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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길지 않게 쿠알라룸푸르에 머문 뒤, 저는 약간 더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이곳은 말레이시아의 역사 도시, 믈라카입니다. 물론 쿠알라룸푸르에 비해서는 오래된 도시이지만, 믈라카 역시 역사 도시라기에는 아주 오래된 도시는 아닙니다.

말레이 반도에는 오래 전부터 지금의 말레이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미 2~3세기부터 주변 지역과 교류하는 여러 왕조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중국이나 인도와 교류했고, 무엇보다 수마트라 섬이나 자바 섬과는 아주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믈라카라는 도시의 탄생도 수마트라 섬을 중심으로 성장한 스리비자야 왕조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스리비자야는 오랜 기간 말레이 반도를 지배했지만 14세기에 접어들며 몰락하게 되죠. 그리고 스리비자야 왕실의 후손으로 알려진 파라메스와라가 싱가포르를 거쳐 정착한 곳이 이 믈라카였습니다. 여기서 15세기 초반 믈라카 술탄국이 건국됩니다.

그러니 믈라카는 역사 도시라고는 하지만, 겨우 600여년 전에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역사 기록이 많지 않은 말레이시아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부터 분명하고 세밀하게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믈라카 술탄국 시기부터 말레이 반도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말레이어가 자리잡고, 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었으니 현대 말레이시아의 입장에서도 아주 중요한 역사적 변곡점이었죠.

여러 이권과 욕망이 교차하는 현장
 
믈라카 술탄의 왕궁을 복원한 박물관.
 믈라카 술탄의 왕궁을 복원한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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믈라카의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했습니다. 시내 중심을 가로지르는 택시의 차창에서부터 붉은 색 벽으로 장식된 구시가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도시를 흐르는 좁은 강과 주변으로 늘어선 나즈막한 골목. 도착하자마자 만난 아름다운 풍경이 이 도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사실 믈라카 술탄국은 말레이 반도를 중심으로 한 최초의 통일 왕조로 무거운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정작 왕조 자체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믈라카 술탄국은 주변 지역에 창궐하던 해적을 상대로 상인들을 보호하고 동방과 서방을 잇는 중개 무역지로 번성했습니다. 중국과 인도, 중동,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인도양 무역의 중심지였죠. 그리고 그 무역로를 따라, 곧 유럽인이 말레이 반도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인도 고아에 자리를 잡고 있던 포르투갈이 먼저 앞장섰습니다. 포르투갈은 1511년 18척의 함대를 이끌고 믈라카를 공격했습니다. 40여 일의 전투 끝에 포르투갈은 믈라카를 정복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믈라카 술탄국은 성립 100여년 만에 무너졌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식민지 시대가 서막을 알린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포르투갈이 곧바로 말레이반도 전역을 지배한 것은 아닙니다. 포르투갈의 식민 정책은 거점 항구와 주변 도시만을 지배하는 방식이었지, 내륙 전체를 차지하고 다스리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포르투갈은 믈라카 항구만을 장악했을 뿐이었죠. 믈라카 술탄의 여러 아들은 말레이 반도에 흩어져 조호르 술탄국, 페락 술탄국 등 다시 여러 왕조를 꾸렸습니다.
 
믈라카 구시가
 믈라카 구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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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의 여러 술탄국은 포르투갈과 강력히 경쟁했습니다. 조호르 술탄국이나 아케 술탄국 등이 포르투갈에 도전했죠. 사실 당시 포르투갈 식민 당국은 현지인 이교도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자의적 세금 징수, 부정부패 등의 문제로 같은 유럽인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한 것이 네덜란드였습니다. 이미 자카르타에 자리를 잡고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호르 술탄국, 아케 술탄국과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이들은 곧 포르투갈을 공격, 1641년 믈라카를 점령합니다. 물론 이것은 타이완, 브라질, 케이프타운, 스리랑카, 마카오 등 여러 식민지 지역에서 충돌하고 있던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사이 거대한 경쟁의 일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던 영국도 이 무역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국은 케다 술탄국으로부터 페낭을 임대하며 말레이 반도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믈라카를 지배하는 네덜란드, 네덜란드에 협력하며 상당한 힘을 키운 여러 말레이계 술탄국, 그리고 진출을 시작한 영국까지. 말레이 반도는 여러 이권과 욕망이 교차하는 현장이 되어갔습니다.
 
