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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박해 있는 어선들로 꽉찬 연평도 포구.
ⓒ 오마이뉴스 공희정

달콤한 휴식은 끝났다.

<오마이뉴스> 특별취재팀은 4박5일간의 연평도 취재를 마치고 7월 7일 오후 5시경 인천 연안부두에 도착했다. 그리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이틀 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 연평도에서 낮에는 취재하고, 밤에는 기사를 쓰는 강행군에 모두 지쳐버렸던 것이다. 특히 현장에서 선주협회 공식문서를 입수하는 등 맹활약을 했던 공희정 기자는 마지막 날 심한 배탈로 홍역을 치러야 했다.

특별취재팀은 오늘(7월 10일)부터 독자에게 약속한 대로 몇 차례에 걸쳐 취재후기를 싣는다. 시간에 쫓기며 미처 보도하지 못했던 4박5일 동안의 기록을 생각나는 대로 소개해 나가겠다. 아울러 <디지털 미동>이 현장에서 담아낸 600분 분량의 생생한 동영상도 편집이 끝나는 대로 독자에게 소개할 것이다. 이 동영상은 현지에서 장비가 갑작스럽게 고장나는 바람에 아깝게 중계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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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기 제1신은 연평도의 역사와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다.

사실 이번에 1백명에 육박하는 기자들이 연평도를 점령(?)한 채 엄청나게 많은 기사를 쏟아냈지만, 정작 연평도 사람들의 시각에서 다룬 기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다수 기사가 '육지', 특히 그 중에서도 '서울'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수십 명의 기자들이 들쑤셔놓고 빠져나간 연평도엔 연평도 사람들만 남아 있다. 섬 사람들의 생존터에 와서 서울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전쟁'을 한바탕 치른 뒤 유유히 사라진 기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들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솔직히 서울에서 사는 대다수 사람들에겐 '서해교전'만 있었을 뿐 '연평도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안중에 없었던 것이 사실 아닐까.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할 여유가 우리에게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곧 연평도를 잊어버릴 것이다. 또다시 서해교전 같은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아무도 연평도를 기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연평도 사람들에겐 '서해교전'이 그렇게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NLL도, 적색선도, 조업구역 한계선 등 '물위의 보이지 않는 선'은 그들에겐 모두 허깨비일 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꽃게일 수밖에 없다. 그건 다른 국민들이 자신의 생존권을 유지하는 일터가 제일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여기에 서울과 연평도의 넘을 수 없는 넓다란 심리적 간극이 있다.

이 기사는 바로 그 간극을 좁혀보자는 차원에서 쓰여졌다. 연평도의 역사와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관한 기록인 이 기사는 어쩌면 서울의 정치인, 언론인, 회사원, 대학생 등에겐 너무나 하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삶에 애정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 한 아무리 대안을 논한들 공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연평도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서울에서 달려온 기자들과의 낯선 만남에서 받았던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 바다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닻그물에 걸려 버둥거리는 꽃게처럼, 그들은 분단이 만든 바다의 철조망에 걸려 허우적거릴지도 모른다.

(1)상고사(上古史)-연평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나?

▲ 군마방목지
고려시대엔 '남중목장', 조선시대엔 '국마방목지'로 활용되었다. 1940년대까지 말이 있었으나 주민들이 잡아먹으면서 사라졌다.
ⓒ 연평도
"수많은 패총 '살기 좋았던 곳' 입증/곡옥(曲玉) 같은 돌 장신구 귀중한 수확/전통적인 고기잡이 '닻배' 아직도 남아".

<서울신문>(현재의 <대한매일>) 1982년 2월 11일자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그해 '서해5도 학술조사단(단장 서울대 김원용 교수)'이 실시한 학술조사 결과를 보도한 기사였다. 이 학술조사는 <서울신문>이 주최하고, 서울대가 주관하고, 현대건설이 후원했다.

이 학술조사로 연평도에 사람이 언제부터 살기 시작했는지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학술조사단은 패총(貝塚) 16개 소와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빗살무늬 토기 120여 점을 수습했는데, 마치 곡옥과 흡사한 까만 점판암을 석재로 하여 만든 장신구도 발견했다. 학술조사단은 이로써 약 3∼4천년 전부터 연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신문> 기사에는 연평도의 어구(漁具)와 관련된 흥미로운 대목이 나와 눈길을 끌기도 했다. "우리나라 전통 어획수단의 하나인 닻배가 연평도에서는 지금(1982년-기자주)까지도 이용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닻배는 닻 2개를 어장 양쪽에 세우고 그 사이에 그물을 달아매어 두었다가 밀물에 흘러 들어간 고기를 썰물 때 걸려들도록 고안한 장치로 3월 초에서 6월 말까지 42척의 배가 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배 1척의 길이 200m, 너비 230cm의 그물 4∼5틀을 한꺼번에 싣는 것이 통례다."

