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06 14:10최종 업데이트 23.04.0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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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산 사람을 불속에" 일본에서 벌어진 일 끝까지 추적(https://omn.kr/23cku)에서 이어집니다.)

일본 정부는 1923년 이래 관동 조선인 대학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려고만 했다. 영화 한두 편으로 세상의 진실을 다 밝힐 수 없지만 일본이 감추려 하면 할수록 오충공은 한 발 더 진실에 다가가고 싶었다.


결국 다음 작품을 결심하고 오충공은 1편에서 조인승이 끌려갔다고 한 나라시노 수용소 옛터로 카메라를 들고 간다. 그 결실이 바로 1986년에 발표된 <불하된 조선인>이다. 이 작품은 지바현의 나라시노 수용소에 갇힌 조선인을 인근 마을의 자경단에게 넘겨 살해하게 한 충격적 사실을 다뤘다.

계엄군의 정책 전환, 불령선인을 골라내라

<불하된 조선인>의 충격을 만나려면 관동대지진 당시 몇 차례에 걸쳐 변화된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과 계엄 당국의 정책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진 이틀 후인 1923년 9월 3일, 임시진재구호사무국은 중요한 정책 전환을 결정한다. '조선인 습격설'을 명분으로 계엄령을 내리고 군대가 출동해 직접 조선인 학살을 자행했지만 반격이 없는 일방적 전투였다. 거리 곳곳에는 <감춰진 손톱자국>에서 증언된 자경단의 무차별 살해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은 지진으로 인한 위기를 모면하려고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택했지만" 학살의 광풍이 너무도 심해 수습 방안을 고민해야 했다. 조선으로 이 소식이 전달될까 걱정스러웠다. 해외로 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다.

방침을 전환했다. "조선인이냐, 아니냐"에서 "불령이냐, 아니냐"로 구분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9월 3일 임시진재구호 사무국 회의의 결정 제4항이었다. "용의점이 없는 조선인은 보호하는 방침을 취하고 될 수 있는 한 적당한 장소로 집합 피난시킨다. 용의점이 있는 조선인은 모두 경찰 또는 헌병에 인도하여 적당히 처분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일본 관헌은 '불령'과 '양민'을 판단하겠다고 조선인에 대한 일제 검속을 벌였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길거리에서 무조건 죽어야 하는 것은 면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체포되어야 했다. 또 다른 조선인 사냥이었다.

일상적으로 조선인을 감시하던 특별고등경찰의 내선(조선인)계가 앞장섰다. "악덕  학생과 평소부터 주의를 요한 청년에 대해 2일부터 3일에 걸쳐 주로 요도바시, 스가모 및 기타 파출소와 협력하여 검속을 개시해 4, 5일경까지 약 4천 명을 잡아들였다"는 기록은 그 실상을 보여준다. '악덕 학생'은 일본의 사상경찰이 조선에서 온 유학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렇게 하여 붙잡힌 조선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행될 때 철사나 밧줄로 결박하는데 도망을 못 가게 한다고 철삿줄이 맨살에 파고 들어갈 정도로 꽉 조였으니 그 아픔이 어떠했을까? 경찰서나 임시 수용소로 끌려가는 길도 위험이 가득했다. 도처에 자경단의 갈고리와 곤봉이 머리 위에서 번뜩였는데 병사나 경찰은 이런 만행을 방관했다.

시미즈 이쿠타로(清水幾太郎)가 펴낸 <수기 관동대진재>에 니노바시 시게가즈(二橋茂一)의 목격담이 나온다.
 
다음 날 아침 동네 사람들이 어디론가 달려가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살펴보았습니다. 경찰이 남자 한 명을 연행해 가는 것을 한 무리의 군중들이 조선인, 조선인이라고 하며 욕하면서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군중들은 경관을 밀쳐내고 남자를 가로채어 근처 연못에 내동댕이쳐놓고 세 사람이 커다란 몽둥이를 가져와 살아있는 사람을 떡 치듯이 퍽퍽 내리쳤습니다.
 
