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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수업까지 땡땡이 치고 가을 지리산으로 떠났습니다.
 학교 수업까지 땡땡이 치고 가을 지리산으로 떠났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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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홧기운 때문에 숨이 막혀 못살겠다!"
"누구 때문에 내가 화를 내는데... 못 살겠으면 집을 나가면 되겠네!"
"그래, 그럼 나가지!"

아내와 옳으니 그르니, 사느니 마느니 해가며 대판 싸웠습니다. 싸움의 종말이 그렇듯이 험한 말이 오가고 서로 상처만 입혔습니다. 그렇게 집을 나왔습니다. 가출한 셈이지요. 학교 수업까지 땡땡이치고 무작정 지리산으로 향했습니다. 모처럼만에 방과 후 수업을 하지 않게 될 아이들은 기분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니 무거운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집니다.

몇 년 전에도 가출했습니다. 아는 사람의 괜한 충고를 받아들여 어수룩하게도 한겨울에 전기밥솥까지 챙겨, 전기도 없는 지리산 자락에 들어가 오돌오돌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카메라 하나 달랑 들쳐 메고 길을 떠납니다.

무작정 지리산으로 접어들어 가... 어디로 갈까?

무작정 지리산으로 접어들어 갔습니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충남 공주에서 생활할 때 계룡산 갑사 산내 암자, 내원암에 있던 석호스님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스님과는 오래전부터 전화 통화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스님은 내가 결혼 전, 산 생활 할 무렵부터 20년 넘게 친구처럼 형제처럼 지내왔는데 2년 전부터 지리산 칠불사 선방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입니다. 

칠불사로 향하다가 문득 칠불사 길목에 자리한 범왕 근처 작은 암자에 머물고 계신다는 초은스님이 떠올랐습니다. 몇 해 전, 큰 절 살림을 다 접어두고 아픈 사람 마음자리 어루만져가며 욕심 없이 지리산에 들어가 수행에 몰두하고 계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느 골짜기에 머물고 계신지도 모르고 범왕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았습니다. 급경사를 올라 힘들게 그 이름조차 없는 암자를 찾았지만, 초은스님은 출타 중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석호스님이 있었습니다.

1년 전, 이미 칠불사 선방에서 나왔다는 석호스님은 예의 그 호탕한 웃음으로 반깁니다. 집 나온 사연을 이실직고했더니 장난기가 발동합니다.

"가출은 무슨 가출요! 쫓겨 나셨구먼!"
"뭐 그런 셈이죠..."

석호스님이 머물고 있는 암자가 비좁아 하룻밤조차 묵을 수 없습니다. 점심 공양을 하고 읍내에 볼 일이 있다는 석호스님을 따라나섭니다. 석호스님은 맘 편히 풀어놓고 기거할 수 있다는 불일암을 찾아가 보라며 지리산 쌍계사 부근에 자리한 국사암까지 안내합니다.

국사암에서 불일폭포가 있는 불일암까지 2킬로미터 정도. 산을 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등산화조차 없습니다. 평소 고무신을 싣고 다니는데 날이 쌀쌀해진 탓에 구두도 아니고 운동화도 아닌 단화를 신고 있습니다. 단화를 신고, 산행을 하게 될 판입니다. 그래도 2킬로미터 쯤은 가뿐하게 오를 수 있습니다. 문득 20년 전, 단화를 신고, 지리산 천왕봉까지 올랐던 기억이 나서 스님과 헤어지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립니다.

"가출하고 출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건 또 뭔 뚱딴지같은 소리요?"
"가출해서 뒤틀린 마음자리 추슬러 돌아가면 출가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그랬습니다. 20년 전, 범왕에서 가까운 삼정 마을 산속 어딘가에 토굴 생활을 하고 계신다는 초은스님을 찾아 헤맨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 출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고, 이번에는 출가가 아닌 가출을 하여 다시 초은스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가출과 출가의 앞뒤 말 차이처럼 20년이라는 시간이 찰라와 같습니다.