이 '닻배'를 이용한 조업방식은 현재 연평도의 주업인 꽃게잡이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보다 한창 앞선 1968년에 임효재 서울대 교수가 이끄는 1차 조사단이 연평도를 다녀간 바 있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있었다. 1968년은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농수산부 등 4명의 장관이 남쪽으로 이동된 '어로저지선(漁撈沮止線)'을 고시함으로써 연평도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당시 실시된 학술조사가 어떤 목적 하에 실시됐는지가 주목된다.

한편 연평도에 원주민이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연평도는 주로 나라의 말이나 소 등 가축을 사육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고려시대엔 소와 말을 방축하는 '남중목장'으로, 조선시대엔 국마(國馬)를 사육하는 '국마방축장'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연평도에는 영주자는 없었으며, 주로 피난민, 범죄자, 빈곤자 등이 각자의 사정에 따라 일시적으로 거주했을 뿐이라고 한다.

취재팀이 현지에서 입수한 향토지 <연평도>에 따르면, 연평도에 본격적인 영주자가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 인조 재위 2년인 1624년이다. 당시 이괄의 난이 평정되던 무렵 정부군에 쫓기던 무리들이 이 섬에 들어온 것이 영주성을 띈 첫 주민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시점을 전후로 해서 들어온 사람들이 바로 지씨(池氏)와 채씨(蔡氏)였는데, 이들이 최초의 연평도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별도의 경로를 통해 섬에 들어와서 한참 동안 떨어져 살았는데, 어느 날 우연히 만나 마을을 이룬 것이 현재 연평리 부락의 시초가 되었다. 그들의 무덤은 지금도 소서구지와 매드라까리에 남아 있다.

그러나 연평도 원주민의 시조(始祖)인 그들의 후손은 현재 섬에 없다. 그후 모두 뭍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온양 방씨, 김해 김씨, 전주 이씨, 밀양 박씨, 결성 장씨, 해주 최씨, 백천 유씨 등이 연평도의 새로운 주인이 됐다.

1965년 현지 주민 대표로 4명의 장관이 주관한 '월선어업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전 어협 조합장 이태현씨(별세)도 전주 이씨의 후손이다.

(2)중고사(中古史)-연평도에서 조기는 언제부터 발견됐나?

▲ '황금시대'의 연평도
연평교회 청년회원과 여전도회원까지 조기를 말려 굴비를 만들어 판매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사람들 앞쪽에 널려 있는 것이 바로 조기다.
ⓒ 연평교회 50년사
연평도의 역사는 곧 조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기의 발견'은 연평도 역사의 BC와 AD를 나누는 기원(紀元)과도 같다.

실제로 취재팀은 연평도 곳곳에서 조기와 관련된 공간이나 전설 등 수많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연평도 사람 누구에게서나 조기와 관련된 이야기 한두 개쯤은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연평도의 중고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로 이 시기에 연평도의 상징인 조기가 발견된 것이다.

향토지 <연평도>와 나이 많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연평도에서 조기가 처음 발견된 것은 1634년 5월 27일(음력) 임경업 장군에 의해서였다. <연평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의주부윤이었던 임경업 장군이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출하기 위해 마포나루에서 출발해 중국으로 가던 중 연평도에 정박한 것이 인연이 됐다고 한다.

실제로 이곳 연평도에는 임경업 장군과 관련된 유적과 설화가 수없이 널려 있다. 주민들이 임경업 장군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세웠다는 사당인 충민사, 조기를 처음 발견한 장소로 알려진 안목이 대표적이다. 연평면에서 관광객을 위해 만든 소책자에는 안목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임경업 장군이 가시나무를 찍어 간조 시 이곳에 꽂게 하여 수많은 조기가 가시나무의 가시마다 걸렸다고 하며, 이것이 연평도 조기잡이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연평도의 민속놀이나 민요에도 임경업 장군의 체취는 남아 있다. 매년 음력 12월 26일이면 열리는 '뱃치기' 때 어민들이 들었던 장군기(將軍旗)와 매년 3월이면 열리는 풍어제(豊漁祭)도 모두 임경업 장군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다음은 경기민요의 한 대목이다.

닻 둘러메고 어야어야디야.
닻 둘러메고 연평섬으로 들어가잔다.
어야디야 닻 둘러메고
임 장군 앞에 술 한 잔 부어놓고
춤이나 추어 노잔다
어허허

(경기민요)

그러나 조선시대 말기까지만 해도 연평도 사람들은 소외와 억압의 삶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다. 당시 주민들은 농사지은 곡식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명목으로, 어장에서 잡은 고기는 임금에게 진상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조선 왕조의 관리들에게 모두 빼앗겼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 왕조의 학정에 시달리며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던 연평도 사람들의 처지를 상징하는 바위와 설화가 있다. 안목에 있는 '진상바위'와 지금도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지고 있는 '홍어설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와 관련 향토지 <연평도>에 기록된 설화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홍어를 업고 온다.' 그 당시 얼마나 고기가 귀했고 또 먹고 싶었던가를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즉 수확한 홍어는 잡는 곳에서 모두 진상해야 하는 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홍어를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옷을 벗고 홍어를 잔등에 업고는 다시 옷을 입은 후 도둑질하듯 집에 가져왔다는 데서 이런 말이 유래되었다."

