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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반도 가장 남쪽의 도시인 조호르바루는 언제나 싱가포르로 향하는 승객들로 붐빕니다. 조호르바루 센트럴 역에서 기차를 타고 5분이면 싱가포르에 도착합니다. 둘 사이를 오가는 버스는 시내버스 수준으로 많습니다. 저도 사람들이 붐비는 거대한 출국장에서 길을 헤맨 끝에, 결국 계획했던 기차가 아닌 버스를 타고 싱가포르에 입국했습니다.

입국장 근처의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벌써 말레이시아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이 분명합니다. 우선 언어 표기가 달라집니다. 말레이시아의 국어는 말레이어고, 영어를 제2언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인도계와 중국계가 많지만 이들의 언어는 공용어의 지위는 갖고 있지 않죠.

반면 싱가포르는 중국계, 인도계, 말레이계의 언어를 모두 공용어로 인정합니다. 중국계는 원래 복건성이나 광둥성 출신이 많지만 교육을 통해 표준중국어가 보급되어, 간체자를 쓰는 표준중국어를 공용어로 인정합니다. 인도계는 주로 타밀 지역 출신이 많아, 타밀어가 공용어로 인정됐죠. 말레이계는 물론 말레이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 세 언어를 연결하기 위한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국민들이 광범위하게 영어를 사용해 영어를 실질적인 국어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공문서는 네 언어가 모두 사용됩니다. 지하철의 안내판에서부터 말레이어와 영어, 중국어, 타밀어를 한 눈에 볼 수 있죠.
 
지하철에 걸린 비상구 표지판
 지하철에 걸린 비상구 표지판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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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이민자 국가로서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현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싱가포르는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중국계인 국가니까요. 언어 표기를 제외하면, 지하철 안의 풍경은 제가 처음 여행을 시작한 타이완 섬과 거의 다르지 않다고 느꼈을 정도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싱가포르의 진짜 모습

언어에서 볼 수 있듯 인도계 역시 싱가포르의 주요한 구성원입니다. 베트남 통일 이후 남베트남 출신의 이민자도 많았죠.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는 사람들도 상당합니다. 싱가포르의 낮은 출생률이 겹치며, 싱가포르는 매년 태어나는 사람의 수보다 이민을 오는 사람의 수가 더 많은 국가가 되었습니다.

2021년 싱가포르 통계청에 따르면,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사람은 모두 560만명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싱가포르 시민권을 가진 인구는 350만명을 조금 넘습니다. 나머지는 영주권자나 유학생, 이주 노동자 등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죠.
 
리틀 인디아 거리
 리틀 인디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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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인 저로서는 영어가 능숙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피로도가 크게 줄어듭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든 일단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안심이 되죠.

물론 모든 여행지에서 현지어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만, 곳곳을 오가는 여행자로서는 그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국립박물관 매표소에 계시던 나이든 직원 분은 유창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합니다. 다리 하나를 건너 작은 섬에 왔을 뿐이지만 다른 나라에 온 것이 맞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면, 더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거리의 풍경은 더 깔끔해졌습니다. 곳곳을 오가는 대중교통망도 촘촘합니다. 어떻게 보면 서울과 아주 닮아 있고, 타이페이와도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어쨌든 제가 지난 한 달을 보낸 동남아시아의 다른 도시들과는 분명히 무언가 다릅니다. 일단 물가부터가 그렇구요.
 
싱가포르 강변 풍경
 싱가포르 강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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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깨끗해 보이는 거리와 여러 글자로 쓰인 표지판. 이것만이 싱가포르의 모습일까요? 이주민이 건설한 이민자 국가로, 여전히 다양한 이민자가 몰려들어오는 싱가포르는 또 한편으로 이민자 혐오가 매우 강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주로 가정부로 고용되는 여성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아주 심각하죠. 2016년에는 한 이주노동자 가정부가 굶주림과 괴롭힘 끝에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2021년 11월 UN 인종차별 철폐 위원회(CERD Committee)는 가정부를 포함한 이주노동자의 인권 보호를 위한 싱가포르 정부의 강력한 조치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발달한 금융업과 서비스업, 높게 솟은 빌딩과 북적이는 항만은 우리가 생각하는 싱가포르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강력한 국가의 통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언론사, 건설사, 증권사 등 대부분의 대기업을 정부나 초대 총리 리콴유 일가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기업국가라 말할 수 있겠죠.

