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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기자말]
민족혁명당으로 돌아오다

1936년 6~7월경 재건 한국독립당은 다시 한 번 분열에 휩싸였다. 이번에도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후원금이 문제가 됐다. 중국 장쑤성 주석 천궈푸(陳果夫)로부터 받은 후원금을 당에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창세와 조소앙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박 : "후원금으로 500원을 더 받았는데 왜 당에 바치지 않은 거요?"
조 : "내가 받은 돈은 160원이 전부요."


말다툼 끝에 박창세는 당시 회계를 맡고 있던 문일민과 함께 조소앙으로부터 200원을 강탈한 뒤 재건 한독당에서 도로 탈당해버렸다. 흡사 4년 전 금전 문제를 두고 일어났던 항저우 판공처 습격 사건의 재연이었다.

재건 한독당을 탈당한 두 사람은 민족혁명당으로 복당했다. 복귀한 문일민은 친일파 암살 공작을 꾀하는 등 다시 한 번 의열투쟁에 나섰다. 상하이 조선인거류민회장 이갑녕에 대한 저격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것이다.

이갑녕은 일본 외무성의 촉탁(囑託)으로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이에 민혁당 지도부는 이갑녕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1937년 11월 11일 상하이 공동조계에 위치한 카페 난데스카(ナンデスカ)에서 당원 최영식으로 하여금 이갑녕을 저격하게 했다.

최영식은 사건 전날 문일민·김동우·안지청 등 민혁당 간부들에게 이갑녕이 온다는 소식을 보고했다. 다음 날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소속 김현수와 함께 현장으로 간 최영식은 카페 웨이터로 위장한 뒤 이갑녕을 권총으로 저격, 총상을 입히고 도주했다.

이때 문일민이 구체적으로 어느 선까지 개입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해당 사건이 민혁당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결행된 사건이라는 점, 최영식이 사전에 문일민 등에게 보고했다는 점에서 계획부터 실행까지 세세한 지시 내지는 조언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7년 11월 1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상하이 조선인거류민회장 이갑녕 저격 사건. 이갑녕은 일본 외무성의 촉탁으로 활동한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1937년 11월 1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상하이 조선인거류민회장 이갑녕 저격 사건. 이갑녕은 일본 외무성의 촉탁으로 활동한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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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여파로 피난길에 오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은 마침내 국민당 수도였던 난징까지 점령했다. 국민당의 피난 명령에 따라 난징에 있던 민혁당 본부도 피난길에 올랐다.

11월 24일 김원봉 등 민혁당 수뇌부를 비롯한 90여 명 대가족이 민간 선박 5척에 나눠 타고 한커우(漢口)를 향해 출발했다. 배는 주장(九江)-이창(宜昌)-한커우-완현(萬縣)-스바오사이(石寶賽) 등을 거쳐 이듬해 3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충칭에 도착했다.

배에는 민혁당원이 아닌 일반 동포들도 함께 탑승하고 있었다. 민혁당원 임득산이 운영하는 만년필 상점 직원 이초생이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배가 한커우에 잠시 정박하고 있던 12월 17일경 문일민은 이초생이 탄 배로 넘어와 갑판으로 그를 불러냈다. 그리고 "중국 국민정부의 원조를 받고 있는 민혁당에 가입하면 신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며 넌지시 입당을 권유했다. 이초생은 문일민의 권유에 설득되어 민혁당에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이후 김원봉 등의 주요 간부들은 한커우에 남아 본부를 설치했고, 문일민 등 나머지 인원은 다시 충칭을 향해 출발했다. 1938년 3월 14일 충칭에 도착한 이들은 곧바로 민혁당의 지부로서 충칭구(重慶區) 당부(黨部)를 설치했다. 구 당부는 중앙에 속하는 지방최고기관이었다. 이때 문일민은 민혁당 입당 관련 실무를 담당했다.

충칭구 당부는 세포조직으로 소조회(小組會)를 결성하여 국제정세 및 시사 문제를 토의하는 한편 각종 시위를 주도했다. 1938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맞아 충칭시 정부가 관민합동으로 주최한 메이데이 시위에 민혁당 당기를 세우고 참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시위에 참여한 문일민 등의 민혁당원들은 아래와 같은 구호를 부르짖으며 사실상 항일시위를 전개했다.