20년 전 역시 지금처럼 초은스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리산에서 사나흘 머물다가 내려와 인도 고행 길을 준비하다가 타고르에서 불화를 배우겠다며 인도행을 꿈꾸고 있던 아내를 만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도로 떠나기도 전에 큰 아이가 생겨 그 자리에 눌러앉아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둘 다 생각지도 않았던 결혼 생활이었기에 인도 고행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지리산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20년 전 푸른 산기운에 끌려 입산 출가를 꿈꾸었습니다.
 20년 전 푸른 산기운에 끌려 입산 출가를 꿈꾸었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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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스님과 헤어져 불일암을 향해 걸었습니다. 평일이라서 인적이 드뭅니다. 가을로 접어든 지리산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형형색색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울긋불긋한 나무들 사이로 멀리 푸른 산 기운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산을 오를수록 푸른 산 기운이 온몸을 감싸줍니다.

산을 오를수록 내게 '집을 나가라'고 했던 아내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녹아내립니다. 쥐뿔도 가진 게 없으면서 똥배짱만 내세우는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내, 아내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작정 나선 길이라서 핸드폰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예비 배터리며 충전기도 준비하지 않고 나왔습니다.

불일폭포 휴게소를 지나자 저만치서 폭포 소리가 들려옵니다. 폭포소리를 따라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다가 멀리 푸른 산 기운과 울긋불긋한 단풍에 홀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산을 내려오고 있는 스님이 인사를 합니다. 얼떨결에 합장하다가 밀짚모자 사이로 드러난 스님의 미소가 참 곱게 다가옵니다. 푸른 산 기운이 느껴집니다. 걸음을 멈추게 하여 몇 마디 주고받고 싶었는데 스님의 발걸음은 벌써 저만치에 가 있습니다. 

스님과 만난 자리에서 곧장 올라가니 불일암 표지판이 나옵니다. 내친걸음으로 불일암을 지나 점점 커져가는 폭포소리를 따라갑니다. 불일폭포. 가을 가뭄이라서 그런지 폭포의 물줄기는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폭 3미터 길이 60미터에 달한다는 폭포에서 내리는 물소리가 계곡 가득 울립니다.

폭 3미터, 길이 60미터의 지리산 불일폭포. 가을 가뭄으로 물줄기가 약합니다.
 폭 3미터, 길이 60미터의 지리산 불일폭포. 가을 가뭄으로 물줄기가 약합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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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폭포는 지리산 10경에 속한다고 합니다. 고려 제21대 희종이 폭포 입구에 있는 암자에서 정진 수도하는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덕망과 불심에 감동해 '불일 보조'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그의 시호를 따 이름 지어졌다고 전해집니다.

불일폭포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불일암을 찾아갔습니다. 암자에 들어서자마자 물을 찾았습니다. 선방과 대웅전 사이에 놓여 진 수조를 통해 흐르는 물 한 모금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달콤한 물이 또 있을까?

불일암 수조에 흐르는 달콤한 물. 이때까지 마셔본 물 중에서 이 만큼 달콤한 물은 처음 마셔보았습니다.
 불일암 수조에 흐르는 달콤한 물. 이때까지 마셔본 물 중에서 이 만큼 달콤한 물은 처음 마셔보았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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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불일암에 이틀을 머물면서 맛본 물맛이 내내 그랬습니다. 이때까지 마셔본 물 중에서 가장 달콤한 물이었습니다. 지리산 삼신봉 계곡을 타고 내려온 이 물은 불일폭포를 향해 흘러간다고 합니다.