이렇게 암울하기만 했던 연평도 사람들의 삶은 일제시대, 해방과 분단,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3)근대사-연평도의 '황금시대'를 아십니까?

▲ 일본, 대만과 전국 각지에서 총출동한 조기잡이 어선들로 붐비던 '황금시대'
이 사진은 사진 원본 중 왼쪽 절반만 보여준 것이다. 오른쪽에는 500미터 떨어진 당섬까지 어선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 연평도
한국현대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불행 중 다행으로 연평도 사람들은 해방 전 잠시 동안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 연평도 사람이라면 어찌 그 화려했던 시절을 차마 잊을 수 있으랴. 그들은 그 시절을 '황금의 파시'라는 말로 기억하고 있다.

매년 봄 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인 4월 하순이 되면 전국의 어선들이 연평도로 몰려오면서 황금의 계절은 시작된다. 향토지 <연평도>의 기록자들도 이 대목에 이르러선 펜 끝이 격정과 환희에 넘쳐 흔들리는 듯하다. 그들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해방 전 왜정시대는 그야말로 황금의 파시였다. 상업을 목적으로 한 많은 왜인이 몰려왔고 멀리 대만과 평안도, 전라도, 경상도 등 각처에서 수천 척의 어선이 대거 출동하여 연평 앞바다를 메웠으며 저잣거리가 형성되고 술집, 잡상인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대도시를 방불케 하였다. 2척의 연락선(등정환, 만리환)이 매일 운행할 정도로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했으며, 그 당시의 어획고는 천문학적 수치로 연평어업협동조합의 일일 출납고가 한국은행의 출납보다 그 액수가 높았다고 하며, 노래에도 '돈 실러 가세, 돈 실러 가세, 황금바다 연평 바다로 돈 실러 가세'라는 가사가 말해주듯이, 천혜의 연평도요 복 받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일본과 대만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연평도로 몰려든 어선이 3천여 척에 이르렀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된다. '조기를 쫓는 어부, 어부를 쫓는 색시'라는 말도 바로 이 때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어선들은 왜 연평도로 몰려든 것일까.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연평도는 조기가 산란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중국 연안의 따뜻한 바다에서 월동한 조기 떼가 3월 경이 되면 이동을 시작,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4월 하순경 연평 앞바다에 도달해 산란을 한다.

둘째, 연평도는 수천 척의 어선을 한꺼번에 끌어안을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연평도 포구 앞에는 완만한 갯벌이 형성돼 있었던 데다 소연평도, 책도, 당도 등이 그 포구를 둥그렇게 감싸고 있었다.

셋째, 연평도는 바람이 잘 부는 곳으로 유명했다. 당시만 해도 모든 어선이 바람을 이용해 항해하는 범선(帆船)이었다. 그러므로 바람은 조기 어장 형성에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연평도는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평바다에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얼싸 좋네…"라는 <군밤타령>의 첫 소절에서 알 수 있듯이 '바람의 섬'이었던 것이다.

풍북한 어족, 포구, 바람의 세 요소를 두루 갖춘 연평도는 조기 어장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노인들은 그 당시를 말할 때면 신명이 난다.

"상상해 보라구. 일본과 대만은 물론이고 전국 8도에서 몰려든 수천 척의 어선들이 흑산도에서부터 조기 떼를 따라 북상해오는 그 장관을!"

그리고 연평도에는 축복의 노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북녁의 수산광산 금노다지요
옹진의 남쪽 평야 오곡창고라
연평도 조깃배는 금실은 배라
대청도 고깃배는 은실은 배라

(옹진의 노래)

그러나 연평도의 황금시대는 해방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해방은 곧바로 분단을 가져왔고, 분단은 다시 전쟁을 가져왔고, 그 전쟁은 또다시 철옹성 같은 분단과 대결의 시대를 가져왔다. '물위의 보이지 않는 선'은 연평도의 신명을 끊어 버렸다. 일본, 함경도, 평안도의 어선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고, 굴비의 주요한 소비처였던 북한 시장이 단절되면서 경제적 타격이 막심했던 것이다. 연평도의 화려했던 황금시대의 영광은 그렇게 사라졌다. 특히 6.25 전쟁은 연평도 황금시대를 망쳐버린 결정타가 되었다.

그 이후의 상황, 즉 연평도의 현대사는 '연평도 현장중계' 제11신에 자세히 기록한 바와 같다.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외세의 동북아 전략과 이념적 대결의 구도 하에 갈라진 나라, 과거 남한과 북한의 독재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 강화시켜 온 '적대적 의존관계'. 그렇게 민족이 갈갈이 찢긴 채 원수처럼 으르렁거려야만 자신들의 알량한 기득권이나마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한 정치인과 언론인들, 그러한 거대한 구도와 의도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 채 그들이 조장하는 대결구도에 흥분하는 국민들이 있는 한 연평도 사람들의 평화로운 꽃게잡이는 요원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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