이런 실상은 조인승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길가에는 조선인을 지바(나라시노 수용소)로 보낸다는 소문을 입수한 자경단이 많이 몰려왔다.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죽여, 쏴버려라는 외침이 터져나왔다"고 회상했다. 
 

제국호텔 앞의 병사와 자경단. 강덕상과 금병동이 펴낸 자료집에 수록된 사진이다. ⓒ 現代史資料6 東大震災と朝鮮

 
"불령이냐 아니냐"로 정책은 전환되었지만 검속과 연행 과정은 이렇게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도 9월 6일에 내려진 계엄사령부의 지시로 일단 종지부를 찍는다. "그 성질의 선악에 관계 없이 조선인을 무법으로 대우하는 것은 절대 삼가야 한다. 저들도 우리의 동포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강한 어조였다. 이때까지 볼 수 없는 태도였다. "불령이냐, 아니냐"로 전환했지만 자경단의 광란 상태가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지에서 검속된 조선인은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어 특별고등경찰로부터 성명, 본적, 현주소, 직업 및 "지금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받았다. 소지품과 현금을 압수당하고 불령 행위를 했는가에 대해 집요하게 심문을 당했다.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다고 생각되면 고문을 받고 적당 처분이 내려졌다. 적당 처분이란 곧 죽음이었다. 심문을 받고 처분이 내려지기까지 불안 때문에 머리털이 하얗게 세어버린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적당 처분으로 사라지는 조선인이 있기에 계엄 당국은 수용된 숫자를 애매하게 기입했다. "요도바시 경찰서에 약 160명 보호 중"과 같은 기록이 하나의 예다. 수사기관이나 헌병대에서 신병을 처리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이 '인적사항'과 '숫자'다. 그런데 약 160명이라면 155명에서 많게는 164명까지니 수사기관에서 사람을 기록하는 숫자로는 적절치 않다. 수용 상태나 이동 과정에서 '적당 처분'된 사실을 은폐하려고 사용한 기록 방식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는 수용 생활

'양민'의 판정을 받고 수용소에 가도 전시 포로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군대와 경찰에 잡힌 조선인이 육천 명이 넘는데 이 중 삼천여 명이 나라시노 막사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이 심한 부상을 입었으나 이렇다 할 치료를 받지 못해 적잖이 생명을 잃었다. 그 외에 메구로 경마장이나 가나마루 가하라 수용소의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어느 수용소나 배급이 형편없어 "하루 한두 개의 주먹밥으로 연명하고 물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는"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특히 요코하마항에 있는 가잔마루라는 배에 갇혀있는 동포들이 제일 힘들었다. 스즈키상회 소유인 이 배에는 가나가와현 출신들이 잡혀 와 있었다.

겨우 하루 두 번 소금기 없는 주먹밥 한 개씩을 배급받았고 생선이나 야채는 꿈도 못 꿨다. 기록에 따르면 10일 아침부터는 세찬 비, 12일에는 늦은 무더위, 15일에는 다시 세찬 비바람, 22일에는 태풍이 왔다. 이들은 갑판 위에서 비바람과 무더위를 견뎌야 했다. 대소변은 아무 데나 싸야 하는 처지였다.

수용소 안에서도 요주의 인물에 대한 지속적인 색출 작업은 계속되었다. 조선말을 하는 경찰을 스파이로 집어넣기도 하고 신고하라고 일부 조선인을 꼬드겼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수용소에서 '불령'으로 판정된 조선인, 저항의 기미가 있는 조선인이 인근 마을의 자경단에게 넘겨져 살해당한 것이다.

오충공의 <불하된 조선인>(부제 관동대지진과 나라시노 수용소)는 바로 이런 역사적 사실을 다룬 것이다. 이 작품은 <감춰진 손톱자국>처럼 인근 마을의 자경단원과 수용소 인근 후나바시 경찰서 순사부장 와타나베의 중요한 증언을 영상에 담아냈다. 
 

<불하된 조선인>의 포스터 <불하된 조선인>은 나라시노 수용소에 잡혀있던 조선인을 인근 마을의 자경단에게 넘겨 살해하도록 한 사건을 다뤘다. ⓒ 오충공 제공

 
지금의 치바현 야치요시 수용소 부근의 가야마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자경단원이었던 기미츠카는 귀중한 증언을 한다.
 