불일암에는 저녁 무렵이라서 그런지 등산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불일암 현판이 내걸린 선방은 모두 3칸. 그 중 한 칸에서 경 읽는 소리가 들립니다. 문을 두들기고 스님을 부를까 하다가 그만두고 평상에 앉아 경 읽는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립니다.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수행터 였다는 불일암 전경. 198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지어졌다고 합니다.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수행터 였다는 불일암 전경. 198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지어졌다고 합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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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아담한 불일암 대웅전.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 역시 위압적이지 않고 소박하니 어여쁩니다. 이처럼 이쁜 대웅전은 처음 봅니다.
 작고 아담한 불일암 대웅전.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 역시 위압적이지 않고 소박하니 어여쁩니다. 이처럼 이쁜 대웅전은 처음 봅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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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암은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수행했던 자리라고 합니다. 뒤편에는 삼존불을 모신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은 아주 작습니다. 삼존불 역시 앙증맞을 만큼 작은 체구로 모셔져 있습니다. 물 맛에 반했듯이 이렇게 어여쁜 대웅전은 처음 봅니다. 위압감 없이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저절로 합장하게 됩니다. 선방과 대웅전 모두가 새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아주 소박해서 좋습니다.

후에 불일암 일용 스님에게서 들어 알게 된 것인데 불일암은 본래 상 중 하, 세 개의 암자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하불암만 남아 있는데 불일암이라 통칭해서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암자 또한 1980년초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지어졌다고 합니다.

불일암 앞으로 멀고 가까운 산들이 푸르게 펼쳐져 있습니다. 한 참 넋을 놓고 그 풍광에 푹 빠져 있는데 경 읽는 소리가 그칩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려 봅니다.

"스님 계십니까?"
"누구시죠?"

턱수염이 꺼칠한 처사 두 분이 얼굴을 내밉니다. 경을 읽고 있었던 처사인 모양입니다.

"석호스님 소개로 일용 스님을 뵈러 왔는데요."
"일용스님은 조금 전에 산을 내려가셨는데요?"
"아, 아까 사진 찍고 있을 때 그 스님이 일용스님..."
"예 그러실 겁니다. 그러잖아도 스님께서 방을 내드리라고 부탁하고 가셨습니다."

유교 공부를 하고 있다는 두 사람 중에 젊은 처사가 내가 묵을 선방으로 안내합니다. 짐을 풀어놓고, 사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달랑 카메라 가방 하나가 전부였으니까요.

물맛에 반했듯이 어여쁜 대웅전... 푸른 산 기운에 취해 담배도 잊고

불일암 선방에 앉아서 본 풍광. 멀리 구례 백운산 자락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불일암 선방에 앉아서 본 풍광. 멀리 구례 백운산 자락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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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지면서 불일암 앞에 초승달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노을이 지면서 불일암 앞에 초승달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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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묵을 선방은 가운데 방이었습니다. 묵을 방을 둘러보고 카메라를 챙겨 나왔습니다. 벌써 서산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습니다. 노을이 지면서 불일암 앞으로 초승달이 떠올랐습니다. 손톱만 한 초승달이 참 맑게 보입니다. 한참 동안 산과 어우러진 초승달을 바라보며 좌선하고 천천히 숨쉬기해봅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늘게 뜬 눈을 치켜 올리자 금세 사위는 어둠이 깔려있습니다.

젊은 처사가 준비한 저녁 공양 대접을 받고 방안에 들어 살며시 문을 열어 놓습니다. 그 틈으로 어둠이 성큼 다가옵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달빛과 별빛이 또렷하게 빛나고 불일폭포의 낙수치는 소리만 들립니다.

쏟아져 내리는 폭포소리와 별빛을 바라보다가 찬 공기에 한기를 느껴 문을 닫고 방 한가운데에 앉아 다시 좌선합니다. 그렇게 앉아 있다가 깜박 졸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립니다. 일용스님이 돌아왔습니다. 스님은 저녁 무렵이 되면 거의 매일같이 산을 오르내린다고 합니다. 포행 삼아 산길을 오르내리며 국사암에 들러 우편물이나 암자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스님이 내게서 담배 냄새를 맡았는지 좋은 웃음으로 암자에서 담배를 삼가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고 보니 하루에 한 갑 피우던 담배를 하루 종일 두 개비를 피운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다음날 역시 몰래 암자 해우소에서 한 개비를 피운 것이 전부였습니다.) 푸른 산 기운에 취해 담배 피우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마음자리가 편하면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까마득히 잊게 됩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것은 아내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녹아내렸던 것이기도 했고, 아내에게 함부로 대했던 내 스스로를 용서해가며 마음을 편히 가졌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법당에서 스님의 낭랑한 불경소리가 노랫가락처럼 들려옵니다. 저녁예불을 드리는 모양입니다. 목탁 반주에 맞춰 흥얼거리는 콧노래로 들려옵니다. 부처님들 앞에서 노래공양을 올리는 동자승처럼 천진무구하게 들려옵니다.

