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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따라 제방이 이어지는 길 중간에는 해안초소가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었다. 대부분의 초소는 비었지만, 딱 한 군데 다른 초소들과 달리 망루 같은 건물이 있고,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초소를 보면서 걷고 있으려니 군인들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제방 길을 따라 걷는 내가 그들 눈에 오죽 잘 보이겠나. 내 눈에도 그들의 움직임이 보이는데. 초소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 나를 보고 군인 가운데 한 사람이 내려오는 것 같다. 초소 앞에 도착하니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앳된 얼굴의 군인이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못 지나가나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니, 그건 아니구요."

하면서 군인은 내 뒤로도 사람들이 더 오느냐고 물었다. '아니, 혼자 왔어요' 했더니 그는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이름과 주민번호 등을 알려주면 초소를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불러주는 것보다 내가 직접 쓰는 것이 빠를 것 같아 수첩을 달라고 했다. 수첩에 이름과 주민번호, 연락처, 목적지를 쓰면서 군인을 곁눈질했다. 젊은 군인은 해맑게 생겼다.

 

"여기, 사람들이 많이 오나요?"

"네, 전에는 무지 많이 왔어요."

"그럼, 요즘도 많이 오나요?"

"아니요, 연평도 포격 이후 처음이세요."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이후 내가 처음 오는 거라고? 여기가 위험지대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제방 길이 길게 이어져 있을 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걸으면서 별다른 위험을 느끼지 못했는데... 내가 겁이 없는 건가?

 

이 군인은 졸병인 듯 내 인적사항을 적은 수첩을 들고 망루 같은 초소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위에서 통과시키라는 말이 들렸고, 다시 내려 온 군인은 쇠사슬로 묶인 철조망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나가는 문 역시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길은 철조망을 지나 끝이 보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강화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이었다. 강화나들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것은 물론 관광객들까지 눈에 띄게 많이 줄었다고 했다.

 

지난 11월 25일, 강화나들길 7-1코스 '동막 해변 가는 길'을 걸었다. 이 길은 지난 주 금요일(11월 19일)에 걸었던 7코스와 시작점이 같으면서 중간지점까지 길이 중복되어 8코스를 먼저 걷고 나중에 걸을까, 고민하게 만든 길이었다. 하지만 강화나들길을 전부 걷겠다고 작정하고 있는데 굳이 나중으로 미룰 이유가 없어 7코스에 이어 걷기로 했던 것이다. 이 날도 혼자 호젓하게 그림자를 벗삼아 걸었다.

 

늘 그렇듯이 길을 걸으러 나서기 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걷는 것을 혹은 걷는 길을 망설이지만 막상 걷기 시작하면 그런 생각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걸으러 오기를 너무 잘했다, 싶어지는데 이 날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길이더라도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걷는 느낌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날도 그랬다. 장화리 마을 일몰조망지의 경우, 지난번에 걸을 때는 썰물이었는데 이번에는 밀물이라 밀려든 바닷물이 아주 가까이서 찰랑거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연은 늘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을 새롭게 보여준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

 

지난주에 이어 다시 찾은 강화도 화도공영주차장의 하늘은 짙은 회색빛이었다. 주차장 부근은 어둔 하늘 탓에 음습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겨울이 깊어감에 따라 낮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오늘 걸어야 하는 길은 강화나들길 9개 구간 중에서 가장 거리가 긴 코스였다. 총 길이 23.5km, 예상 소요시간은 7시간 30분.

 

지금까지 강화나들길을 걸어본 결과 늘 예상 소요시간보다 최소한 한 시간은 일찍 걷기를 마칠 수 있었으므로 나는 6시간 정도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는 계산을 했다. 그 예상은 그다지 빗나가지 않았다. 5시간 40분가량 걸렸으니까.

 

화도공영주차장을 출발한 시간은 10시 45분. 날씨는 흐렸지만 지난주보다 기온이 올라간 듯 포근했다. 방풍 점퍼를 입고 걸었더니 자꾸만 땀이 나서 결국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벗고 말았다. 날씨는 온도계로 재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리성당을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같은 길이라고 해도 늘 같은 풍경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붉은 열매가 바싹 마른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길을 걸으면서 지난주에는 황량한 겨울 풍경만 본 것 같은데 겨울이 한 주 더 깊었건만 숲은 숨겨두었던 것들을 슬며시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걸었던 길을 걷고 또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것이다.  

 

장화리 갯벌은 여전했지만, 밀물이었다. 그러면 지난주에 왔을 때는 썰물? 그래서 갯벌이 막막하도록 넓게 펼쳐져 있었구나, 싶었다. 갯벌을 숨기듯 덮으면서 밀려든 바닷물은 탁하디 탁해 흙탕물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은은하게 갯벌을 넘어 들려온다. 내리성당을 지날 때, 까치가 울면서 날아올랐는데 장화리 바닷가에서는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고 있었다.

 

바다를 따라 이어진 제방 길에서 강화나들길에서 7코스와 7-1코스가 나뉘어진다. 7코스는 마니산청소년수련원으로 길이 이어지고, 7-1코스는 동막해수욕장 방향으로 길이 이어진다. 그 길, 바다를 옆구리에 길게 끼고 걷는 길이다. 흐린 날이라서 그러리라. 바다는 잿빛이었다. 잿빛 바다를 잿빛 하늘이 덮고 있고, 무리를 지어 나는 철새들 또한 잿빛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금세라도 눈발이 날릴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그래서 배낭 한쪽에 우산을 하나 찔러 넣고 왔는데, 비대신 눈이 내리면 참 좋겠다. 하지만 비는 내가 강화도를 떠날 때까지 내리지 않고, 서울행 버스가 서울 변두리로 접어들 무렵부터 안개처럼 뿌리기 시작했다.

