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70년대의 옛날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중·장년 영화팬이라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배우 윤정희를 기억할 것이다. 문희, 고 남정임님과 함께 '1세대 여성배우 트로이카'를 형성하며 큰 사랑을 받은 윤정희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충무로를 대표하는 여성 배우로 맹활약했다. 특히 청룡영화제 인기상 7회 수상의 대기록은 다른 배우들이 쉽게 넘볼 수 없는 윤정희의 위업이다.

1994년 <만무방> 이후 한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었던 윤정희는 지난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신작 <시>를 통해 무려 16년 만에 컴백했다. 오랜 공백을 깨고 돌아온 노장 배우의 복귀에 영화계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섞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윤정희는 <시>를 통해 청룡영화제, 대종상영화제, 씨네 마닐라영화제, LA비평가협회상 등 국내외 4개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야말로 노장배우의 건재를 과시한 것이다.

이처럼 구력이 있는 배우들은 한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거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서 잠시 벗어나 있다 해도 언제든 다시 관객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내공을 숨기고 있다. 젊은 관객들에게는 호아킨 피닉스와 고 히스 레저 이전의 조커로 유명한 잭 니콜슨 역시 마찬가지. 1990년대 들어 대표작을 만나지 못하며 한물갔다고 평가 받았던 잭 니콜슨은 1997년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통해 통산 3번째로 아카데미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국내에서도 서울에서만 30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국내에서도 서울에서만 30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 워터홀컴퍼니(주)

 
할리우드 최고의 성격파 배우 잭 니콜슨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버림 받고 할머니 손에서 성장한 잭 니콜슨은 1960년대 초반부터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데뷔 10년 만에 <이지 라이더>를 통해 골든 글러브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잭 니콜슨은 <차이나 타운>으로 골든글러브 남우주연상, <마지막 지령>으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대중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은 그의 첫 번째 대표작은 역시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였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정신병 환자 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잭 니콜슨은 골든 글러브와 아카데미를 포함해 무려 5개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독식하며 최고의 배우로 떠올랐다. 1984년 <애정의 조건>을 통해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트로피(남우 조연상)를 차지한 잭 니콜슨은 1989년 팀 버튼 감독이 연출한 <배트맨>에서 조커를 연기했다. 많은 관객들이 히스 레저와 호아킨 피닉스로 조커를 기억하지만 니콜슨의 조커 연기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어 퓨 굿 맨>을 기점으로 다작을 시작한 잭 니콜슨은 <호파>와 <맨 트러블>로 1993년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 최악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비록 그해 최악의 남우주연상은 <엄마는 해결사>의 실베스타 스텔론에게 돌아갔지만 아카데미 트로피를 2개나 가진 최고의 연기파 배우 잭 니콜슨이 최악의 남우주연상후보에 올랐다는 것은 대단히 굴욕적인 결과였다.  

이후 잭 니콜슨은 <울프> <화성침공> 등에 출연했지만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진 못했고 LA레이커스 홈 경기장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얼굴이 됐다. 하지만 잭 니콜슨의 내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니콜슨은 1997년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괴팍한 로맨스 소설가를 연기하며 생애 3번째 아카데미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세계적으로 3억 1400만 달러의 성적을 올리며 흥행에도 성공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3번째 아카데미 트로피를 차지하며 할리우드의 거물로 우뚝 선 니콜슨은 2000년대에도 <어바웃 슈미트> <성질 죽이기>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디파티드> <버킷리스트 –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등에서 명불허전의 연기를 선보였다. 어느덧 만 84세가 된 잭 니콜슨은 2010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제임스 L.브룩스 감독이 만든 <에브리띵 유브 갓>을 마지막으로 10년 넘게 작품 활동을 쉬고 있다.

