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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무조건 진급될껴. 평점도 좋고 지휘관한테 인정도 받고 있으니께 걱정 마라."

주위 모든 사람들은 아무 걱정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지만, 진급 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었다. 변수라는 게 항상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정작 나 또한 마음속으로는 당연히 진급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고 '내가 진급 안 되면 누가 진급되겠어' 하는 이기적인 생각도 들었다.

드디어 뚜껑이 열리고 진급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내 이름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자신했건만 진급에서 누락된 것이었다.

그것도 군대에서 가장 진급이 어렵다는 대위에서 소령 진급도 아니고, 장군 진급도 아닌 중위에서 대위로의 진급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직업군인으로서의 군 복무의지를 꺾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월급도 깎였는데 진급도 누락?

일명 IMF 군번인 우리 동료들은 1997년 입대 당시 IMF 경제 위기의 여파로 바로 위 선배들까지 보급받았던 근무복 하나 지급받지 못했고, 게다가 얼마 되지 않는 소위 봉급에 보너스를 받아야 일반 회사원들과 비슷한 수준의 연봉이었지만 보너스 감봉이라는 불이익까지 감수해야 했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난 지지리도 복도 없는 군번이었고, 더군다나 첫 부임지가 겨울에 가장 추운 강원도 철원이었다.

첫 부임해 갔을 무렵이 10월 중순 경이었는데, 다른 지역 같았으면 단풍놀이를 즐기며 가을을 만끽하고 있을 계절이었지만 철원의 날씨는 벌써 가을을 건너 뛰어 찬바람이 옷깃을 스미게 만드는 초겨울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장병들은 벌써 야전상의를 꺼내 입을 정도로 북녘의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지역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의 첫 부임지는 철원에서도 가장 북쪽인 최전방 철책부대였다. 이제 갓 청운의 꿈을 안고 군문에 들어선 만큼 부임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지만 대남방송이 시도때도 없이 들리는 최전방 부대는 부담으로 느껴졌다.

누구나 그렇듯이 첫 직장, 첫 부임지에서의 적응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상하 계급구조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는 군에서 빠르게 적응해 갔다. 함께 근무하는 장교들과 친분을 쌓고, 적극적으로 하나씩 업무를 배워나갔고 병사들과도 함께 운동을 즐기며 전우애를 키워 나갔다.

철책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후방 상급부대로 자리를 옮겨서도 지휘관과 상급자들이 초급장교답지 않은 일처리를 한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만큼 업무에 있어서도 인정을 받았다.

하여 매년 상급자와 지휘관이 작성하는 근무평정에서도 좋은 점수를 쌓아갔다. 중위 계급을 달고 지휘관의 참모역할을 수행하면서 나름대로는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면서 대위 진급발표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진급발표일이 다가오고 조급해하는 나와는 달리 주위 사람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마음 편하게 발표를 기다리라고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뚜껑이 열리고 진급자 명단에 내 이름자가 보이지 않자 나는 물론 주위 사람들까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니가 왜 안 됐지? 평점도 좋고 일도 잘 하는데..."
"뭔가 부족한 게 있겠죠. 이유없이 누락됐겠어요?"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진급에서 떨어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전화 한 번 해보자. 왜 떨어진 줄 알아야 시행착오를 안 겪지'

생각과 동시에 내 손은 어느새 수화기를 들고 전화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충성! ○○부대 정훈장교입니다. 이번 대위 진급에서 떨어진 이유를 알고 싶어 전화드렸습니다"
"장기자(장기복무자)야?"
"아닙니다"
"그럼 얘기할 필요도 없어"
"예? 그 무슨?"

"이번 진급은 장기자 위주로 선발했으니까"
"근무평정 점수는 반영 안됩니까?"
"왜? 평정은 좋아? 초군반 성적은?"
"... ... 확인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뚜 뚜 뚜... 그냥 말 없이 끊어버렸다. 모든 점수를 고려해서 진급자를 선발하는 게 원칙일 텐데 나참! 장기복무자가 아니라서 누락시켰다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뜩이나 IMF군번으로 손해도 많이 봤는데 진급에서까지 누락시키다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쉽게 월급 차이만 하더라도 중위와 대위는 많은 차이를 보였고, 월급을 떠나서 계급별로 맡겨지는 직책과 소임, 예하부대에서 바라보는 시각 등이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대위 진급 누락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더군다나 나보다 한 기수가 낮은 후배가 진급해서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모습을 볼 때는 후배에게 축하를 해 주어야 마땅한 일이나 가슴이 쓰려왔다.

진급만 됐다면 인생도 바뀌었을 텐데

왕중위 생활 1년 후 마침내 대위로 진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갓 전입 온 부대에서의 진급신고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축하해주는 동료들도 많지않았고, 진급의 기쁨보다는 업무파악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 진급 신고 왕중위 생활 1년 후 마침내 대위로 진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갓 전입 온 부대에서의 진급신고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축하해주는 동료들도 많지않았고, 진급의 기쁨보다는 업무파악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 김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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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다음 진급발표가 나기 전 1년 동안 난 일명 '왕 중위', '중위 감'으로서 중위들의 대표(?)로 부대에서 생활을 했고, 마침내 나와 같이 진급 누락된 동기들과 또 후배들과 같이 대위 진급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하지만, 누락된 사유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1년 늦게 단 대위계급장이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다. 더군다나 2년 이상 몸담아 온 부대에서 떠나 생면부지 부대로 전출한 후 진급신고를 한 탓에 축하해 주는 동료 후배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진급의 기쁨보다는 새로운 부대에 먼저 적응해야 하는 부담감이 더 컸다.

가뜩이나 진급 누락으로 인해 군생활에 대한 꿈을 접은 뒤라 새로운 부대, 새로운 직책은 나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진급 누락없이 1년 전에만 대위 계급장을 달았어도 청운의 꿈을 안고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 군생활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텐데. 그렇게 되었더라면 아마 지금도 직업군인의 길을 걸으며 인생도 바뀌었을 것이다.

요즘은 본인만 잘하면 진급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진급과 관련해 투명하고 공정한 심사를 위해 하급자에게도 평가를 받는 일명 '다면평가' 제도를 도입해 진급자로서의 인성과 자질을 평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휘관이 평소 근무태도를 보고 내리는 근무평정 점수는 물론 군 학교기관에서 받은 점수, 그리고 다면평가 결과 등 다각적인 평가요소를 적용해 최종 진급자를 선발해낸다고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진급발표 후 내가 이미 군생활을 접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에 도입된 다면평가가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진급할 수 있었을까? 만약 왕중위 시절에 대위계급장을 달고 군생활을 했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아마도 직업군인으로서의 길을 계속가고 있었을 것이다.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라고 한다. 내가 군생활을 하면서 진급에서 누락한 것도 시험에서 실패한 것이고, 군생활을 접은 것도 사회라는 또 다른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공개되는 순간 독자들로부터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일부분에 대한 평가를 말이다.

지금은 비록 만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군에서의 '진급 누락'이라는 기억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크나큰 상처로 남아있다.

덧붙이는 글 |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응모글



태그:#시험, #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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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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