예불을 마친 스님이 선방으로 들어섰고 오랜 시간 계속되었던 옆방 유학자의 경 읽는 소리가 그치자 산문이 닫힌듯 고요합니다. 폭포소리만 들려옵니다. 한낮 등산객들의 흔적조차 가뭇없이 묻혀버립니다. 불일암을 감싸고 있다는 청학봉과 백학봉, 어디선가 청학과 백학이 날갯짓을 하며 불일암 주변을 맴돌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불일암에서 본 이른 아침 풍경.
 불일암에서 본 이른 아침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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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불일암 일용 스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얼굴 사진을 알리기를 거부하는 스님은 철저하게 오신체를 지키는 보기드문 수행자입니다.
 이른 아침 불일암 일용 스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얼굴 사진을 알리기를 거부하는 스님은 철저하게 오신체를 지키는 보기드문 수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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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이른 아침, 일용스님의 안내로 청학봉(불일암에서 볼 때 좌측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청학봉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계곡을 만났습니다. 가을 가뭄으로 계곡에는 물줄기가 미약했습니다. 이 계곡물은 저 멀리 삼신봉에까지 이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물이 곧바로 불일폭포로 낙수 치고 있습니다.

불일폭포 위에서 카메라를 고정했지만 수량이 적어 아쉽게도 낙수치는 물줄기가 잡히질 않았습니다. 저만치 아래로 어제저녁 다녀왔던 불일폭포 전망대가 보일 따름입니다. 불일폭포에서 흘러내리는 이 물줄기는 쌍계사 계곡을 거쳐 화개천에 이른다고 합니다.

불일폭포 위에서 본 전경. 가을 가뭄으로 물줄기가 미약해 폭포의 웅장함을 볼수 없없습니다.
 불일폭포 위에서 본 전경. 가을 가뭄으로 물줄기가 미약해 폭포의 웅장함을 볼수 없없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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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암에서 볼때 풍수의 좌청룡에 해당되는 왼편 봉우리인 청학봉. 거기서 본 불일암 전경.
 불일암에서 볼때 풍수의 좌청룡에 해당되는 왼편 봉우리인 청학봉. 거기서 본 불일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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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폭포를 둘러보고 청학봉에 오릅니다. 청학봉에서 멀리 불일암이 눈에 들어옵니다. 여전히 숲이 무성해 나뭇잎 사이로 겨우 보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절벽 위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앉아 있는 불일암이 좌선을 하고 있는 수행자처럼 보입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다시 불일암 오른편을 감싸고 있는 백학봉에 올랐습니다. 백학봉에서 바라본 불일암은 청학봉에서 바라본 것 보다 더 아슬아슬합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깎아지른 절벽위에 앉아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우뚝 솟은 백학봉이 머리 부분이라면 불일암이 앉아 있는 곳은 백학의 날개 부근이라고 합니다. 하여 불일암은 백학의 날개에 감싸 안겨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백학봉에서 본 불일암 전경. 깍아지른 절벽 위에 서 있는 불일암을 실감나게 합니다. 불일암에서 볼때 백학봉은 풍수에서 말하는 우백호에 해당됩니다.
 백학봉에서 본 불일암 전경. 깍아지른 절벽 위에 서 있는 불일암을 실감나게 합니다. 불일암에서 볼때 백학봉은 풍수에서 말하는 우백호에 해당됩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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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불일암과 불일폭포를 중심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풍수에서 좌청룡, 우백호 하듯, 불일암을 중심으로 좌측 봉우리를 청학봉, 우측 봉우리를 백학봉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여 어떤 이들은 불일암 부근을 푸른 학이 날아다니는 청학동으로 보기도 한답니다.

