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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꽃 무우꽃 풀꽃과 더불어 마늘을 비롯한 온갖 채소들이 자라고 있는 우리 밭. 요즘 배추꽃이 화사하게 피었습니다.
 배추꽃 무우꽃 풀꽃과 더불어 마늘을 비롯한 온갖 채소들이 자라고 있는 우리 밭. 요즘 배추꽃이 화사하게 피었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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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내내 밭을 갈았습니다. 밭을 갈다가 밭 곳곳에 무리지어 핀 배추꽃 앞에서 일손을 멈춥니다.

"씨 받을 녀석들 몇 포기만 남기고 그냥 갈아버릴까?"

갈아엎기에는 배추꽃들이 너무 예쁩니다.

"까짓 거, 그냥 나중에 갈지 뭐…."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립니다. 갈아엎어야 할 시점이 닥치고 보니 무리 지어 핀 배추꽃이 아쉽습니다. 눈 뜬 장님처럼 배추꽃이 새삼스럽게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막힌 귀가 열립니다. 어디선가 소리 소문 없이 날아든 벌들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배추꽃의 달콤함에 취해 있는 벌들이 보입니다.

지금 갈아엎지 않으면 애초에 심고자 했던 강낭콩을 덜 심어 덜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배추꽃을 차마 갈아엎지 못합니다. 결국 꽃이 시들기까지 그냥 두기로 합니다. 강낭콩을 덜 먹으면 그만입니다. 주검 앞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듯이 조만간 사라져버릴 배추꽃이 선사한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밭을 갈던 괭이를 놓고 흙손을 털어 집 안으로 들어섭니다. 사진기를 챙겨 나옵니다.

배추꽃밭을 갈아 엎기가 아쉬워 밭을 갈다가 멈췄습니다. 배추꽃이 핀 자리에 강남콩을 심을까 했는데, 그 자리만큼 강남콩을 적게 먹으면 됩니다.
 배추꽃밭을 갈아 엎기가 아쉬워 밭을 갈다가 멈췄습니다. 배추꽃이 핀 자리에 강남콩을 심을까 했는데, 그 자리만큼 강남콩을 적게 먹으면 됩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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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소리소문 없이 배추꽃 밭에 날아든 벌들이 윙윙거립니다.
 어디선가 소리소문 없이 배추꽃 밭에 날아든 벌들이 윙윙거립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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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꽃 향기에 취해, 기분 좋은 기운이 퍼집니다

점심 무렵, 배추꽃밭을 갈아엎지 않은 것을 참 잘했다 싶습니다. 요즘 우리 집 주변에 이웃사촌으로 정착하게 될 성제훈씨네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 집 짓는 목수들이 한 달 넘게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데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시 짬을 내 배추꽃밭 앞에 모였던 것입니다.

"이거 유채꽃 아닙니까?"
"아뉴, 배추꽃인디."
"요즘 배추꽃 보기 힘들어요."
"한 포기의 배추에서 얼마나 많은 씨앗들이 나오는지 아세요? 꽃밭을 이룰 정도라니께요.그리구 이놈들은 내 새끼나 다름없슈. 매년 씨를 받아오고 있는디, 올해 씨를 받게 되면 8년째요."

종묘상의 배추씨는 씨알머리 없는 배추씨니, 그걸 대대로 받아쓰고 있느니, 한 포기의 배추에서 나오는 씨앗이 꽃밭을 만들어 놓았다느니, 내가 푼수처럼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거나 말거나 목수들은 배추꽃에 코끝을 대봅니다. 

"야, 배추꽃이 이렇게 향기가 좋은 줄 몰랐네요."

목수들이 배추꽃 앞에서 감탄사를 내지릅니다. 목수들의 팀장인 이윤구씨는 배추꽃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환하게 웃음꽃을 피웁니다.

"잎은 쌈 싸 먹어도 좋고, 아까 점심 때 쌈이 바로 이 배추잎인디 맛있었쥬?"
"맛이 좋던데요."
"배추꽃대나 꽃도 그냥 먹어두 되는디, 한번 먹어들볼래요? 맛있어요."

몇몇 목수들이 조심스럽게 배추꽃을 따서 입에 넣습니다.

"어? 이것도 먹을 만한데요?"
"그렇죠? 맛있죠이. 요즘 나오는 꽃들은 어지간하면 다 먹을 수 있슈."

배추꽃 향기에 기분 좋게 취해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또한 덩달아 기분이 좋습니다. 잠시 힘겨운 노동일을 쉬고 있는 목수들의 기분 좋은 웃음에서 배추꽃 향이 납니다. 배추꽃 향기에 취한 목수들이 그 기분 좋은 기운을 내게 전염시키듯, 벌들은 부지런히 꽃가루를 옮겨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고 있습니다.

