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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이듬해인 1947년 20세 때의 김자동 회장과 부모님 김의한ㆍ정정화 여사
▲ 김자동 가족 귀국 이듬해인 1947년 20세 때의 김자동 회장과 부모님 김의한ㆍ정정화 여사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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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살에 시작한 언론인 생활을 만 10년 만에 마치고 새로운 직업을 택한 때가 어느 덧 서른 여섯의 중청년이 되었다. 알토란 10년 세월을 언론계에서 지냈다. 

1954년, <조선일보> 입사로부터 시작된 나의 언론계 생활은 꼭 10년 만에 막을 내렸다. 당시 시대 상황에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여러 신문사를 옮겨 다녔다. 10년 세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내 인생에서는 가장 치열하게 산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기자 시절을 돌이켜 볼 때 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석 10)

그 사이 한국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특히 정치상황이 죽의 장막을 쳤다. 박정희는 1963년에 이어 1967년 두 번째 대통령이 되고, 1965년 8월 한일굴욕회담이 공화당 단독국회에서 조인되었다. 같은 날 전투사단을 베트남에 파병하여 민족사상 최초로 해외파병이라는 흑역사를 쓰게 되었다. 

김자동은 회사에 취업을 하거나 사업을 시작했다. 이 분야에 체질이 맞지 않았으나 달리 생계의 길이 없었다. 약술한다.

△ 친구의 소개로 한국공업에서 무역부를 신설하여 영어를 밑천으로 무역부장으로 입사했다. 

△ 친구와 베트남에서 '한김회사'를 차리고 꽤 수익을 올렸으나 한국정부의 전투병 파견과 베트콩의 구정공세 등 전황 변화로 보따리를 쌌다.

△ 가족과 함께 싱가포르 이주 계획을 세웠다. 사업의 어려움으로 이를 접었다.

△ 친구 한제세와 서울에서 '한김 컴퍼니'라는 오퍼상을 차렸는데 사업이 신통치 않았다.

△ 1976년 2월부터 독립운동가 산운 장도빈 선생 셋째 아들 장치혁이 세운 회사에서 2년여 동안 일했다. 

△ 오퍼상 '베델상사'를 설립하고 사업을 시작했다가 동업자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문을 닫았다.

동업자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오퍼상을 끝으로 사업이든 월급쟁이든 직장 생활은 막을 내렸다. 

사업 이야기를 한 김에 한 마디 덧붙여두고 싶은 게 있다. 홍콩을 몇 차례 드나들면서 사업에 관심을 가진 후 이런저런 사업을 해보았다. 그러나 돈 버는 일은 내게 맞지 않은 옷과 같았다. 몇 차례 사업을 벌인 것도 생계수단이었을 뿐 큰 사업가로 성장하고픈 생각도 없었다. 대인 관계는 문제가 없었으나 돈벌이보다는 세상일에 관심이 더 많았다. 내 인생에 이제 다시 사업을 할 기회는 없겠지만 별로 하고 싶지도 않다. (주석 11)

시비곡직을 가리는 정직한 언론인 출신으로 타산을 앞세우는 사업이 쉬울 리 없을 것이다.

"나는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해온 편이다. 그러다보니 직장에 몸이 메이는 것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주석 12)

김자동은 돈 버는 일보다 선대가 남긴 역사의 과제들을 수행하고자 새로운 인생의 도정에 나선다. 


주석
10> <회고록>, 406쪽.
11> 앞의 책, 420쪽.
12>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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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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