 믈라카 중심의 네덜란드 광장
  믈라카 중심의 네덜란드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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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 변화의 불씨를 당긴 것은 유럽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벌어지고, 혁명 정부는 주변국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병합되었죠. 이때 네덜란드 식민지는 영국이 대신 관리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네덜란드는 재건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도 다시 반환되었죠. 하지만 영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특히 영국에게는 자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홍콩을 이을 항로가 절실했습니다. 곧 영국은 네덜란드와 조약을 체결해 믈라카를 할양받습니다. 그렇게 영국은 말레이 반도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나누어 지배하게 됩니다.

물론 네덜란드가 지배했던 것은 믈라카라는 항구도시 뿐이었고, 당연히 영국도 항구도시만을 할양받은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이미 자국이 가지고 있던 페낭, 싱가포르, 딘딩과 믈라카를 묶어 '해협 식민지(Strait Settlements)'라는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나머지 지역에는 여전히 말레이시아인의 술탄 왕조들이 남아 있었죠.

말레이인의 말레이시아
 
믈라카 중심의 네덜란드 광장
 믈라카 중심의 네덜란드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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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국의 식민지배 방식은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와는 달랐죠. 시간이 지날수록 영국은 말레이 반도 내부에까지 관심을 확장하게 됩니다. 말레이 술탄 왕조들 사이의 갈등이 항구도시에 미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말레이 반도에서 대규모 광산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항로를 장악하는 이권만큼이나 내륙의 광산에 대한 이권도 영국의 관심을 끌었죠.

영국은 말레이 반도 안의 술탄국들과 조약을 체결하며 그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1874년에는 영국 지배 하 '말레이 연방주'가 건설되었습니다. 곧 나머지 지역에도 영국인 고문관이 파견되어 정치에 간섭을 이어갔죠. 결국 말레이 반도는 '해협 식민지', '말레이 연방주', 그리고 형식적 독립은 유지하지만 영국이 사실상 지배하는 5개의 주로 구성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과거 영국 총독이 사용했던 쿠알라룸푸르의 술탄 압둘 사마드 빌딩
 과거 영국 총독이 사용했던 쿠알라룸푸르의 술탄 압둘 사마드 빌딩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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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역사 도시이지만, 믈라카라는 도시는 성립 이래 대부분의 시간을 식민지로서 보낸 것입니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도 조호르와 같은 주는 상당한 자치권을 인정받기도 했지만, 믈라카는 그조차 없는 직할 식민지였습니다.

믈라카 술탄국이 있던 이 도시는, 결국 지금은 술탄이 없는 주가 되었습니다. 말레이 반도에서는 페낭과 믈라카만이 술탄이 없는 주죠. 모두 식민 지배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여전히 믈라카에서도 거대한 차이나타운과 리틀 차이나, 높은 첨탑의 모스크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내 중심에서는 붉은 벽으로 장식된 네덜란드 총독의 관저나 포르투갈이 지은 요새가 더욱 눈에 띕니다

관광객이 모여 있는 '네덜란드 광장'과 '크라이스트 처치'를 둘러보고는 뒤쪽의 작은 언덕을 올랐습니다. 네덜란드인이 지은 성 바오로 교회는 영국의 공격으로 폐허가 되어 이 언덕 위에 남아 있습니다. 그 역사의 현장에, 말레이인의 자리는 어디였을까요. 계단을 오르며 "말레이인의 말레이시아"라는 구호를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말레이라는 정체성의 기점이 되었던 땅, 믈라카에 정작 말레이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 바오로 교회에서 뒤쪽으로 내려와 닿은 광장, 믈라카 술탄 박물관과 말레이시아 독립선언 기념관이 서 있습니다. 왕궁은 새로 복원한 것이고, 독립선언 기념관도 과거 영국인들의 사교 클럽으로 쓰던 건물에 들어서 있습니다.
 
성 바오로 교회
 성 바오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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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시간은 흘렀습니다. 때로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덜란드 광장'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는 청년도, 차이나타운의 작은 가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노인도, 식당에서 숙제를 하고 있던 주인 부부의 어린 딸도 이제는 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말레이시아의 모습이라면, 믈라카라는 도시는 다시 말레이시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현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통일 왕조와 식민지배, 그 극복과 독립. 그리고 오늘 여전히 남아 있는 유럽의 성벽 밑을 걷는 히잡을 쓴 여성들. 이 흔적도, 이 사람들도 모두 배제되지 않는 말레이시아가 될 수 있다면. 그런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라면.

그렇게 된다면, 믈라카야말로 말레이시아의 역사 도시라 말하는 데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늘뿐 아니라, 더 미래의 말레이시아에서도 말이죠. 역사의 흔적을 딛고 새로운 사람들의 역사를 마주해 내가는, 그런 역사 도시를 저는 오늘도 상상합니다. 그렇게 흔적을 찾아 여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말레이시아, #믈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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