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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 8코스
 강화나들길 8코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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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을 준비한 것은 오버였다. 대설주의보가 내렸다는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가는 것도 아니고, 지난밤에 눈이 내리긴 했지만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 것도 아닌데 지레 겁을 먹고 아이젠을 챙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강화도에는 눈이 내린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눈이 쌓인 길을 걸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그저 기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눈 내린 흔적이 깡그리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부 길에 간이 심심한 김장김치 위에 마무리로 뿌리는 꽃소금처럼 눈이 남아 있기는 했다.

12월 9일, 강화나들길 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을 걸었다. 강화나들길은 1코스부터 8코스까지 9개 구간이 있는데, 이날 8코스를 끝으로 강화나들길 9개 구간을 다 걸었다. 1코스를 걸은 것이 지난 10월 21일이니, 기간으로 따지면 한 달 반이 채 안 걸린 셈인가? 일 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매주 강화도를 찾았고, 하루에 한 코스씩 강화나들길을 걸었다. 그렇게 강화도를 8번 찾아갔다.

여행이란 익숙해진 것과의 결별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매주 강화도 행 버스를 타면서 강화도에 익숙해지면서 정이 드는 듯했는데 마지막 코스를 걷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강화도와 영 이별하는 것은 아니다.

강화나들길을 걷느라 정작 강화도의 속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기에 조만간 다시 강화도를 찾아 정해진 길(강화나들길)이 아닌 나만의 길을 걸을 작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게 언제라고 지금은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지.

눈 내린 흔적이 남아 있다. 길은 숲으로 이어진다.
 눈 내린 흔적이 남아 있다. 길은 숲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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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2월 8일) 내린 눈이 밤새 얼어붙어 빙판길이 될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들으면서 강화도행을 잠시 망설였다. 혹시나 빙판길 때문에 교통대란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기우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한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눈이 내리면 날이 풀린다고 했지만 기온은 뚝 떨어져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강화행 버스를 기다리는데 바람이 잘 벼린 칼날을 숨긴 것처럼 살갗을 아프게 할퀴면서 불었다. 도로 사정이 원활한지 버스는 제 시간에 송정역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신촌역에서 출발해 송정역을 거쳐 초지대교를 건너 화도공영주차장으로 가는 3100번 버스다.

강화나들길 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은 초지진에서 시작해 분오리돈대에서 끝난다. 거리는 17.2km.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다. 오르막이나 내리막길이 거의 없어 그리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지도를 보면서 4시간 반 정도면 충분히 걸을 것으로 예상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추운 날에는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춥기 때문에 별로 쉬지 않고 내처 걷거나 쉬더라도 한기가 덮치기 전에 일어나 걸음을 재촉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걷는 시간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혼자 걸으면 더더욱 그렇게 된다. 이 날도 혼자 걸었다.

초지대교
 초지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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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초지대교를 건너자마자 내렸다. 강화나들길 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은 초지진에서 출발해서 초지대교 아래를 거쳐 가게 되어 있다. 초지진으로 가서 초지대교로 다시 되짚어 오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판단, 초지대교 부근에서 나들길 표시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길 표시는 쉽게 찾았다.

초지대교 부근은 거대한 관광단지였다. 모텔과 횟집들이 즐비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 시간에는 모텔과 횟집 간판의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불을 밝혀 환락가처럼 보이지만, 햇살이 눈부시게 빛날 때는 추레하고 후줄근해 보일 뿐이다. 평일 오전에는 더더욱 그렇다.

날씨, 맑은.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푸름. 바람, 쌀쌀맞기 그지없음.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강화도를 찾는 관광객 수가 대폭 감소했다고 하더니 강화나들길을 걷는 사람 역시 많이 줄었는지 나들길을 걷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게다가 겨울이 아닌가. 

강화도의 갯벌
 강화도의 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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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도 어판장
 황산도 어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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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을 걸으면서 강화 바다가 다양한 모습을 지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바다는 같은 바다일 텐데 걸을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썰물 때인가 보다. 초지대교 부근은 갯벌이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갯벌 너머로 보이는 초지대교는 자꾸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 버스를 타고 그 위를 달릴 때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말이다.

갯벌 위에 올라앉은 배들은 안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황산도 어판장은 거대한 배 모양이었다. 그 한쪽에 횟집에서 내건 하얀 등들이 한 줄로 나란히 걸려 있다.

황산도 선착장을 지나 소황산도 주차장 가는 길부터 좁은 숲길이 시작되었다. 길 위에 깔린 낙엽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제 내린 눈이 녹아 버린 것이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낙엽 위에 잔설이 길게 남아 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는 시각이면 마저 녹을 것이다. 이 길, 누구도 지나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섬암교로 가는 길에 추수가 끝나 텅 비어 황량한 들판에 새떼들이 까맣게 내려앉은 것을 보았다. 앞쪽에는 다리가 길고 목이 긴 새 몇 마리가 한가롭고 앉아 있었다. 깃털 색이 잿빛인 것으로 보아 재두루미인 것 같았다. 검은 색으로 보이는 새떼는 청둥오리들이고.

