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에 개봉한 박중훈, 황정민, 김승우, 공효진 주연의 <천군>은 21세기 들어 이순신 장군이 등장한 첫 번째 영화다. <천군>은 후손들이 알고 있는 '성웅' 이순신 장군이 아닌 한창 무과시험에 낙방하며 방황하던 시절의 '청년' 이순신(박중훈 분)이 나와 미래에서 온 남북한 장교들의 훈련을 받고 각성한다는 내용의 영화다. 남북한 군인들이 처음 만났을 때의 '각성 전 이순신'은 그저 조선의 한심한 날건달에 불과했다. 

<천군>은 흥미로운 설정에 캐스팅도 제법 화려했지만 전국123만 관객으로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천군>의 재미에 대해 비판하는 관객은 있어도 민족의 영웅 이순신을 한심하게 표현했다고 비판한 관객은 거의 없었다. <천군>은 애초에 역사 속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역사적 사실만 나열하는 기록영화가 아닌 감독과 작가의 '영화적 상상력'이 더해진 영화였기 때문이다.

문학에서는 실화나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픽션을 섞어 재창조하는 행위, 또는 그렇게 탄생한 작품을 '팩션'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팩션 장르에서는 실제 인물이나 사건과 조금 다르더라도 대중들이 크게 문제를 삼지 않는다. 명나라 시절의 유명한 문인 겸 화가 당인을 모티브로 만든 이 홍콩영화도 과장과 각색이 많이 들어간 팩션 장르였다. 1993년에 개봉했던 주성치와 공리 주연의 코믹 멜로(?)영화 <당백호점추향>이다.
 
 <당백호점추향>은 포스터와 달리 액션이나 무협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다.

<당백호점추향>은 포스터와 달리 액션이나 무협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다. ⓒ 골든 하베스트

 
한 시대를 풍미한 중국 최고의 연기파 배우

1965년 중국 선양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공리는 베이징의 중앙희극학원에 입학해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거장 장이머우 감독에게 발탁됐다. 1988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붉은 수수밭>으로 데뷔한 공리는 <국두> <홍등> <귀주이야기> 등에 출연하며 중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활약했다. 1991년에는 <도협2: 상해탄도성>에서 1인 2역을 맡으며 홍콩의 떠오르는 '코미디 제왕' 주성치와 처음 호흡을 맞췄다.

국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공리의 대표작은 1993년에 개봉한 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다. 공리는 <패왕별희>에서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홍등가에서 일하는 매춘부 쥐셴을 연기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패왕별희>는 1993년 칸 영화제 화금종려상을 <피아노>와 공동 수상했다. 국내 관객들도 그 즈음부터 홍콩 최고의 여성배우가 왕조현, 임청하, 장만옥이라면 중국본토 최고의 여성배우는 공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공리는 1993년 <도협2>에서 한 차례 호흡을 맞췄던 주성치와 <당백호점추향>을 통해 2년 만에 재회했다. 공리는 <당백호점추향>에서 당백호(주성치 분)가 첫눈에 반하는 화태사 집안의 몸종 추향 역을 맡았다. 주성치 영화답게 대부분의 배우들이 몸을 사리지 않는 코믹연기를 선보였던 <당백호점추향>에서 공리 홀로 아름답고 우아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코미디의 대가' 주성치와 이력지 감독은 그 안에서도 웃음포인트를 뽑아냈다.

공리는 19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에 출연해 또 다시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공리는 <붉은 수수밭>을 시작으로 <국두> <홍등> <귀주이야기> <패왕별희> <인생>까지 많은 작품에서 중국 근대사의 격동 속에서 무력하게 휩쓸리는 여성 역할을 주로 맡아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특히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에서는 대부분 어디론가 팔려가는 비운의 여성을 많이 연기했다.

2000년대 들어 미국에 진출한 공리는 2005년 <게이샤의 추억>과 2006년 <마이애미 바이스>, 2007년 <한니발 라이징> 등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했다. 2006년에는 주윤발, 주걸륜과 함께 <황후화>에서 왕비를 연기해 베니스영화제 볼피컵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공리는 지난 2020년 디즈니에서 제작한 <뮬란> 실사영화에서 원작 애니메이션에 등장하지 않는 오리지널 캐릭터인 마녀 시아니앙을 연기했다.

주성치와 공리는 왜 사이가 나빴을까
 
 <당백호점추향>의 "다시 보니 선녀 같네"라는 대사는 국내에서 인터넷 밈으로 크게 유행했다.