마늘밭 사이사이에 온갖 풀꽃과 냉이꽃이 안개꽃처럼 무리지어 피었습니다. 그래도 마늘들은 잘 자랍니다.
 마늘밭 사이사이에 온갖 풀꽃과 냉이꽃이 안개꽃처럼 무리지어 피었습니다. 그래도 마늘들은 잘 자랍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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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밭 한 옆에 자라고 있는 무꽃. 지리산에서 구한 토종 무씨를 5년째 받아 쓰고 있습니다.
 마늘밭 한 옆에 자라고 있는 무꽃. 지리산에서 구한 토종 무씨를 5년째 받아 쓰고 있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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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풀밭이지, 밭이라 할 수 있것소이?"

문득 수없이 많은 씨앗을 잉태하는 한 포기의 배추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겨우내 김장김치를 내주고, 겨울을 견뎌내 달콤한 봄동으로, 거기에 봄꽃에 이르기까지 죄다 내주고 있습니다. 벌들을 불러들이고 사람들을 불러들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줍니다. 그게 어디 배추꽃뿐이겠습니까?

우리 집 주변은 요즘 온통 푸릅니다. 그 사이 사이에 앙증스럽게 핀 별꽃을 비롯한 온갖 풀꽃들과 노란 배추꽃이 더해졌습니다. 연보라 꽃도 보입니다. 무꽃입니다. 배추꽃과 무꽃이 시들 무렵에는 씨를 맺게 될 것입니다.

밭고랑 사이사이에는 안개꽃처럼 자욱하게 피어 있는 냉이꽃이 보입니다. 벌써 꽃잎을 날리고 있습니다. 조만간 틈실한 씨앗들이 밭 곳곳에 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지난겨울에도 그랬듯이 향긋한 냉잇국으로 우리 식탁 앞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여전히 "저게 풀밭이지, 밭이라 할 수 있것소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밭을 자세히 살펴보면 풀꽃과 냉이꽃 사이에서 마늘이 끄떡없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겨울을 난 양파와 상추는 이미 잘 자라고 있고 3월부터 파종을 해온 감자와 취나물, 청경채, 케일, 고수를 비롯한 갖가지 채소류가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 밭을 보면서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쉽니다. 심란하다고 합니다. 어지럽다고 합니다. 밭에서는 농작물만이 자라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밭에서 꽃이 핀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 밭을 갈아엎어 그 어떤 작물을 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밭을 계속 활용해야 합니다. 밭을 한시라도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밭에도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 땅은 좀 더 많은 작물을 생산해내야 하는 거대한 자본의 기계나 다름없습니다. 기계를 작동하는 것처럼 필요한 뭔가를 끊임없이 뽑아내야 합니다. 생명은 자라지만 진정한 생명이 없습니다. 꽃을 피우고 씨를 잉태하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도서관 앞 맨 땅에 배추씨를 아무렇게나 뿌려놓았는데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단 한 포기의 배추에서 나온 씨앗들로도 화사한 꽃밭을 만들수 있습니다. 김장 김치에서 거름에 이르기까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입니다.
 작은 도서관 앞 맨 땅에 배추씨를 아무렇게나 뿌려놓았는데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단 한 포기의 배추에서 나온 씨앗들로도 화사한 꽃밭을 만들수 있습니다. 김장 김치에서 거름에 이르기까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입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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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삶, '욕망의 전차'를 느리게 만듭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고흥읍내로 나섰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는 곳이 있습니다. 고흥군청 앞에 설치해 놓은 천막 농성장입니다. 고흥군청 앞에서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밤마다 무기한 화력발전소 반대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내가 화력발전소에 반대하는 것은 '덜 생산해 더 안전한' 먹거리를 먹겠다는 것입니다. 느리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작물이 꽃을 피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씨를 받아 쓰겠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순환시키고자 하는 생태농사를 짓겠다는 것입니다.

온갖 오염원을 쏟아내는 화력발전소에는 꽃을 피우고 씨를 잉태하는 생태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오염된 욕망의 에너지만을 뽑아냅니다. 농사로 말하자면 좀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강력한 화학비료에 인정사정 없이 독성 강한 농약으로 땅을 죽여 나가는 일입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을까 싶습니다. 불안전한 에너지로 불안전한 먹을거리를 생산해내는 성장지상주의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덜 생산하고 덜 써가며, 화력발전소나 핵발전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재생에너지나 생태농업으로 돌려야 합니다. 화력발전소 건설로 인해 좀 더 에너지를 누릴 수 있겠지만 그만큼 온갖 생명을 위협하게 됩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멈출 수 없는 욕망의 전차입니다. 그 욕망으로 사람들을 병들게 합니다. 세상을 병들게 합니다.

하지만 보다 안전한 재생에너지는 풀과 함께 자라는 마늘밭처럼 생산량은 적지만,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욕망의 전차를 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에너지 생산량은 적지만 좀 더 안전한 에너지를 누릴 수 있습니다. 덜 누리는 만큼 온갖 풀꽃과 함께 자라나는 마늘밭에서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꿈 꿀 수 있습니다. 벌들이 윙윙거리는 배추꽃을 누릴 수 있고 배추꽃 향기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태그:#배추꽃, #풀꽃과 함께 자라는 마늘밭, #성장지상주의, #화력발전소와 농사, #재생에너지와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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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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