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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도쿄는 많은 점에서 비슷하지만, 또 다른 점도 많습니다. 넓은 강을 낀 내륙의 서울과, 바다를 마주한 도쿄의 도시 구조는 특히 차이가 크죠.

서울에는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각각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대통령실은 지난 정부까지 종로에, 국회는 여의도에, 대법원은 강남에 있죠. 서울의 3대 도심권에 각각 하나씩 위치한 형태입니다. 행정 각부는 아예 서울을 떠나 세종시로 이전한 경우도 많고요.

반면 도쿄는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가까이 있습니다. 의원내각제 국가라는 정치체제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국회도, 최고재판소도, 총리 관저도 모두 도쿄의 중심인 치요다구에 있습니다. 경시청을 비롯한 여러 관청도 모두 근처에 있죠.
 
황거에서 본 국회의사당
 황거에서 본 국회의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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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치요다구의 중심부에는, 넓은 녹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곳이 일본의 덴노가 거주하는 황거입니다. 높은 빌딩이 늘어선 도쿄의 최중심부에 펼쳐진 넓은 공원은 어쩐지 이질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서울은 어떨까요? 도심 중앙에 이렇게까지 '비워진' 땅이라면, 용산의 옛 미군기지 자리를 제외하면 잘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마침 황거와 용산 미군기지는 각각 면적이 2.3㎢와 2.5㎢로 서로 비슷하기도 합니다. 미군기지가 이전하기 전에는, 황거와 미군기지의 비슷한 입지가 두 나라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농담도 종종 했었습니다.
 
황거에서 본 도심
 황거에서 본 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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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중심인 황거는 원래 에도성이 있던 곳입니다. 1457년 오타 도칸이 처음 성을 쌓았고, 1590년부터 도쿠가와 가문의 성이 되었죠. 이후 에도 막부 시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에도 막부는 1868년 메이지 신정부에 항복했습니다.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항복 이후 에도성을 떠났죠. 그는 시즈오카의 슨푸성으로 가 근신했습니다.

도쿄로 수도를 옮긴 메이지 덴노는 에도성에 자리를 잡았고, 이곳에 황궁을 건설했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황궁에서 그 다음 덴노들이 태어나고 즉위했죠. 다이쇼, 쇼와, 아키히토와 지금의 나루히토 덴노까지 모두 그랬습니다.

물론 많이들 아시다시피, 이 궁궐에 살고 있는 덴노는 일본 정치의 중심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사실 현대에 들어와서의 일만은 아니죠. 덴노는 오랜 기간 일본 사회의 상징이었지만, 정치적 실권을 행사한 역사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일본 역시 고대에는 덴노가 실권을 쥐고 정치에 참여한 때가 있기도 합니다. 일본 덴노의 가문이 한 번도 단절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 설이 있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이것을 신빙성 있게 보지 않습니다. 4-6세기경에 왕조의 교체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죠. 그만큼 당시에는 덴노가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황거의 차실
 황거의 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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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뒤로 덴노는 실권을 잃어버렸습니다. 후지와라 가문을 비롯한 외척 세력이 섭정이 되어 정치를 하기도 했고, 덴노에서 퇴위한 상황이 정치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덴노 본인은 정치에 관여하지 못했죠.

12세기 말엽부터는 무가 정권이 수립되었죠. 덴노의 권위는 점점 막부를 이끄는 쇼군에게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에도 시대에 넘어오면 덴노의 힘은 더 약해집니다. 일반 민중 가운데에는 아예 덴노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덴노와 쇼군이라는 두 개의 권력이 존재하는 상황은 여전히 모순적이었습니다. 특히 막부 말기에는 고메이 덴노가 정치 현안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죠. 이것은 막부의 정통성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막부는 덴노에게 정권을 돌려준다는 '대정봉환'을 선언하며 멸망했습니다.
 
에도 성터
 에도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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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모순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일본 정치를 내내 괴롭혔습니다. 덴노는 가장 위에 군림하는 존재이지만, 그 어떤 의사결정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2차대전에 참전하고, 태평양 전쟁에 뛰어드는 과정에서도 그랬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런 점을 들어 일본 사회가 '무책임이 체계화된' 사회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권위와 권력은 있지만, 결코 책임지지 않는 이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죠.

현대 일본에서도 덴노의 위치는 논쟁적입니다. 일본의 극우파는 덴노의 권위와 상징성을 여전히 중시합니다. 하지만 정작 덴노는 그런 목소리와 거리를 두며, 평화와 국제질서의 유지를 지지해 왔습니다. 아베 정부 시절에는 아키히토 덴노의 발언이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경우도 수 차례 있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원래 덴노에 충성한 충신들을 위해 만든 사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2차대전 전범들이 합사되자 쇼와 덴노는 상당한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하죠. 결국 이후 쇼와 덴노와 아키히토 덴노는 모두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에는 야마모토 타로 참의원이 한 행사에서 아키히토 덴노에게 직접 편지를 건네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야마모토 의원은 좌우 양측의 비판을 모두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비판의 결은 많이 달랐죠.

보수파는 궁내청을 거치지 않고 덴노에게 직접 편지를 건넨 것이 불경한 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반면 진보파는 정치인이 덴노에게 편지를 건네는 것은 덴노의 정치적 중립을 흔드는 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 간극만큼이나 지금 일본에서 덴노가 가진 위치는 모순적입니다.
 
황거 안의 공원
 황거 안의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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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본국 헌법 1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덴노는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반한다."

분명 덴노의 지위를 일본국의 상징으로, 주권자를 국민으로 규정하는 문구입니다. 하지만 그 구조가 어렵게 꼬여 있죠. 내용이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뚜렷하게 말하는 한국의 헌법과는 분명 다릅니다.

저는 그 모호함이 덴노와 일본국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졌던 덴노의 권위와, 정부의 정치권력 사이 모순은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죠.
 
황거와 도심
 황거와 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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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덴노의 황거는 빽빽한 빌딩숲 속, 도쿄의 중심가에 거대한 녹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개방되어 있는 황거의 동쪽 정원을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이곳이 덴노의 땅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땅이었다면, 지금까지 이 넓은 공원이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물론 덴노는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는 존재입니다. 다른 나라의 왕실과 달리, 일본 황실은 가진 재산이 없습니다. 매년 의회에 예산을 요청해 승인받아 써야 하는 입장이죠.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 의회는 덴노가 요청한 예산을 삭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것 역시 일본국에서 덴노가 가진 위치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도쿄 한복판에 위치한 녹지는 도쿄의 시민들에게도 좋은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오후 아이들과 나들이를 나온 부모도, 황거 주변을 뛰며 운동하는 시민들도, 저처럼 여행을 온 관광객들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일본국에서 덴노가 가진 역할도, 이 녹지가 도쿄에서 갖는 의미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넓은 공원이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공간이 있는 법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일본, #도쿄,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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