들판에 철새떼가 앉았다. 한꺼번에 날아오르면 멋진 풍경이 연출된다.
 들판에 철새떼가 앉았다. 한꺼번에 날아오르면 멋진 풍경이 연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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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 8코스가 왜 '철새 보러 가는 길'인지 알겠다. 저렇게 철새들이 날아든 것을 볼 수 있으니 당연히 철새를 보러 가는 길이 되지 않겠나. 이렇게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에는 겨울이 황량해 뵈지 않아서 좋다. 덩달아 철새들도 쓸쓸해 뵈지 않는다.

동검도 가는 길에 용두레 체험을 할 수 있다는 팻말이 붙어 있는 곳을 지났다. 용두레는 낮은 곳에 있는 물을 높은 곳으로 퍼올릴 때 사용하는 농기구다. 용두레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안할 수가 없다. 농기구가 놀이기구가 된 셈이니 말이다.

강화도에 동검도를 잇는 길을 가운데 두고 갯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저 길이 놓이기 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거나 갯벌이 드러났을 때 건너지 않았을까?

내가 걷는 길이 코스가 정해진 길이 아니라면 아마도 동검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나들길 8코스를 걷는 중. 동검도는 눈으로 보고 지나가야 한다. 약간 아쉽다. 동검도에도 돈대가 있다는데, 하면서 눈길을 거둔다.

동검도 가는 길이 보인다.
 동검도 가는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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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갯벌이 길고 그리고 넓게 펼쳐지는 길이다. 제방을 따라 걷는 길은 이따금 콘크리트길이었다가 흙길로 변하고, 다시 콘크리트길이 되기도 한다. 길은 때로는 막막하게 때로는 지루하게 이어진다.

길을 걷는다는 건, 어쩌면 늘 내 인내력을 시험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재미삼아 혹은 산책삼아 가볍게 걷는 것이 아니니, 몇 시간을 그저 묵묵히 수행하는 것처럼 걷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운 날에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땡볕 아래를 걷고, 추운 날에는 칼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걷기도 한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비를 맞으면서 걷고, 눈이 내리는 날에는 눈을 맞으면서 걷는다. 걷다가 지겨워지거나 걷기 싫어진다면 걸음을 멈추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나무가 빽빽한 숲길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걸어온 길을 되짚어 가거나, 앞으로 계속 나아가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곳까지 이동해야 하므로. 그러느니 그냥 내처 목적지까지 걷는 게 낫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걷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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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지돈대
 택지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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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시간쯤 걷다가 제방 길에 잠시 멈춰 쉬었다. 이 때 보온병의 커피는 필수. 따끈한 커피를 마시면서 갯벌을, 철새들을 바라보았다. 부는 바람이 쌀쌀맞기 그지없어 오래 쉬지는 못했다. 체온이 뚝 떨어지기 전에 짐을 주섬주섬 챙겨 다시 걷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택지돈대는 길에서 떨어져 있어 지나치고 나서야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쯤에 택지돈대가 있을 텐데, 하면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사각형 모양의 돌담이 보였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놔두는 것이 자연스럽지. 그래서 눈으로 돌담을 더듬고 더듬은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분오리돈대가 멀리서 보이는 길. 아쉬워졌다. 저기가 끝이구나, 싶어서.

물론 길이 끝난 건 아니다. 내가 목표로 정한 길을 다 걸었을 뿐이지. 길은 늘 어디론가 이어지므로 걸어야 할 길은, 걸을 수 있는 길은 무궁무진하다. 강화나들길 역시 마찬가지다. 강화나들길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만들어지면서 이어지고, 덧붙여질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나는 강화나들길을 마지막으로 걷는 게 아니라, 걷기를 잠정적으로 중단할 따름이다. 그리고 다른 길을 걸으러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동막해수욕장
 동막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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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분오리돈대를 지나 동막해수욕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솟대가 외롭게 서 있는 해변에 대여섯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늘 그렇듯 철 지난 바닷가는 쓸쓸하기 짝이 없다. 파도가 큰 소리를 내면서 해변으로 달려왔다가 다시 바다로 미끄러져 간다. 그 바다를 오래 감상할 틈도 없이 빨간색 순환버스가 들어온다.

그 버스를 놓치면 최소한 한 시간은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동막해수욕장 부근을 서성이고 있어야 한다. 달리자 달려, 버스를 향해.

<강화나들길 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
초지진 - 황산도 선착장 - 소황산주차장 - 섬암교 - 동검도 입구 - 선두어시장 - 택지돈대 - 분오리돈대

* 개인적으로 강화나들길 9개 구간 가운데 가장 좋았던 길은 3코스 '능묘 가는 길'이었다. 고려시대의 능 3개가 숲길 사이에 숨어 있듯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길이 걷기 좋은 오솔길이었다. 그 길을 걷다가 옴팡지게 넘어져 무릎을 다쳐 한 주 정도 걷지 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길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특히 전등사 뒤로 이어지는 길은 숲이 우거져 가을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어서 좋았다. 온수성당에서 종소리를 들었던 것도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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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도보여행, #강화나들길, #분오리돈대, #동검도, #택지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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