<당백호점추향>의 "다시 보니 선녀 같네"라는 대사는 국내에서 인터넷 밈으로 크게 유행했다. ⓒ 골든 하베스트

 
<당백호점추향>은 명나라 시절 본명보다 '당백호'라는 자(한자문화권에서 성인으로 예우해서 부르는 이름)로 더욱 유명했던 시인 겸 화가 당인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당백호는 중국 남쪽 지방의 재주 많은 4명의 선비라는 의미를 가진 '강남사대재자' 중 한 명으로 유명했는데 영화에서도 강남사대재자가 함께 다니면서 여인들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당백호점추향>에서 강남사대재자는 노름꾼, 바람둥이 등으로 희화화돼 표현됐다). 

주성치 영화 대부분이 코미디가 중심이 되는 것처럼 <당백호점추향> 역시 코믹 요소가 많이 들어간 작품이다. 하지만 주성치 영화들만 모아놓고 다시 카테고리를 나누면 <당백호점추향>은 주성치 영화 중 가장 멜로에 가까운 작품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주성치 영화에서 멜로요소가 양념처럼 가볍게 들어있는 것과 달리 <당백호점추향>은 당백호와 추향의 러브라인이 영화의 핵심내용이자 주제로 중요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 속에서 예쁜 사랑을 나누는 당백호, 추향과 달리 두 주인공 주성치와 공리는 촬영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을 대표하는 연기파배우 공리가 주성치 영화 특유의 망가지는 코믹 연기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의 코믹연기에 대해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주성치 역시 공리의 행동이 '거만하다'며 불만을 가졌고 두 사람은 같이 연기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대화조차 거의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촬영을 이어가던 <당백호점추향>의 중재자 역할을 한 인물은 당시 공리의 연인이었던 장이머우 감독이었다. 공리는 <당백호점추향> 촬영 도중 장이머우 감독에게 코믹연기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는데 장이머우 감독은 "코미디 영화니까 즐기면서 연기에 임하라"고 공리에게 조언했다. 이후 공리는 망가지는 연기에 불만을 가졌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고 시간이 흐른 후 <당백호점추향>을 가장 애착이 가는 영화 중 하나로 꼽았다.

<당백호점추향>에서 영화 초반 당백호가 추향을 보면서 했던 "다시 보니 선녀 같다"라고 했던 대사는 2010년대 후반 국내에서 인터넷 밈으로 크게 유행했다. 처음엔 별로라고 느꼈지만 주변의 다른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나아 보이는 것을 농담 삼아 가리키는 표현이다(당시 추향의 주변엔 여장남자들만 있었다). 물론 이는 애초에 부정적으로 말했던 대상을 재평가할 때 쓰는 표현이기 때문에 듣는 상대의 기분을 고려해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주성치 영화의 각본-조연으로 참여하는 배우
 
 <당백호점추향>에서 영왕의 참모를 연기한 곡덕소는 이후 주성치 영화의 각본과 조연으로 참여했다.

<당백호점추향>에서 영왕의 참모를 연기한 곡덕소는 이후 주성치 영화의 각본과 조연으로 참여했다. ⓒ 골든 하베스트


추향과 가까워지기 위해 화태사의 집에 몸종으로 들어간 당백호는 화태사의 집안에서 주로 화부인(정패패 분)의 지시를 받는다. 뛰어난 재주로 화부인의 총애를 받던 당백호는 당백호의 명화를 즉석으로 그려내면서 화부인에게 정체가 들통난다. 영화 후반에는 당백호와 화부인이 서로에게 집안의 독약을 먹이고 자기 집안의 독약을 자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창 설전을 벌이다 갑자기 홈쇼핑처럼 분위기가 전환되면서 많은 웃음을 자아냈다.

영화배우 겸 감독인 고 유가휘가 연기한 탈명서생은 영왕의 심복으로 당백호에게는 아버지를 죽인 집안의 원수이기도 하다(초반 회상장면에서 당백호의 아버지가 등장하는데 주성치가 코에 수염을 붙이고 1인 2역을 맡았다). 영화에서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당백호의 재치와 말솜씨, 그림 등으로 위기를 탈출하는데 탈명서생과의 마지막 대결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성치와 유가휘의 진지한 액션연기가 나온다.

주성치 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백호점추향>에서 당백호와 시대결을 하다가 분에 못 이겨 피를 토하는 영왕의 참모를 연기한 배우의 얼굴이 꽤 익숙할 것이다. 바로 <가유희사>와 <파괴지왕> <산사초> <식신> <소림축구> <장강7호> 등 주성치와 여러 작품을 함께 했던 곡덕소가 그 주인공이다. 배우는 물론 각본가와 제작자로도 활동하는 곡덕소는 1999년 성룡과 서기, 양조위 등이 출연한 <성룡의 빅타임>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당백호점추향 이력지감독 공리 주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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