3명씩, 여기는 아랫마을이지만 윗마을, 중간마을에서도 마을마다 3명씩 데려갔어. 조선인을 받으러 갈 때는 경비단이 갔지. 절로 데려와서 함께 의논한 결과 죽이려고 데려왔는데 어쩌면 좋을까 하다가 –중략- 조선인한테 물어보니까 한 방에 죽여달라고 했는데 그럼 칼로 목을 베는 게 좋을까 하니까, 눈을 가리고 총으로 쏴달라고 했어. 내 총은 못 쓰게 됐고 마을사람한테 부탁해서 총값을 내줄 테니까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 그래서 총을 구해서 세 사람을 한 사람씩 쐈지. 5척, 6척 깊이의 구덩이를 세 개를 파놔서 탕 쏘니까 구덩이로 바로 떨어졌어.
 
수용소 인근 마을의 자경단에게 조선인을 살해하도록 한 이 잔혹한 범죄는 와타나베의 영상 증언으로 재차 확인된다. 그는 본청에 보고하기 위해 나라시노 주재순사와 빈번히 연락을 취해 조선인 수의 통계를 적었다. 어느 날 숫자가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한 그는 말한다.
 
부근의 부락민이 데려간 거죠. 넘겨주더라는 얘기를 (주재순사한테) 들은 적이 있죠. 그래서 부근 마을의 사람들이 재미있으니까 죽이려고, 수용소에 와서 넘겨받아 데려간다고 생각했죠.
 
앞서 기미가츠의 증언과 궤를 같이한다. 이송되지 않았는데 수용소의 인원이 줄었다면 탈출한 것이기에 이는 경비부대로선 비상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주자에 대한 수색 작업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인근 나기노하라 마을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다. 이곳에선 살해 장면과 칼을 휘두른 자의 이름까지 적혀 있는 자경단원의 일기가 발견되었다.

이렇게 <불하된 조선인>도 생생하게 학살을 고발해 역사적 작품이 되었다.

세 번째 작품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감춰진 손톱자국>과 <불하된 조선인>은 일본에서 천 번이 넘게 상영되었다. 재일동포만이 아니라 양식 있는 일본인도 이 영화를 찾았다. 한국에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대에 올려졌다. 1998년에는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에 해외 코리안 작품으로 초대되었다. 2014년에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열도 속의 아리랑>이라는 '8·15광복절 특별전시회'에서 상영되었다.

2016년 서울의 광화문 광장에서 '관동대학살 93주년 공식 추모 행사'가 열렸을 때 인근 서울시청에서 시민들이 작품을 관람했다. 영화는 일본 외에 동포사회에서도 관심을 받아 미국에서도 10개 대학에서 상영됐다.

오충공 감독이 이 두 개의 작품을 만들 때 애로가 컸다. 젊은 나이에 경험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참고할 수 있는, 소스가 될 만한 영상자료가 없었다. 또 여러 스태프를 이끄는 처지에서 경비도 문제였다.

그런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재일동포 2세로서 겪은 차별의 경험과 자각이었다. 1955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고물상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컸다. 그리 어렵지도 넉넉하지도 않은 생활, 부모님은 오충공이 일본 사회에 잘 스며들길 바라서 일본 학교를 선택했다.

학교는 고통이었다. 조선놈 소리, 때로는 학교 오가는 길에 돌팔매도 날아오고. 결국 조선학교로 전학했고 재일동포의 정체성에 눈을 떴다. 관동대학살에 관한 작품을 하면서 이것이 결코 재일동포만의 문제가 아니고 한민족 전체의 문제라는 자각을 했다. 그 깨달음 덕에 오충공은 역경 속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오충공 감독 ⓒ 민병래

 
오는 9월 1일 백주년을 앞두고 오충공의 세 번째 작품 <1923 제노사이드, 백년의 침묵>(가제)이 개봉된다. 이 영화는 관동대학살의 유족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유족을 오랫동안 찾아 나선 감독 자신의 순례기이기도 하다.

