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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에서 버스를 타고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기차를 탄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몇 번이나 긴 터널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도쿄는, 이제까지 제가 여행한 도시와는 많은 점에서 달랐습니다. 삿포로에서 시작한 여행은 언제나 눈과 함께였죠. 비가 오는 니가타에도 길가에는 늘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쿄는 달랐습니다. 두껍게 입은 옷이 덥게 느껴질 정도였죠. 도쿄에는 아직 첫눈이 오지 않았습니다. 올 겨울이 유독 따뜻하기도 하지만, 과거에도 도쿄에 눈이 오는 날은 1년에 5일 이하였던 적이 많습니다.

달라진 것이 꼭 날씨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크고 복잡한 도시에 온 것은 오랜만이었습니다. 일본에 온 것도 벌써 20일은 되었고, 다른 나라에서도 도쿄만큼 큰 도시는 찾기 어려웠죠.

도쿄도의 인구는 1,400만 명을 넘습니다. 거대한 간토평야에 위치한 일본 수도권의 전체 인구는 4천만에 가깝습니다. 수도권의 면적은 13,500㎢ 정도이니, 강원도보다 좁은 땅에 거의 한국 인구만큼이 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실상부 일본의 최대 도시이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거대한 도시권 중 하나입니다.
 
신주쿠
 신주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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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는 오랜 기간 일본의 중심지였습니다.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강 하구의 작은 농촌이었지만, 17세기에 접어들며 도쿄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금의 도쿄, 당시 이름으로는 '에도(江戸)'를 정복합니다. 그리고 이 땅을 지배할 영주로 임명된 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전권을 장악합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将軍) 자리에 오르면서 에도를 중심으로 한 정부, 곧 '에도 막부'가 개창합니다.
 
에도 성터
 에도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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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시대 일본은 경제적 발전을 구가했습니다. 전국 시대의 혼란과 전쟁은 이제 끝을 맺었죠. 막부는 이전의 지도자들이 시행했던 행정적 조치를 발전적으로 계승했습니다. 상업과 출판, 예술 등이 과거보다 한층 더 발전할 수 있는 전기를 맞았죠.

지방의 중소 도시가 성장했고, 중심지인 에도는 더 크게 발전했습니다. 에도의 도시 구조도 정비되었죠. 치수와 농업 생산성의 개선이 인구 증가를 견인했습니다. 에도 막부는 이전의 일본에 비해 더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영주들은 1년 주기로 영지와 에도를 오갔습니다. 영주의 본처와 적장자는 반드시 에도에 거주해야 했죠.

18세기 초 일본 인구는 이미 3천만을 넘었고, 에도의 인구도 100만을 넘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대도시도 인구 50~60만 수준이었고, 한양의 인구는 20만 수준이었습니다.
 
긴자
 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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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는 근대에 접어들며 몰락하지만, 에도의 번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몇 차례의 군사적 충돌이 있었지만, 도쿄에서는 큰 전투가 없었습니다.

막부는 예상 외로 순순히 신정부에 정권을 넘겨주었고, 에도성의 문을 열어 피해를 최소화했습니다.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시즈오카로 가 근신했죠.

메이지 신정부는 교토에서 덴노를 위시해 세운 정권이었습니다. 에도성을 차지한 메이지 신정부는 곧 교토에서 에도로 자리를 옮기기 위한 계획에 착수합니다. 에도는 이미 교토를 압도하는 대도시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교토에는 여전히 덴노를 둘러싼 귀족 세력이 힘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러니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정부가 에도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교토와 오사카의 여론을 의식해 천도는 조심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덴노가 에도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죠. 마지막까지 에도로 수도를 옮긴다는 명확한 조서는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쿄는 명실상부한 일본의 수도이지만, 여전히 교토 사람들은 아직 교토가 수도라는 농담 섞인 말을 하기도 하죠. 에도를 '도쿄(東京)'라 개칭한 것도, '서쪽의 수도(西京)'인 교토를 다분히 의식한 이름이었습니다. 
 
도쿄역
 도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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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정부는 도쿄에 자리를 잡았고, 덴노도 원래 쇼군이 살던 에도성에 황궁을 만들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부흥과 산업화의 시대를 도쿄는 정면에서 마주했습니다.

도쿄를 걷다 보면 그 시대의 유적을 조금이나마 마주칠 수 있습니다. 긴자의 오래된 백화점이나 제국 호텔, 다카라즈카 극장 같은 것들이죠.

1914년 문을 연 도쿄역 역시 대표적인 유산입니다. 도쿄역 앞을 걷다 보니 눈앞으로 마차 몇 대가 지나갑니다. 어쩐지 도쿄 역이 만들어진 과거의 한복판에 떨어진 기분입니다.

알고 보니 어느 나라 대사가 덴노로부터 신임장을 받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영국과 일본 같은 군주제 국가는 대사의 신임장을 주는 행사에 이렇게 마차를 동원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요. 도쿄역 앞 빌딩 숲을 헤치고 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봤습니다.

도쿄는 일본의 근대를 가장 선두에서 헤쳐 나온 도시였습니다. 산업의 발전과 서구 문물의 수입에서도 그랬고, 정치적으로도 그랬습니다. 다이쇼 시대의 민주주의 발전도, 그리고 그 파괴와 군국주의로의 폭주도 모두 함께 경험했습니다.
 
도쿄역 앞의 마차
 도쿄역 앞의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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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대가가 따랐습니다. 몇 가지 남아있는 유적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도쿄에는 그 깊은 역사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오래된 건물이 적었습니다. 에도성은 건물 몇을 제외하고는 기단으로만 남았죠. 도쿄역과 같은 랜드마크가 아니라면 근대 유산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에는 과거의 흔적이 남을 여유가 없기 마련이기는 합니다. 게다가 도쿄는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도시구조 대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2차대전 말기의 도쿄 대공습이겠죠. 1945년 3월에 벌어진 미군의 폭격으로 도쿄는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민간인 10만여 명이 사망했고, 대부분 목조로 만들어졌던 도쿄의 건물 가운데 온전한 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죠.

도쿄는 전쟁이 끝난 뒤 그 위에서 다시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과거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진 채로, 다시 세워지고 성장한 도시가 도쿄입니다. 
 
시부야 스크램블
 시부야 스크램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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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시부야의 교차로에는 높은 빌딩을 배경으로 수많은 사람이 오갑니다. 이곳에서는 파괴도 부흥도 모두 옛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일본의 수도, 도쿄를 여행했습니다. 봉건 시대와 근대의 역사, 산업화와 성장까지 모든 것을 안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 뒤에 다가온 어두운 파괴의 시대도, 그 철저한 파괴 위에서 성장한 부흥의 역사도, 도쿄가 함께한 일본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거를 깨끗이 지워낸 도심에는, 북적이는 오후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 역시 훗날에는 이 도시를 상징하는 하나의 지층이 되어 남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일본, #도쿄, #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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