 

제방 길은 외줄기로 이어진다. 다른 길로 잘못 접어들 염려가 없어서일까, 길 표시는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버렸다. 그 길은 걷다보면 길 표시가 있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무심히 걸음을 옮기게 만든다. 바닷물은 이따금 제방 아래까지 밀려와 철썩였고, 바닷새 우는 소리가 노래의 후렴구처럼 긴 여운을 남기면서 들려왔다.

 

그 제방 길에서 해안초소 여러 곳을 스쳐 지났다. 철조망 문을 열고 지나가야 하는 곳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젊은 군인이 이름을 비롯한 인적사항을 받아들고 철조망 문을 열어주었지만 다른 한 곳은 지키는 군인이 없어 제방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했다.

 

미루돈대와 동막돈대는 지도에 이름은 있건만 지나는 길에서는 모습을 보지 못해 그냥 지나쳤다. 여기쯤 미루돈대가 있을 텐데,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냥 걸음을 옮기고 말았던 것이다. 이름만 남아 있고, 형태가 사라진 것은 아닐 텐데, 싶기는 했다.

 

대체 민들레는 언제 피는 꽃일까? 가끔 길을 걷다보면 그런 의문이 생기곤 한다. 분명히 이른 봄에 피는 꽃이라고 알고 있는데, 계절과 상관없이 피어나는 녀석들이 제법 많기 때문이다. 한 여름에 피어나는 거야 날씨가 따뜻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겨울에 녀석을 만나면 가끔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이 똑 그랬다. 제방 길에 숨은 듯이 피어난 노란 꽃은 마른 풀 사이에 숨어 있는 폼이 철 모르게 피어난 것을 조금은 계면쩍어 하는 기색이었다. 그 부근에 홀씨가 되어 날아갈 준비를 하는 민들레가 여럿 있었다. 이 황량한 겨울에 어디까지 날아갈 작정일까, 말이 통하면 물어보고 싶었다.

 

흥왕낚시터를 지난 지점에서 잠시 쉬었다. 혼자 걷노라면 쉬지 않고 내처 걷게 된다. 네 시간 이상을 거의 쉬지 않고 걸었더니 발에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간이의자를 꺼내 펼친 뒤, 바다를 바라보고 앉았다. 배낭 안에서 방풍 점퍼를 꺼내 입고, 신발을 벗었다. 양말에 검은 얼룩이 진 것처럼 땀이 묻어 있다.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걸은 것 같은데도 발에 땀이 났는가 보다.

 

바다에서 부는 바람은 아주 차갑지 않아 온기를 품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잿빛 바다에 잿빛 하늘이지만 포근한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따뜻한 바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갈매기인가, 끼룩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보온병에 싸온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조금 오래 쉬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한가로운 여유가 어찌나 좋던지, 몇 시간이고 앉아 있고 싶었지만 겨울 해는 생각보다 짧다. 해가 지기 전에 분오리돈대까지 가야하니 일어나서 의자를 접어 배낭 옆구리에 찔러 넣는다.

 

다시 걷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제방 길 옆에서 개 두 마리를 만났다. 바싹 마른 풀 사이에 무언가가 숨어 있는 것 같아 무심히 눈길을 주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개 두 마리가 엎드려 있다가 내 발소리에 갑자기 머리를 든 것이다. 마치 으슥한 곳에서 밀회를 즐기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들과 눈길이 마주쳤다. 나보다 그들이 더 놀란 기색이었다. 왠 사람이지, 하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경계하는 기색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해코지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녀석들은 깽 소리 한 마리 내지않고, 내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겨울 해수욕장은 황량하다. 강화도의 유일한 해수욕장이라는 동막해수욕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 바다를 거니는 사람이 서넛은 된다. 그들을 지나 길을 따라 계속해서 걸으니, 분오리돈대가 멀리서 보인다. 그 입구에 할머니 한 분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를 지나 분오리돈대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니, 커피를 한 잔 종이컵에 타 주신다.

 

"연평도 포격 때문에 사람들이 안 와. 주말에도 손님이 없어. 아주 팍 줄었어."

 

그 자리에서만 36년간 장사를 했다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가 파는 물건들은 종류가 다양했다. 젓갈과 강화순무김치를 비롯해 직접 곤 엿과 된장, 고추장 등등. 껍질을 깐 은행이 있기에 한 봉지 집어 들었더니 할머니는 안 깐 은행을 싸게 줄 테니 사란다.

 

"요즘 사람들은 안 깐 건 안 사가. 그거 까는 거 여간 힘든 게 아니야. 어제, 밤새도록 깠어."

 

할머니가 말하는 요즘 사람 축에 끼는 나, 결국은 깐 은행 한 봉지를 샀다. 커피까지 얻어 마셨는데 그냥 가기가 뭣해서. 붙임성 있게 말까지 걸었으니 더더욱 그렇지.

 

화도공영주차장에서 분오리돈대까지 5시간 40분 걸렸다.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분오리돈대에서는 강화 순환버스를 탈 수 있다. 할머니는 어느 방향에서 타든 다 강화터미널로 간다, 고 알려주신다.

 

"그 버스는 타고 금방 내려도 천 원이야. 무조건 타면 천 원이거든."

 

함허동천 근처에 산다는 할머니는 장사도 안 되고, 그만 들어가야겠다며 두터운 겉옷을 여몄다. 나는 분오리돈대에서 오던 길을 되짚어 동막해수욕장까지 걸어 그곳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 왔다. 버스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강화도의 해변도로를 털털거리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태그:#도보여행, #강화나들길, #분오리돈대, #동막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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