신선들이 노닌다는 이상세계, 청학동. 예로부터 지리산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이 청학동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 위치가 저마다 다릅니다. 김종직은 지금의 연곡사 근처로, 겸암 유원용은 세석고원을,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악양골의 매계를 청학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불일암 근처를 청학동으로 여긴 사람은 바로 남명 조식선생입니다. 지리산을 열두 차례나 올랐다는 남명 선생은 산수유람을 기록한 유두유록(遊頭流錄)에서 이곳 불일암 부근에서 하늘을 오르내리는 청학을 봤다고 적고 있습니다.

빨치산들의 한이 서린 지리산. 지리산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 사람들을 불러들였습니다. 불일암 부근에도 역시 구한말에는 동학교도가 일제 때는 강제위안부와 징용을 피해 온 사람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남명선생이 살았던 혼란한 조선시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남명 선생은 청학동으로 여겼던 이곳 불일암 부근에서 청학동이라는 제목으로 시 한 편을 남겼습니다.

한 마리 학은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오르고

구슬이 흐르는 한 가닥 시내는
인간세상으로 흐르네

선생은 청학이 노니는 이상세계를 꿈꾸면서 자신이 처해 있는 혼탁한 현실세계, 인간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생의 올곧은 삶이 그러했듯이 청학동을 현실 도피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청학동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 세계를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도를 통해 올곧은 마음자리를 추슬러 가며 부조리한 현실을 똑바로 직시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게 남명 선생의 이상세계와 부조리한 현실세계를 생각하면서 불일암에서 이틀 밤낮을 머물고 일용스님과 함께 불일암을 나섰습니다. 산길에 널려있는 낙엽을 밟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깊은 산중 암자를 찾아가는 것은 어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내 모습을 바로 보기 위함이다. 제 잘난 맛에 거들먹거리고 살아가는 나, 바스락거리는 낙엽처럼 대자연 앞에 한없이 왜소한 나를 만나는 길이다.' 

속세를 눈앞에 둔 어느 계곡에서 스님이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스님 앞에 뿌리를 드러내놓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불일암에서 이틀 밤낮을 보내고 하산하는 길목에서 만난 소나무. 지난 태풍때 뿌리가 앙상하게 들어나 있는 것을 일용스님이 돌로 받쳐 놓았다고 합니다.
 불일암에서 이틀 밤낮을 보내고 하산하는 길목에서 만난 소나무. 지난 태풍때 뿌리가 앙상하게 들어나 있는 것을 일용스님이 돌로 받쳐 놓았다고 합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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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태풍 때 뿌리를 내놓고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을 돌로 받쳐 줬는데 그나마 버티고 있네요." 
"허참, 그러고 보니 저 처참한 소나무가 꼭 제 모습 같네요."
"그럼, 돌을 하나 받쳐 주세요. 처사님의 업이 그 만큼 소멸되지 않을까요?"

일용스님 말대로 힘겹게 버티고 있는 소나무가 좀 더 힘을 받아 지탱할 수 있도록 적당한 돌을 골라 받쳐주었습니다. 그 돌은 물질적인 욕망을 쉽게 저버릴 수 없는 현실세계와 모든 속가의 욕망을 툴툴 털어버리고 출가의 꿈을 꾸고 있는 이상세계, 사이에 서 있는 나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아내와 나를 이어주는 끈이기도 했습니다. 소나무의 처절한 모습은 나뿐만 아니라 나로 인해 상처받은 아내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처사님 이제 어디로 가시죠?"
"글쎄요, 그냥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찾아가 볼까 합니다. 가다가 맘 바뀌면 출가가 아닌 가출을 했으니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요."

결국, 생각없이 지리산 고운동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뿌리를 들어내 놓고 처참하게 버티고 있는 소나무에 돌을 받쳐 놓듯 아내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푸른 산 기운을 담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불일암에서 내려오다가 만난 푸른 산기운.
 불일암에서 내려오다가 만난 푸른 산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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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가출, #지리산 출가의 꿈, #불일암, #불일폭포, #불일암 일용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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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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