은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사람이 선주로 있는 배였다. 월선조업을 통해 누구는 이득을 보고, 누구는 손해를 본다면 이것은 시정돼야 마땅하다.

서해교전은 이렇게 죽어가는 연평도의 비극적 운명을 마지막으로 경고한 사건이었다. 연평도를 살리기 위해서는 설사 맞아죽더라도 누군가 진실을 외부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우리가 신남석씨를 만나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7월 3일 배를 타고 들어오면서 한 주민으로부터 그를 꼭 만나보라는 귀띔을 받았다. 어렵사리 연락처를 구한 뒤 그를 만나기 위해 연평리에서 조금 떨어진 새마을에 있는 카센터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인상적인 체험을 했다.

취재팀은 카센터 앞에서 약 10분 정도 그를 기다렸는데, 마당에 <아사히신문> 기자의 명함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며 넌지시 "왜 명함을 버렸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아사히신문>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월선조업' 문제를 자세히 듣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냉정하게 취재를 거부했다. 연평도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 문제를 외국 기자에게 그것도 일본 기자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문제는 우리끼리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MBC 보도가 나간 뒤 KBS 기자가 나에게 급히 연락을 했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취재 요청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국민들의 제보도 제대로 받지 않는 언론사에 해줄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취재낙수 하나.

이번 '연평도 언론교전' 과정에서 오발탄(?)을 맞은 사람도 있다. 외지에서 들어와 선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아무개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복잡한 세상일이 다 싫어 처자식까지 다 버리고 '무책임하게' 이곳으로 들어왔다. 가족들이 찾을 수 없도록 제주도로 들어갔다가 재빨리 이곳 연평도로 숨어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서해교전으로 연평도에 들어온 방송사의 TV 화면에 그가 일하는 장면이 잡히면서 '행복한 도피'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의 모습을 알아본 부인이 전화를 걸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연평도로 찾아오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취재팀에게 손사래를 치면서 그가 걸쭉한 육두문자를 토해냈다.

"아 찍지 말라니까. TV에 얼굴 나가는 바람에 나 ×돼 버린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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