일생 동안 일본제국주의의 범죄를 학문적으로 고발한 야마다 쇼지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논형 2003)이란 책의 후기에서 이런 감상을 남겼다.
 
언제인지 기억은 없지만 조선인을 기리는 묘비, 추도비를 찾아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던 것 같다. 사이타마의 조세지 사원 묘지에 있는 강대흥의 묘 앞에 섰을 때 갑자기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강에게도 조선의 육친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고향 육친을 생각하며 어떠한 기분으로 죽어갔던 것일까? 또 고향에 계신 육친은 돌아오지 않는 그를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을까?

강은 어디로부터 이 소메야로 오게 되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소메야 주민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의 소지품에 이름이 적혀 있었던지 이름만은 묘비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소메야 사람들은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죽음이 고향의 육친에게 전해졌을 리가 만무하다.
 
오충공이 유족에 주목한 이유는 야마다 쇼지의 생각과 맞닿아있다. 그는 고향에 있는 가족이 애타는 그리움을 지닌 채 스러져간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1만 권의 책, 1만 개의 증언보다 유족의 한마디가 더 힘을 지닌다고 오충공은 생각했다. 

한편 현실적으로 학살 당시 관련자가 모두 사망했고 점점 잊힌 사건이 되어가기에 이를 되살리기 위해선 유족의 존재가 중요했다. 시민운동그룹만이 아니라 피해 당사자가 나서야만 일본 정부를 향해서 책임 인정과 사과를 힘있게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의 '유족연합회'는 코로나 이전에 해마다 도쿄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 일본 외교부를 방문해 학살 인정과 사죄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유족을 찾는 일은 애로가 많았다. 강제동원이나 강제징병의 경우엔 생존자와 유족도 많고 기록도 풍부하게 남아 있지만 관동대학살은 달랐다. 살아 돌아온 자는 모두 숨졌고 학살당한 이에 대해 제대로 조사된 명단이 없었다. 그렇기에 유족을 확인하고 발굴하는 문제가 쉽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계기가 찾아왔다. 2013년 주일한국대사관에서 '관동진재 피살자 명부'가 발견된 것이다. 이 명부는 이승만 정부가 1953년에 열릴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준비 차원에서 만든 자료였다. 오충공은 국가기록원으로 넘겨진 이 자료에서 학살당한 이의 이름과 본적지를 일부 확인하고 유족을 찾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학살 이후 남겨진 그들의 가족사를 기록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 것이다. 

오충공은 학살당한 이의 본적지로 가서 주민센터나 노인정, 마을회관을 다니며 수소문했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사이타마에서 참살된 강대흥의 손자 강광호를 이렇게 찾았다. 의성에서는 박득수의 유족을, 함안군에서는 정경수의 유족을 찾아냈다.

오충공은 <감춰진 손톱자국>의 주인공 조인승이 일본에 오기 전 어떻게 살았나를 조사하기 위해 방문한 거창에서 뜻밖의 성과를 거뒀다. 또 다른 유족 조광환을 만난 것이다.

군마현에서 학살당한 조권승의 손자 조광환은 오충공 감독을 만나기 전날 밤 "할아버지의 가묘가 환히 빛나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오충공은 또 군마현 후지오카 경찰서에서 살해된 남성규의 외손자 권재익을 만나러 영주시도 여러 번 찾아갔다.

유족을 만나면 오충공은 족보를 확인하고 가족사를 듣고 혹시 '가묘'라도 있으면 함께 올라가 술을 바치고 이를 영상에 담았다. 제주에서 찾은 조팔만씨는 <연합뉴스> 변지철 기자의 노력이 컸다. 그가 무더위를 이겨내며 두 달간 제주도 내 주민센터를 찾아다니며 얻은 결실이었다. 덕분에 조팔만씨의 생전 모습도 필름에 담을 수 있었다.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식에서 오충공과 함께한 유족 권재익. 그는 군마현 후지오카 경찰서에서 살해당한 남성규의 외손자다. ⓒ 민병래

