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종전 40주년에 맞춰 '안병찬과 동행하는 하노이-호찌민 통일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4월 26일부터 1주일 동안 베트남에 다녀왔다. 안병찬은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해방 당시 사이공(현 호찌민)의 최후를 기록한 한국일보 특파원이었다. 그와의 '동행'에는 베트남전 당시 주월사령부 보안대 근무자(유재만 아리랑명품관 대표)와 베트남 학교의 오랜 후원자(이충범 정해 한-베우호협회 이사장), 그리고 국제적 시각의 해외 교민신문 발행인(정준성 한국-알제리 역사연구소 원장) 등이 함께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과 동행하면서 취재한 관찰과 기록은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성찰한 것이다. 그것은 '씬 라이(Xin loi, 미안) 베트남'과 '씬 차오(Xin chao, 안녕) 베트남'이라는 두 가지 시선에서 바라본 것이다. 베트남 해방 40주년에 즈음해 현지에서 본 두 나라의 불행했던 과거와 역동적인 현재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말] |
한국과 베트남은 닮은 점이 많다. 일본과 함께 중국의 영향력이 강한 한자 문화권 국가다.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과 외세의 침략, 식민 지배와 분단의 경험을 공유한다. 냉전의 희생양이 되어 분단된 남북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은 것도 닮은 꼴이다.
두 전쟁 모두 미국이 개입했다. 미국과 소련-중국의 대리전 양상을 띤 6·25 한국전쟁은 '승자없는 전쟁'으로 끝났다. 한국이 미국의 동맹군으로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는 점이 다르다.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민간인 학살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지난 4월 베트남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국군 주둔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 두 사람이 한국을 찾았다. '런 아저씨'는 1966년 2~3월에 걸쳐 1004명이 죽은 빈안 학살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다. '탄 아줌마'는 8살 때인 1968년 2월 12일 주민 74명이 희생된 퐁니-퐁넛마을 학살에서 어머니와 남동생, 언니, 이모, 조카 등 가족 다섯 명을 잃었다.
퐁니마을의 처참한 흔적은 근처에서 남베트남 민병대와 함께 작전 중인 미 해병 제3상륙전부대 연합작전중대 소속 본(Vaughn) 상병의 카메라에 기록되었다. 정보 수집 및 관측이 주 임무였던 본 상병이 얼떨결에 현장을 목격해 카메라로 찍은 20여 장의 사진은 미군 상급부대 보고서에 첨부된 뒤, 주월 미군사령부와 미 대사관을 거쳐 국무부와 국방부까지 올라갔다.
이 사진들은 전쟁 범죄의 증거 자료로 한국 정부에 전달되었으며, 1970년 2월 미 의회의 사이밍턴 청문회를 앞두고 미국이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도 쓰였다. 이 사진들은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1999년 비밀 해제된 뒤 <한겨레21> 2000년 11월 23일자(제334호)에 처음 공개되었다(고경태, <1968년 2월 12일> 참조).
탄 아줌마와 런 아저씨는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대표 이해동, 아래 평화박물관)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 평화박물관에서 개최한 이재갑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4월 7일∼5월 7일, Space99)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재갑 사진작가는 7년간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남긴 흔적과 현지 주민의 삶을 기록해 왔다. 두 사람은 베트남 전역에 세워진 60여 개의 한국군 증오비와 함께 사진 속 주인공이기도 하다.
눈에 띄는 것은 주민들이 종전(1975년 4월 30일) 이듬해 꽝응아이성 빈손현 빈호아에 세운 한국군 증오비이다. 68년 1월 민간인 430명이 학살당한 곳이다. 이 증오비의 사연이 한국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99년 당시 호찌민대 유학생이었던 구수정씨에 의해서였다.
장방형으로 된 거대한 시멘트 제단 위에 'CAN THU'라고 쓰여 있다. 베트남어로 'CAN(깐)'은 '한(恨)', 'THU(투)'는 '수(讐)'를 뜻한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쓴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230명이 여성이었고, 109명이 노인이고, 182명이 아이들이었다. 그 중 7명은 임신부, 2명은 산채로 불태워지고, 80세 노인은 목이 잘려 들판에 널어놓았으며 한 명은 배가 갈라지고 두 명의 여성은 윤간을 당했고, 두 가족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몰살당했다.'베트남 참전 결정한 박정희는 영웅, 사과한 김대중은 간첩?두 사람은 참전군인 단체의 실력행사로 조계사 안에서 열기로 했던 리셉션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것으로도 성이 안 찬 것일까? 참전군인들이 그들이 묵고 있는 호텔로 몰려온다는 소식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해야 했다.
낯설고 두려운 '깐 투'의 땅에서 참전군인들(경찰 추산 700명)의 시위를 목격한 두 피해자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들의 한국 방문과 모든 일정에 동행한 구수정 박사(현 사회적기업 아맙 본부장)는 그 반응을 이렇게 전했다.
런 아저씨 : "전쟁도 격렬하지만, 평화도 격렬하구나."탄 아줌마 : "우리는 참전 한국군 아저씨들을 만나면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위로받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섭게 나오니 그날의 악몽이 또다시 생생하게 떠오른다."베트남전에 참전한 퇴역군인들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참전군인 단체들은 서울은 물론, 부산 등지에서 열린 초청간담회장 앞에서도 항의집회를 열어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종전된 지 40년이 지났지만,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교전 당사국인 미국을 포함한 국제 사회는 베트남전을 '더러운 전쟁'으로 규정해왔다. 그러나 한국군 참전의 정당성에 대한 맹신은 참전전우회의 홈페이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들에게 베트남전 참전을 결정한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대통령'이고,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과한 김대중은 여전히 '김일성의 고용간첩'이다(김대중은 2001년 8월 방한한 쩐 득 르엉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사과했다).
