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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이듬해인 1947년 20세 때의 김자동 회장과 부모님 김의한ㆍ정정화 여사
▲ 김자동 가족 귀국 이듬해인 1947년 20세 때의 김자동 회장과 부모님 김의한ㆍ정정화 여사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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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한 임시정부가 미군정에 의해 배척되면서 '해방'된 고국에서 어려움을 겪듯이 그 가족들의 삶도 어려웠다. 김자동 가족 역시 다르지 않았다. 김구가 매달 보내주는 1만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귀국 후 우리의 살림은 아주 궁색했다. 당시 대부분 서울 시민들의 주식이라는 것이 미국에서 들여온 사료용 옥수수였으므로 우리는 그 옥수수로 끼니를 이어야 했다. 시동생 각한이 중견 화가라고는 하나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성엄도 고정 수입이 있을 리 없어서 많은 식구에 쪼들리는 살림은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굳이 고정 수입이라고 이름붙일만한 것이 있었다면, 백범이 한 달에 한 번씩 건네주는 돈 만원이 있었다. 차마 받아 쓰기가 쑥스럽고 죄스러운 돈이었다. (주석 1)

광복군 정령으로 귀국한 아버지는 먼저 환국한 임정 지도자들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김자동은 아버지를 따라 함께 다녔다. 가장 먼저 찾은 분은 경교장으로 김구 주석이었다. 귀국인사를 드리고 그곳에서 경호원과 비서로 활동하는 윤경빈과 선우진 등 동지들을 다시 만났다. 광복군 동지들이다. 

두 번째는 우남 이승만의 돈암장이다. 아버지는 이승만과 인연이 있었다. 상하이 임정시절 여러 차례 자금을 지원한 바도 있었다. 그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갈 때 아버지에게 동행하기를 바랐으나 이를 따르지 않았다. 부인 프란체스카와 비서 이기붕을 처음 만났다. 

이어서 위창 오세창 댁이었다. 위창은 할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했다. 창덕궁 비원 중수 공사 때 할아버지는 비원장을 맡아 공사를 지휘했다. 비원에 있는 금마문(金馬門) 등 상당수 편액의 글씨를 그때 손수 쓰셨다. 그때 비원의 건축공사는 위창이 맡았다. 위창은 서예와 전각은 물론이요 주택설계, 감리 등 만능예술가로 불린 인물이었다. 할아버지의 별장이었던 백운장은 고종이 하사한 비원 중수공사 때 쓰고 남은 자재로 위창이 지었다. (주석 2)

아버지와 아들의 인사 순회길은 계속되었다. 우사 김규식, 김좌진장군 부인댁, 엄항섭·조소앙의 집으로 진행되었다. 하나같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옛 체취가 담긴 별장 백운장을 찾고자 노력했다. 할아버지가 망명할 때 집사가 몰래 백운장을 잡히고 도장을 찍어 동양척식회사에서 돈을 빼내 써버렸다고 한다. 해방 후 이승만을 찾았을 때 할아버지한테 신세를 진 적이 있다고 인연을 상기하면서 정부가 수립되면 찾자고 약속했으나 미군정을 거쳐 이승만 집권기에 타인 명의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승만 정권이 백운장을 꿰차고 내주지 않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유라면 오직 그것 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운장이 우리 집안 소유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우남이 그리 행동할 수 없는 일이다." (주석 3)

학구열이 강한 김자동은 못다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귀국한 해 5월 중학교 5학년에 해당하는 경성대(서울대 전신) 예과에 응시했다. 첫 도전에 고배를 마셨다. 국어시험의 시조가 문제였다. 두 번째로 도전한 연희전문(연세대 전신)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등록과정에 문제가 불거졌다 이전에 다닌 학교 졸업증명서를 떼어 오라는 것, 중국에 다녀올 상황이 아니었다. 

다행히 보성중학 4학년에 편입되었다. 사립명문으로 알려진데다 김자동과 같이 중국이나 만주 등 해외에서 온 학생들이 많아 경쟁률이 높았다. 그는 1946년 6월 고국에서 첫 학교인 보성중학 4학년에 입학하였다. 집과도 가까워 통학에 불편이 없었다.  

하루는 교감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오라 하셨다. 당시 나는 반장을 맡고 있었다. 그때 보성중학에는 생도위원회라는 학생 자치조직이 있었다. 한 반 육십 명 중에서 여섯 명의 생도위원을 선발해 이들이 한 달씩 돌아가면서 반장을 했다. 생도위원회는 토요일 오후에는 총회를 열어 학교에 건의할 안건을 정하기도 했다. 보결생이 생도위원에 뽑히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어쨌든 내가 그중에 하나로 뽑혔다.

여섯 명의 생도위원 중에는 좌익 성향이 세 명, 나를 포함해 중도 보수 성향이 세 명이었다. 보수 성향에다 독립운동가 후예인 내가 믿음직하다고 여겼던지 교감 선생님께서 종종 나를 불러 의논하곤 했다. (주석 4)


주석
1> 정정화, 앞의 책, 1273쪽. 
2> <회고록>, 139쪽.
3> 앞의 책, 151쪽.
4> 앞의 책, 15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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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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