 
오충공은 일본에서 태어났고 생활 기반도 그곳이라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유가족을 찾는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족이 주로 경상남·북도인 거창, 함양, 의성, 영주 등지에 있어 도쿄에서 서울에 와 다시 차를 빌려 오가야 했다. 촬영감독도 함께 와야하기에 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노력 끝에 오충공 감독이 발굴한 유가족은 모두 일곱 가족 열세 명이었다.  2017년 8월 20일 부산에 있는 '강제동원역사관'에서 이들과 함께 유족회 발족을 위한 모임과 기자회견을 했다. 이날 오전에는 옛 부산부두 인근 수미르 공원에서 조상의 영령을 기리는 제사도 모셨다. 그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이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내려 일본 내지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학살 피해를 당한 지 90년이 넘어서 이뤄진 일이다.

이 자리에는 '관동대진재시 조선인 학살의 사실을 알고 추도하는 가나가와 실행위원회'의 대표 야마모토 스미코, '구마모토 지진의 헤이트스피치를 용서 안 하는 회'의 마츠오 카세츠코 대표도 참석했다. 여기서 마츠오는 "관동 학살에 대해 일본은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인으로서 조선인 희생자 분들에게 마음으로 용서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충공은 유족회 결성을 위한 모임을 가진 이듬해, 유족 권재익과 조광환을 일본으로 초청해 군마현 후지오카의 조도지 추도식과 지바현 관음사의 추도식에 함께 참석했다. 또 (재일동포) 유가족과 함께 2018년 9월 도쿄의 신오쿠보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진상규명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경비도 그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오충공은 이런 여정을 세 번째 작품에 담은 것이다.

제3편을 넘어, 4편, 5편으로

관동대학살 100주년인 9월 1일을 앞두고 오충공의 작품은 세상에 나오리라. 그의 나이 올해 68, 첫 작품을 낸 게 스물여덟이니 40년 여정의 결산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작업은 이게 종착점이 아니다. 그가 만들어갈 이야기가 더 있다.

우선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일대기. 그에게 강덕상은 큰 스승이었다. 선생이 2021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 임종을 못 지켰다. 말기암으로 고생하던 강덕상이 응급실에 실려갔지만 코로나 탓에 가족 외에는 면회가 안 되었다.

강덕상의 역작인 <여운형 평전> 4권이 완간되었을 때도 출판기념회를 열지 못했고 독립기념관에서 학술상을 받았을 때도 축하모임조차 만들지 못했다. 모두 코로나 때문이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강덕상은 병상에서 하루 열 차례나 오충공을 찾았다고 한다. 그를 아끼고 그에게 의지했던 까닭이리라.
  

재일 사학자 강덕상. 그는 한평생 관동대학살의 진실을 연구했다. ⓒ 한지영

 
오충공도 그런 강덕상을 흠모하고 늘 배움을 청했다. <감춰진 손톱자국>을 만들 때 그는 강덕상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강덕상은 관동대학살의 진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인도해줬다. 흥분한 자경단에 의해 저질러진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 조선인의 민족해방투쟁에 놀라 조선인 자체를 적대시하는 일본제국주의의 민족 범죄라는 시각을 세워주었다.

강덕상은 또 "박해를 겪은 동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설정해 문헌자료, 사진자료, 목격자의 증언을 결합"하는 구체적인 작업 방법까지 조언해줬다. 오충공은 이런 가르침을 충실히 표현하고자 했다.

강덕상은 또 오충공을 세 번째 영화 제작으로 나서게끔 용기를 주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났을 때 강덕상은 자신의 강연 몇 시간보다 영화 한 편이 더 호소력이 있다며 오충공에게 "<불하된 조선인>으로부터 30년 동안 이루어진 변화를 기록으로 남겨라, 그것이 오 감독 영화의 진정한 완성이다"라는 제안을 했다.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아 생업에 종사하던 그는 긴 고민 끝에 세 번째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을 먹는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혐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도 오 감독의 결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충공은 <감춰진 손톱자국>에서 강덕상과 인연을 맺은 이래 오랜 세월 그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말기암으로 고생하면서 생애 마지막까지 강의와 연구, 현장답사로 관동대학살의 진상규명에 정진했던 강덕상의 이모저모가 담겨있다. 돌아가시기 2주 전까지 모습을 담았다고 한다.