개 때문에 눈물 흘리는 남자가 된 강박증 환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두 주연배우는 199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녀 주연상을 휩쓸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두 주연배우는 199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녀 주연상을 휩쓸었다. ⓒ 워터홀컴퍼니(주)

 
사람의 성격이나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평생 같은 습관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온 노인들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리며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하는 멜빈 유달(잭 니콜슨 분)도 평생 같은 습관으로 살아온 강박증 환자다(그의 직업은 놀랍게도 꽤 잘 나가는 로맨스 소설가다).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멜빈의 유별난 성격은 우연히 맡게 된 이웃집 강아지에 의해 조금씩 변하게 된다. 멜빈은 밥을 먹지 않는 강아지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베이컨으로 강아지를 유혹한다. 강아지를 주인 사이몬(그렉 키니어 분)에게 돌려준 후 허탈한 마음에 혼자 피아노를 치며 눈물을 보인 멜빈은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이렇게 절규한다. "내가 강아지 때문에 울다니!!"

강아지를 통해 성격이 한껏 부드러워진 멜빈은 자신의 집에 노크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이웃에 사는 게이 화가 사이몬과의 관계도 차츰 좋아진다. 특히 파산하고 우울증에 빠져 있는 사이몬을 도와주기 위해 베이컨을 이용해 강아지를 불러내는 방법을 가르쳐줄 때 보여준 잭 니콜슨의 표정연기가 압권이다(하지만 강아지는 눈치 없이 주인이 아닌 멜빈의 품에 안기며 사이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이웃과의 관계회복을 통한 멜빈의 성격변화도 재밌지만 역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백미는 멜빈과 캐롤(헬렌 헌트 분)이 보여주는 중·장년의 풋풋한 로맨스다. 이 영화의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된 이유다. 특히 정장을 급하게 차려 입은 멜빈이 캐롤에게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했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 어떤 멜로 영화의 고백장면보다 로맨틱하다(하지만 멜빈은 금방 말실수를 해 캐롤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사이몬의 충고에 따라 캐롤에게 달려간 멜빈은 새벽 산책을 제안하면서 "나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당신께 감사하는 유일한 사람일지 몰라. 당신이 하는 모든 면이 얼마나 놀라운지 아는 사람. 내가 당신을 안다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기분 좋은 일이야"라는 로맨틱한 대사들을 쏟아낸다(로맨스 소설 작가라서 작업 멘트 날리는 게 꽤나 익숙하다). 멜빈, 그리고 캐롤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괴팍한 멜빈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말동무
 
 그렉 키니어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인간적인 성소수자 연기를 통해 관객들의 뜨거운 지지를 얻었다.

그렉 키니어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인간적인 성소수자 연기를 통해 관객들의 뜨거운 지지를 얻었다. ⓒ 워터홀컴퍼니(주)

 
캐롤은 맨하튼에 있는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며 힘들게 먹고 사는 싱글맘이다. 하지만 멜빈에게 캐롤은 자신의 괴팍한 행동을 모두 이해하고 맘 편히 이야기를 터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다. 그렇게 멜빈과 캐롤은 위태로우면서도 풋풋한 중·장년(멜빈에게는 노년인가)의 썸을 타기 시작한다. 

캐롤을 연기한 배우 헬렌 헌트는 TV시리즈 <결혼이야기>로 4년 연속 미배우 조합상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1회 수상). 국내에서는 얀 드봉 감독의 <트위스터>로 유명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이후 <왓 위민 윈트> <캐스트 어웨이> 등에 출연한 헌트는 2012년 <세션 :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을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녀가 감독, 각본, 주연을 맡은 <라이드>는 2015년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성소수자이기도 한 화가 사이몬은 멜빈이 강아지를 쓰레기 통로로 버리면서 멜빈과 갈등을 빚는 이웃으로 등장한다. 강도의 습격을 당하고 파산한 후에는 멜빈과 급격히 사이가 좋아지면서 묘한 브로맨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사이몬은 멜빈이 캐롤과 헤어진 후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잖아요.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세요"라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사이몬을 연기한 배우 그렉 키니어는 1995년 시드니 폴락 감독의 <사브리나>를 통해 주목 받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로 아카데미와 골든 글러브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키니어는 <유브 갓 메일> <썸원 라이크 유>같은 로맨스물 뿐만 아니라 <위 워 솔저스> <언노운> <그린존>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했다. 작년에 개봉한 <미스비헤이비어>에서는 유명 코미디언 밥 호프를 연기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잭 니콜슨 헬렌 헌트 그렉 키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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