국영 기업이 대부분의 주택을 건설하며 국민들의 주택 문제를 해소하고 있지만,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근본적인 정책 마련은 여전히 미진합니다. 서민과 부유층, 일반 국민들과 금융권 사이 소득격차도 아주 큰 편입니다.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보호정책도 없어, 싱가포르에는 최저임금 제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평균 노동시간은 한국보다 길죠.

국민들에게 갖가지 이유로 벌금을 물리며 생활을 통제하는 것은 유명합니다. 덕분에 '벌금'과 '좋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영단어 'Fine'을 사용해, "Fine City Singapore"라는 중의적인 별명까지 붙었습니다. 깨끗한 거리의 뒷면에는, 국민들의 껌 씹는 행위조차 통제하려 든 경찰국가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사소한 경범죄 단속은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처벌 규정은 남아있습니다.
 
공원에 걸린 금지 푯말
 공원에 걸린 금지 푯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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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엄벌주의 역시 유명합니다. 현재까지 태형이 존재하는 국가죠. 사형 역시 매우 빈번하게 집행되고 있습니다. 90년대까지는 사형 집행이 언제나 두 자릿수를 기록했죠. 지난해에도 마약사범 11명이 사형대에 올랐습니다.

범죄의 가능성만으로도 재판과 영장 없이 용의자를 구금할 수 있는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도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언론에 대한 검열도 심각해서, 언론자유지수는 2022년 기준 139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싱가포르 의회는 언제나 인민행동당이 압도적 다수를 장악하지요. 언론 통제, 독재적 경제정책, 야당에 대한 탄압, 게리맨더링을 동원한 인민행동당은 결코 정권을 놓치지 않습니다. 2000년대 이후 인민행동당의 득표율은 60% 선에 불과하지만, 실제 의석은 언제나 80% 가까이를 장악해 왔습니다. 그렇게 지금은 초대 총리 리콴유의 아들인 리센룽이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죠.
 
싱가포르 국회의사당
 싱가포르 국회의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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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싱가포르의 상황을 빗대, 미국의 작가 윌리엄 깁슨은 싱가포르를 "사형제도가 있는 디즈니랜드"라 칭하기도 했습니다. 싱가포르 정부로서는 매우 불쾌한 표현이겠죠. 하지만 2013년에도 싱가포르 정부는 리틀 인디아 지역에서 발생한 폭동에 특수작전부대를 투입하며 대응했습니다.

국립박물관 매표소에서 들은 유창한 영어만큼이나, 국립박물관의 전시는 싱가포르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한쪽에는 리콴유의 연설 영상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고, 경제 성장과 발전에 대한 찬사가 가득합니다.

서울이나 타이페이와 유사한 풍경이라고 말했지만, 박물관 안에서만큼은 그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전시에 무언가 비어 있다는 느낌. 서울이나 타이페이라면 국립박물관의 전시를 이렇게 마무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 있었던 무언가가 지워져, 그 공백을 메우지 못한 느낌. 박물관을 나와 본 거리의 풍경도 무언가 달라진 것 같았습니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운명"
 
국립박물관에서 반복 재생되는 리콴유의 연설
 국립박물관에서 반복 재생되는 리콴유의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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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을 두고, 1994년 리콴유 총리는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문화는 곧 운명"이며, 아시아에는 아시아의 문화에 맞는 정치체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서구적 민주주의를 아시아에 그대로 이식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이에 한국의 김대중 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은 같은 잡지에 이를 반박하는 글을 싣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에서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도록 혀용된 적은 있는가."

이 글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아시아에는 아직 해내야 할 일이 많이 있다. 우리는 시급히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인권을 개선해야 한다. 여기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요소는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지도자들과 변명자들의 저항이다. (…) 문화가 반드시 우리의 운명일 수만은 없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
 
머라이언 공원
 머라이언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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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저는 리콴유와 김대중의 논쟁이야말로 현대 아시아 국가의 갈 길을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길을 따랐고, 한국의 김대중 이사장은 곧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종종, 한국의 진정한 체제 경쟁 상대는 북한이 아니라 싱가포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싱가포르의 강변을 걸으며, 오랜만에 한국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묘하게 닮아 있지만, 놀랍게도 다른 풍경의 두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논쟁 이후 30여 년이 흘렀고, 리콴유도 김대중도 이제는 역사 속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아시아의 시민들은 긴 겨울을 견디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변명자들의 저항'에 맞서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운명"이라 다짐처럼 되뇌이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나라의 체제 경쟁은, 그렇게 아직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시아 각지의 리콴유나 김대중과 함께 말이죠.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싱가포르, #리콴유,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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