이들은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남긴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지침을 금과옥조로 내걸고 있다. 그러나 지난 4월 <프레시안>에 실린 한 참전군인의 회고담은 믿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런 기억으로 다가온다.
"이른 아침 우리 소대가 매복을 나갔지요. 한 번 나가면 종일입니다. 분대별로 흩어져 죽 때리다가 해가 져야 귀대하죠. 우리나라처럼 베트남 사람들도 산으로 나물을 캐거나 나무열매를 따러옵니다. 그러면 분대끼리 무전기를 때립니다. 여자 한 명이면 '식사 추진, 식사 추진, 1인분'이라고 하죠. 하하하! 남잔 보고 후 바로 쏩니다. 작전구역에 무단으로 침입했으니까요. 베트콩인 거죠. 하지만 여자는 안 쏘고 기다립니다. 매복지점 바로 앞까지. 그리곤 …. 덮치죠. 강간합니다. 집단으로 윤간합니다. 그럼 다른 매복조에서 무전을 막 때립니다. '너네만 먹냐. 이쪽으로 배달하지 않으면 우리가 먹으러 간다'고요. 소대장이 있지만 제지를 안 합니다. 못합니다. 사병들이 더 고참이고 M16을 가졌잖아요." - 윤효원, "여자는 '한 끼' 식사, 남자는 바로 쏴 죽였다"
윤효원이 참전군인에게 묻는다. 채명신 장군이 그랬다면서요? '100명의 베트콩을 포기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참전군인은 비웃는다. 군대 안 갔다 오신 모양이네, 장군들 하는 말 믿는 걸 보면.
"식사가 끝나면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그냥 쏴 죽입니다. 증거를 없애야 하니까. 중대엔 베트콩을 사살했다 보고하죠. 맨날 있던 일은 아니지만 잊을 수 없어요. 그래서 그 현장에 가서 기도를 하고 싶었어요. 용서해 달라고.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가족에게 할 수 있겠어요. 전우들을 만나도 할 수 없죠. 배척당합니다. 저도 고엽제 회원이지만 거기선 이런 이야긴 안 해요."한국군 고엽제 피해자가 묻는다, 나는 무엇인가'거기선 하면 안 되는 이야기'가 베트남 호찌민 시내에 있는 전쟁증적박물관(War Remnants Museum)에 가니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증적(證積)박물관은 전쟁을 '기념'하는 곳이 아니고 전쟁의 '증거'를 기록-보존한 곳이다.
베트남인들은 1975년 4월 30일 종전이 되자마자 베트남전 당시 미국 정보부 건물이 있던 이곳에 전쟁 범죄를 고발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미국 전쟁범죄 박물관'을 세웠다. 이곳은 베트남 현대사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을 가장 사실적으로 재현한 장소로 평가받는다. 1995년 미국과 수교 이후 현재의 명칭으로 바꿨다.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다양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 미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미 공군은 1961~1971년 베트남에 7200만 리터의 독성비(toxic rains)를 쏟아부었다. 그 가운데 4400만 리터가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였고, 그 안에는 170kg의 다이옥신이 포함되었다. 인구 1600만명 도시의 생명을 절멸시킬 수 있는 양이다.
<네이처> 지에 발표된 미 컬럼비아대 연구에 따르면, 베트남의 3851개 공동체와 210만~480만 명의 주민들이 직접 피해를 입었다. 베트남 정부는 이로 인해 300만∼480만 명이 암과 기형아 출산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박물관 2층의 한 전시관에는 베트남의 산과 들 그리고 주민들이 겪고 있는 고엽제 피해의 참상이 사진으로 전시돼 있다. 끔찍한 피해자 사진들 사이에 척추뼈가 드러날 만큼 앙상한 한 군인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이 눈에 띈다. 'Who am I?'(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What am I?'(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목으로 붙어 있다. 그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전쟁영웅도 범죄자도 아니고 역사의 희생자일 뿐이다. 내 몸뚱이는 고엽제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 고엽제 피해자1만5천 점의 증거자료 가운데 처음으로 등장하는 한국군이다. 그것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모든 전쟁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기 마련이다. 현실에서는 이런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대개의 전쟁에서 모든 행위자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그것이 전쟁의 속성이다. 그렇다. 한국군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그들은 대부분 박정희의 국가 동원에 의한 피해자이자, 미군이 베트남에서 실험한 비인도적 살상무기인 고엽제의 피해자이다.
4월 30일 오전 호찌민시의 통일궁(전 독립궁)과 레 주안 대로에서는 베트남 남부 해방 및 통일 40주년을 기념한 군사퍼레이드가 펄쳐졌다. 비슷한 시각 워싱턴에서는 아베 신조가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상하원 합동연설을 했다. '처음'이라는 의미 말고는 '울림'이 없었다.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책임 인정은 물론, 반성과 사죄도 없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지금 한국에 묻고 있다. 메르켈의 길을 갈 것인가, 아베의 길을 갈 것인가? 김대중의 길을 갈 것인가, 박정희의 길을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