"중·한이 합작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데는 단결의 힘이 필요하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라!"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내라!"
"일본 타도!"
"간첩을 괴멸하자!"

 
민족혁명당기. 붉은색은 심장의 혈색(血色)으로 열렬 능동의 뜻을 취하여 자유를 의미한다. 푸른색은 대공(大空)의 색으로 보통 공정한 뜻을 취하여 평등을 의미한다. 흰색(白色)은 일광(日光)의 색으로 방사광명(放射光明)의 뜻을 취하여 발전을 의미한다.
 민족혁명당기. 붉은색은 심장의 혈색(血色)으로 열렬 능동의 뜻을 취하여 자유를 의미한다. 푸른색은 대공(大空)의 색으로 보통 공정한 뜻을 취하여 평등을 의미한다. 흰색(白色)은 일광(日光)의 색으로 방사광명(放射光明)의 뜻을 취하여 발전을 의미한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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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당 해외전권위원회 참여

그런데 1939년 3월 문일민은 돌연 민혁당을 탈당했다. 이는 소조회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당시 소조회에서는 문일민이 몰래 한국국민당의 김구와 내통하며 당의 비밀을 누설했다며 경고를 부여했다. 이에 분노한 문일민은 "당의 비밀을 누설한 사실이 없다"고 항의하며 탈당해버린 것이다.

이후 문일민은 신공제·강창제 등 민혁당을 탈당한 이들과 조선민족당 해외전권위원회(朝鮮民族黨 海外全權委員會) 조직에 참여했다. 해외전권위원회는 1940년을 전후하여 신공제 등이 '제3세력'을 표방하며 조직한 군소정당으로 정강·결성 시기 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창당 직후로 추정되는 시점(1940년 8월 22일)에 신공제가 중국 국민당 주자화(朱家驊)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어 해당 조직의 탄생 배경과 활동 목표를 가늠해볼 수는 있다. 당시 신공제는 한국 독립운동 진영이 끊임없는 이합집산으로 끝내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자신들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 15개항으로 구성된 '중한혁명연합호조공약' 체결 등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호소했다. 해당 조약의 핵심은 군대 양성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합법적 교전단체로 승인하고 '조선민족혁명군'을 조직해 대일작전에 정식으로 참전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사관학교 설립 및 기술적·경제적 원조 제공, 임시로 중국군 20개 사단을 차출하여 편성한 뒤 지휘권은 한국인 군관이 행사할 것 등을 제안했다.

이에 대한 중국 당국의 반응은 알 수 없다. 실제로 이러한 조약이 체결됐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해외전권위원회는 1943년 1월 8일 충칭에서 열린 통합회의 결과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한국독립당 통일동지회와 함께 민혁당에 편입되기로 결정됐다. 해외전권위원회가 민혁당으로 흡수되면서 문일민 역시 자연스럽게 민혁당으로 복당했다. 문일민에게는 두 번째 복당이었다.
 
1943년 2월 15~20일 사이 충칭에서 열린 조선민족혁명당 제7차 전당대표대회 당시 새로이 조직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집행부 임원들의 사진. (빨간색 원이 문일민) 아래 김규식과 김원봉의 얼굴도 보인다. 대구대 김영범 교수의 논문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출처: 김영범,「혼벡(Hornbeck)문서군 속의 韓吉洙 서한과 조선의용대·조선민족혁명당 사진」, 『한국근현대사연구』96, 한국근현대사학회, 2021)
 1943년 2월 15~20일 사이 충칭에서 열린 조선민족혁명당 제7차 전당대표대회 당시 새로이 조직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집행부 임원들의 사진. (빨간색 원이 문일민) 아래 김규식과 김원봉의 얼굴도 보인다. 대구대 김영범 교수의 논문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출처: 김영범,「혼벡(Hornbeck)문서군 속의 韓吉洙 서한과 조선의용대·조선민족혁명당 사진」, 『한국근현대사연구』96, 한국근현대사학회, 2021)
ⓒ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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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김정명 편, <朝鮮獨立運動>2, 原書房, 196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26·33·37, 국사편찬위원회, 2008·2009
<자료 한국독립운동>1,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1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46, 국사편찬위원회, 2001.
신주백,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 선인, 2005

태그:#문일민, #무강문일민평전, #민족혁명당, #조선민족당, #한국독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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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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