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5월 3일의(에) 돌아가셨어요. 도와주세요."
지난 5월 무렵, 발달장애를 앓는 최OO씨는 함께 살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자 석 달 넘게 홀로 곁을 지키다 거리로 나섰다. 전기가 끊기고 먹을 것도 떨어졌지만 그가 집을 떠날 때까지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에겐 가족의 처지를 알릴 그 누군가도, 방법도 없었던 것.
집을 나온 그는 한참을 걸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전철역 입구에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그가 집을 나서기로 마음먹고 또박또박 어렵게 썼을 저 부고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끔 그의 앞에서 발길을 멈춘 이들도 지폐 몇 장을 떨구고 갈 뿐...
그렇게 석 달을 거리를 떠돌던 그는 어느 사회복지사의 눈에 띄었다. 사회복지사가 말을 붙여보지만 마치 세상에 없던 존재마냥 집에만 머물던 그는 "싫어요. 저는 유괴범, 납치범한테 안 갈 거예요"라며 곁을 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이 적힌 문구가 마음에 걸렸던 사회복지사가 30분 넘게 쪼그리고 앉아 마음을 열어보려 애를 쓴 뒤에야 그는 겨우 마음을 열었고, 두 모자의 비극은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 9일 세상을 떠난 지 여섯 달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도와달라는데 사람들은 왜 1000원씩만 주는 거예요?"
차가운 바닥에 앉아 석 달 넘게 지내는 내내 그는 궁금했다. 왜 아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묻지 않는지. 왜 돈만 던져두고 그냥 지나가는지. 정작 필요한 건 그게 아닌데... 어쩌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우리의 복지 현장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국가 복지 체계
세상은 또 한 번 발칵 뒤집어진 것처럼 보인다.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더는 미뤄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다시 높아졌다. 기초수급자였던 그의 어머니가 한참이나 연락이 끊긴 딸이 있어 일자리를 잃은 지 2년이 지나도록 의료비나 생계비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부양의무자 기준이 사라지면 더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리의 복지 서비스는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 공무원이나 자문가들은 선별된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드러난 욕구를 측정하고 장관급 인사의 공약에 대한 대응책으로 새로운 서비스나 조직 개편을 결정한다. 문서상 그럴 듯해 보이는 논리에 따라 보고서와 예산이 만들어지고, 뜬금없이 요란한 홍보와 함께 새로운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뭔가 활발히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줄 건물의 개소식, 리본 커팅이 병행되면 금상첨화다. 결과는 거의 언제나 고비용의 실패이다. (28쪽)
우리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영국 얘기다. <래디컬 헬프>(2020, 착한책가게)라는 책에 담긴 영국 복지의 민낯이다. 이 책을 쓴 힐러리 코텀은 "(영국) 복지제도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영국은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라 불리는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내놓으며 거대한 사회적 전환의 첫 발을 내딛었던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지은이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고안되었던 일련의 기관과 서비스는 이제 낡은 것이 되었고 개선이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정말 그럴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응급상황에 적절히 지원하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좋은 삶을 살도록 해주지도 못하고, 외로움에서 요지부동의 빈곤문제에 이르기까지, 변화하는 일자리의 세계에서 비만과 우울의 확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광범위한 현대의 문제들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33쪽)
이 한 문장에 오늘날 영국이, 아닌 모든 나라가 겪고 있는 복지의 위기가 담겨있다. 외로움, 빈곤, 일자리, 비만과 우울... 이런 '현대의 문제들' 앞에서 복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뇨, 비만, 암 그리고 정신질환 등의 만성질환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영국에서만 1500만 명이 고통 받고 있다. 1940년대엔 당뇨라는 진단명조차 없었는데 말이다. 보건의료 지출의 70%가 이들에게 쓰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이 만성질환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또 노인 인구가 늘자 정부는 이 값비싼 비용을 시장에 떠넘겼고, 1900개에 달하는 민간 업체들은 다시 이 일을 미숙련 노동자들에게 싼값에 맡기면서 마치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듯 이들을 15분마다 다른 집으로 보내고 있다(영화 <미안해요, 리키>에도 잘 나온다).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만 가는 가난과 불평등으로 영국에서만 125만 명이 극빈층으로 내몰렸고, 아동의 3분의 1이 이들 빈곤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 이 모두가 세계에서 다섯 번째 경제 대국으로 꼽히는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새로운 복지 실험들
힐러리 코텀은 더는 작동하지 않는 영국의 복지 체계를 근본부터 바꾸고자 2006년 파티서플(participle)이란 단체를 세우고 지난 10년간 크고 작은 대안들을 만들어왔다. 책 제목처럼 '근본적 도움'을 줄 수 있는 해법 말이다. 책에는 이들 복지 실험의 성공과 실패가 고스란히 담겼다. 어떤 실험들이었을까.
