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이나 하정우, 류승룡처럼 여러 편의 천만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도 신작이 개봉하면 첫날 스코어를 확인하면서 크게 긴장한다고 한다. 특히 최근엔 입소문을 통해 서서히 성적이 오르는 영화보다는 초반 스코어가 영화의 흥행성적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검증된 대배우들도 첫날 스코어 앞에서 태연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흥행스코어를 확인하는 긴장된 마음은 영화촬영을 진두지휘했던 감독이 가장 크고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올드보이>로 심사의원대상, 2009년 <박쥐>로 심사위원상, 2022년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수상하며 세계최고권위의 칸 영화제에서만 3회 수상에 빛나는 '거장' 박찬욱 감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박찬욱 감독은 지난 2016년 6월 영화 <아가씨>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에서 "내 영화에 투자해준 분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라며 흥행성적에 대한 부담과 책임감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사실 박찬욱 감독은 데뷔 초기만 하더라도 투자사에 많은 손해를 끼치는 감독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이 서울관객 99명, < 3인조 >가 서울 3만 6000명에 그쳤을 정도로 흥행과는 거리가 먼 감독이었기 때문이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2000년 세 번째 장편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감독이 됐다. 오늘날까지도 박찬욱 감독의 최고 흥행작으로 남아있는 < 공동경비구역 JSA >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서울 관객 기준으로 <쉬리>가 세운 기록을 1년 만에 갈아 치웠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서울 관객 기준으로 <쉬리>가 세운 기록을 1년 만에 갈아 치웠다. ⓒ CJ ENM

 
< 공동경비구역 JSA > 원작소설 쓴 작가

< 공동경비구역 JSA >의 원작자인 박상연 작가는 1996년 한 출판사의 세계문학 겨울호에 장편소설 < DMZ >를 실으면서 데뷔했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사이에 둔 남북의 초소 군인들에게 벌어진 비극을 다룬 소설 < DMZ >는 2000년 박찬욱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서울에서만 251만 관객을 동원한 < 공동경비구역 JSA >는 1년 전 <쉬리>가 세운 244만을 넘어 역대 한국영화 최다관객 기록을 세웠다(2001년 <친구>가 다시 경신).

'< 공동경비구역 JSA >의 원작자'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뒤로 하고 5년이 넘는 긴 공백을 가졌던 박상연 작가는 2007년 영화와 드라마를 한 편씩 선보이며 전문 작가로 데뷔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와 <대장금>의 김영현 작가와 협업한 드라마 <히트>였다. <히트>는 방영 당시 고현정의 출연이 가장 큰 화제였지만 고현정 외에도 하정우와 마동석, 여진구, 서현진, 오연서 등 유명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드라마였다.

<히트> 이후 김영현 작가와 본격적으로 협업을 시작한 박상연 작가는 2009년 62부작의 대작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45%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견인했다. 박상연 작가는 2011년 장훈 감독의 <고지전> 각본을 단독으로 쓰면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다시 김영현 작가와 함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공동 집필, 25%의 높은 시청률을 이끌며 뛰어난 필력을 인정 받았다.

김영현 작가와 박상연 작가는 2015년 <뿌리 깊은 나무>의 세계관을 이어가며 조선의 건국과정을 다룬 <육룡이 나르샤>의 각본을 썼다. <육룡이 나르샤>는 화려한 캐스팅에도 방영 기간 내내 한 번도 시청률 20%를 돌파하지 못하며 시청률이나 화제성에서는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육룡이 나르샤>는 두 작가의 탄탄한 스토리와 한층 발전한 스케일의 액션, 그리고 배우들의 호연이 더해지며 퓨전 사극 마니아들의 호평을 받았다.

김영현-박상연 콤비는 지난 2019년 <미생>과 <나의 아저씨> 등을 만든 김원석 감독이 연출하고 50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아스달 연대기>를 집필했지만 한 번도 시청률 10%를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박상연 작가는 김영현 작가와 함께 <아스달 연대기> 속편의 각본을 썼고 시즌1으로 막을 내리는 듯했던 <아스달 연대기>는 오는 13일 이준기와 신세경이 합류한 시즌2 <아라문의 검>이 tvN을 통해 첫 방송될 예정이다.