기쁘게도 강덕상 선생이 평생 모은 사과 상자로 400개가 넘는다는 연구 자료가 '임시정부기념사업회'로 오게 되었다. 그 감격적인 장면도 어떻게 기록될지 궁금하다. 오충공 감독의 손에서 피어날 '강덕상'의 삶이 기다려지는 이유들이다.

강덕상의 삶에 더해 일본의 많은 시민운동가들 사연도 있다. 30~40년을 한결같이 조선인 학살을 추도하고 진실을 묻는 그들의 이야기 또한 기대된다. 아라카와의 전설을 지펴낸 '기누타 유키에', 조선인 학살의 추도비를 지키며 호센카를 이끌어가는 '니시자키 마사오', 관동대학살에 관한 '일본의 국가 책임을 묻는 모임'의 다나카 마사타카, 많은 인물의 진정성이 한컷 한컷 기록되어 있다. 언젠가 이들의 삶도 묵직한 영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리라

오충공의 작품은 극영화가 아니니 입장료 수입을 바랄 수 없다. 힘 있는 배급사가 나서는 것도 아니다. 목돈을 대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는 지금까지 제작자이며 연출자로 촬영감독이며 편집자로 1인 다역을 했다. 물론 작품 해설을 겸한 강연도 많이 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다가오는 9월 1일 관동조선인 대학살 100주년은 기념식을 잘한다고 만족할 일이 아니다. 오늘날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의 국가 범죄를 부정하고 사죄하지 않기에 100주년을 넘어 '역사투쟁' '기억전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칠순을 바라보는 오충공의 카메라는 현장을 떠나지 못한다.
덧붙이는 글 1) 나라시노 수용소는 러일전쟁 시기 러시아 포로를 수용했던 곳이다.
2) 임시진재구호사무국의 결정 이후 계엄사령부의 훈시도 이어졌다.
"불령선인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방화하거나 미수에 그친 사실이 없지는 않지만 이미 군대의 경비력이 거의 완전해져 가고 있으니 결코 두려워할 바가 아니다. 수백 수천의 불령선인이 습격할 것이라는 출처가 분명치 않은 무뢰배들의 유언비어에 자칫 현혹되어 경거망동하는 일은 이제부터 삼가야 할 것이다."
3) 니노바시 시게가즈의 말은 <관동대지진, 학살의 기억>(역사비평사간 강덕상저) 248쪽에서 재인용했다.
4) 주일 한국대사관을 신청사로 이전할 때 세 종류의 명부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일본진재피살자명부'(1권 109매, 290명 수록)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2월 15일에 열린 제109회 국무회의에서 ① 3·1운동 살상자 ② 관동진재 희생자 ③ 제2차대전 징용・징병자 수 ④ 왜정하 애국사상운동 옥사자 ⑤ 미곡 약탈량 ⑥ 금은 보물 반출량 등에 관한 조사와 집계를 내무부에 지시했다. 이승만은 1953년 1월 5일부터 7일까지 일본을 공식 방문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와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었다. 이 조사는 회담의 준비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부산으로 피난 간 상태에서 행정력은 미미했고 시간 또한 촉박해 이 명부는 1953년 4월 15일에 열린 제2차 한일회담 때에 맞춰서야 작성돼 대표단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일본진재 피살자 명부는 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채 주일대사관 캐비넷에 잠들어 있다가 청사 이전을 위한 이삿짐 정리 중에 발견되었다. 행정안전부로부터 이 자료를 넘겨받은 국가기록원은 2013년 11월 이를 공개하였고 이때서야 간토 유족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5) 유족회 결성에 관한 내용은 연합뉴스 2017.8.30.일 자 "94년 걸린 간토학살 희생자 유족회 발족...진상규명 촉구"기사에서 인용
6) 오충공 감독이 세번째 영화를 결심하게 된 배경은 한겨레신문 2015-09-23 "조선인 희생자 뒤에 남은 가족의 사연들 담을 것"이란 기사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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