책에 나오는 엘라 가족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엘라는 네 아이를 홀로 키운다. 미성년자인 네 아이들 모두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지 않거나 임신을 했거나 스스로 화를 못 이겨 벽에 머리를 찧는다. 둘은 퇴학을 당해 온종일 집에만 머문다. 그렇다고 엘라만 탓할 수도 없다. 어릴 적 양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고 자란 엘라는 이제껏 한 번도 일자리를 가져보지 못했다. 게다가 친구도 거의 없어 힘들 때 의지할 곳도 없다. 엘라는 삶이 지옥 같다고 말한다.
엘라 가정에도 복지의 손길은 닿고 있다. 경찰, 사회복지사, 가정방문 학습지도자, 주거지원 담당자, 상담사, 보건담당자 그리고 그밖에도 엘라 가족의 '복지'를 맡은 많은 이들이 가끔씩 엘라의 집을 찾는다. 다 꼽아보니 무려 73명의 전문가들과 20개의 서로 다른 기관·서비스 부서가 함께 일하고 있고, 여기에 들어가는 돈은 해마다 25만 파운드(약 3억 7000만 원)에 달한다. '도와달라는데 사람들은 왜 1000원씩만 주고 가냐'던 최씨의 물음이 겹친다.
(엘라는) 수십 년간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 회의, 제재, 의뢰, 또 회의를 거치다 보니 차라리 그냥 혼자 있게 내버려 두었으면 싶어졌다. 엘라는 '복지당국'이 자기 삶에서 나가주기를 바란다. (29쪽)
힐러리 코텀과 파티서플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엘라 가족이 처한 현실에서부터 새롭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기존의 서비스와 제도들을 어떻게 손 볼 것인지를 찾기보다 엘라의 가족 곁으로 다가가 '변화를 만들어내려면 어떻게 도우면 될지'를 먼저 물었다.
무엇이 삶의 문제를 불러일으키며 문제의 밑바닥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근본에 대한 탐색에서부터 시작한다... 엘라의 집 소파에 앉아서 나는 묻는다. 우리가 함께 무엇을 바꿔야 할지,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고 누가 우리를 도울 수 있을지. (37쪽)
그러고 나서는 가족들 각자가 자신의 삶을 돌보며 스스로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지원했다... 이런 식으로, 가족들은 삶에 활기를 찾고 그들 자신의 더 넓은 삶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았다. (264쪽)
지은이는 무엇보다 "이 새로운 접근법의 중심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맞닿음, 즉 연결이 있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들 사이, 나아가 지역 사회와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는 가운데 함께 배우고 일하면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도록 뒷받침하는 게 이 새로운 돌봄 체계의 핵심인 셈이다.
베버리지 넘어서는 또 한 번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책에는 모두 다섯 개의 대담한 복지 실험들이 등장한다.
엘라 가족처럼 여러 어려움을 겪는 가정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을 키우는 라이프(life), 청소년들이 지역 사회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루프스(loops), 실업자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찾아주는 베커(backr), 만성질환자들이 건강한 삶을 살도록 돕는 웰로그램(wellogram), 그리고 외로운 노인들이 서로서로를 돌볼 수 있도록 하는 서클(circle) 등이 그것이다.
[관련 글 : 영국의 공동체 돌봄(커뮤니티케어) 체계 서클(Circle), 그 뒷 이야기]
코로나19 사태로 우리 복지 체계의 감춰졌던 그늘이 모습을 드러낸 오늘, 10년간 지역 사회를 터전 삼아 진행한 이들 실험들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나는 이제까지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단단한 인간관계를 통해 지지 받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배웠다. 단순하고 쉽게 협력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니 사람들이 기꺼이 참여했다... 인간관계가 크나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데도 우리의 현 복지당국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려 하지 않는다. (37쪽)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부양의무자 기준은 마땅히 없애야 한다. 하지만 제도의 허점을 메운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으로부터 고립돼있던 최씨와 그의 어머니에겐 어쩌면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비슷한 일이 닥쳤을지 모른다. 통장으로 생계급여나 의료급여가 들어온다 한들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최씨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아마 십 수 년 뒤라도 그는 똑같이 거리로 나서야 했을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버리지는 첫 보고서를 낸 4년 뒤에 또 다른 보고서를 내면서 자신이 국가의 역할만을 앞세운 나머지 시민과 지역 사회의 힘을 너무 낮춰봤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베버리지는) 욕구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고안해내는 데는 거리를 둔 차가운 위계조직보다 지역사회가 훨씬 낫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베버리지는 복지제도를 설계하면서 사람과 관계를 빼놓았던 것이다. (69쪽)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뒤늦은 후회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만약 첫 복지국가의 청사진에 '사람'과 '관계'도 함께 담겼다면 어땠을까. 오늘날 우리의 복지 체계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부디 근본적 전환으로 나아갈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책을 쓴 힐러리 코텀은 세계적 명성을 얻은 사회활동가이자 사회적기업가, 혁신가다. 세계경제포럼의 차세대 글로벌 리더로 선정된 데 이어 2020년에는 영국 복지제도에 기여한 공로로 왕실에서 수여하는 명예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