최민식의 거절로 탄생한 최고의 흥행배우
 
 <공동경비구역 JSA>의 엔딩장면은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영화 역대 최고의 엔딩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엔딩장면은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영화 역대 최고의 엔딩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 CJ ENM

 
< 공동경비구역 JSA >는 남한군과 북한군이 대치하고 있는 군사분계선 초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워낙 민감한 소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촬영을 마치고도 개봉 가능여부가 불투명했는데 영화개봉 직전 6.15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어렵지 않게 개봉할 수 있었고 흥행에도 큰 도움이 됐다. 다만 박찬욱 감독은 오히려 "남북의 이념대립이 극대화되는 타이밍에 이 영화를 공개하고 싶었다"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박찬욱 감독은 송강호가 연기했던 오경필 역에 최민식을 캐스팅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강제규 감독의 <쉬리>에서 북한군 박무영을 연기했던 최민식은 "겨우 제대했는데 또 입대하냐"는 농담을 건네며 박찬욱 감독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최민식의 고사 덕분에 오경필 역에 낙점된 송강호는 2000년 한 해 동안 <반칙왕>과 < 공동경비구역 JSA >에 연이어 출연하며 2000년대 최고의 흥행배우로 자리잡았다.

'전도연의 영화'에 가까웠던 <내 마음의 풍금>을 제외하면 1990년대 중·후반 영화에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던 이병헌에게도 < 공동경비구역 JSA >는 의미가 큰 작품이다. 이병헌은 < 공동경비구역 JSA >에서 '분단의 반세기, 그 오욕과 고통의 세월을 뛰어 넘어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북한초소로 찾아가는 이수혁 역을 잘 소화하며 영화계에 완전히 자리잡았다. 이병헌은 2004년에도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단편영화 <쓰리, 몬스터-컷>에 출연했다.

영화에서는 오경필이 O사의 초코과자를 맛있게 먹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심지어 오경필은 자신에게 남한귀순을 권하는 이수혁에게 "내 꿈은 말이야. 언젠가 우리 공화국이 남조선보다 훨씬 더 맛있는 과자를 만드는 기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당초 박찬욱 감독은 H사의 땅콩과자를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썼는데 각색에 참여한 탈북자 출신 정성산 감독이 '반드시' 초코과자로 해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O사의 초코과자가 최종 낙점됐다.

< 공동경비구역 JSA >는 남북병사 4명이 경비를 서는 외국인 관광객이 찍은 사진 엔딩이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오경필을 제외한 남북한 병사 3명이 모두 사망하는 엔딩 외에도 전역한 이수혁이 5년 후 군교관으로 복귀한 오경필과 재회하기 위해 나이로비로 떠나는 엔딩도 찍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이 고집을 꺾은 덕분에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엔딩'으로 불리는 < 공동경비구역 JSA >의 엔딩이 탄생할 수 있었다.

젊은 한국계 여성으로 변한 중립국 장교
 
 <공동경비구역 JSA>는 이영에게도 커리어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영화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이영에게도 커리어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영화다. ⓒ CJ ENM

 
< 공동경비구역 JSA >는 지금보다 훨씬 활발한 연기활동을 하던 시기의 이영애가 영화 데뷔작 <인샬라> 이후 3년 만에 선택한 영화였다. 당시 이영애가 연예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생각하면 < 공동경비구역 JSA >의 중립국 감독위원회 법무관 소피 장은 비중이 다소 작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 공동경비구역 JSA >는 남북한 병사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이영애의 엄청난 열연은 필요하지 않았다.

사실 원작소설 < DMZ >에서 중립국 감독위원회 법무장교 역은 '지그 베르사미'라는 이름의 중년 남성이었다. 하지만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젊은 한국계 혼혈여성으로 설정이 변했고 이영애가 최종 캐스팅됐다. <올드보이> 등을 통해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접하고 뒤늦게 < 공동경비구역 JSA >를 감상한 일부 서구권 관객들은 이영애의 어설픈 영어발음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사실 스위스 사람인 소피가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할 필요는 없었다.

장진 감독의 <기막힌 사내들>과 <간첩 리철진>에 출연하며 주목 받기 시작하던 젊은 배우 신하균이 본격적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도 < 공동경비구역 JSA >였다. 신하균은 < 공동경비구역 JSA >에서 순박한 성격을 가진 정우진을 연기하며 무거운 내용과 주제의 영화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신하균은 < 공동경비구역 JSA > 이후 여러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 공동경비구역 JSA >의 최고 수혜자가 됐다.

착하고 성실한 모범생 역할부터 고학력의 인텔리, 그리고 안경을 벗으면 악역도 잘 어울리는 배우 김태우는 < 공동경비구역 JSA >에서 이수혁의 순수한 후임병 남성식 역을 맡았다. 처음엔 북한군의 호의에 경계의 뜻을 나타내던 남성식은 나중엔 정우진과 호형호제하면서 그림을 좋아하는 정우진에게 물감과 붓을 선물로 줬다. 참고로 남성식은 <히트>에선 마동석, <고지전>에선 이다윗이 연기했던 박상연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캐릭터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감독 송강호 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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