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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 되었다. 올해 수상자는 독일 작가인 헤르타 뮐러, 문학에 제법 관심을 두고 있는 나였지만 수상자는 무척 낯선 이름이었다. 그의 작품 또한 이름만큼 생소했다. 그리고 이 시기만 되면 마치 홍역을 앓듯이 국내 언론사들은 몇몇 시인과 작가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점친다. 하지만 예상은, 아니 우리들의 간절한 소원은 번번이 엇나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국내 문인들이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원인을 찾는데 가장 큰 이유로 번역의 질적 한계를 탓하며 내년을 기약한다.

물론 내가 처음 번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십년 전에도 이런 지적은 있었다. 그 이전에도 있었다. 황순원의 '소나기'나 최근에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매년 언급되는 고은 시인의 '만인보'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제대로 번역하기엔 아직 번역 실력이 많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제 막 번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는 그 지적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다. 하여 나는 우리나라의 이런 척박한 번역(혹은 번역사)의 세계에 뛰어들어 먼 훗날, 내가 직접 번역한 책의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하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치기어린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통신 강좌, 혹은 전화, 우편을 통한 첨삭지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얻은 직장은 비디오폰을 만드는 회사였다. 돈만 잘 벌면 되지 대학이 별거냐고 외치며 부딪친 사회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새벽 세시가 넘도록 콘테이너에 박스를 나르고 나면 다음날은 여지없이 코피가 쏟아졌다. 그렇게 삼년을 생활했다. 함께 일을 시작했던 다른 친구들은 모두 떠나고 없었다.

새벽에 영어 학원을 다니던 나는 어느 정도 회화에 자신이 있었다. 조금만 노력을 더하면 다람쥐 쳇바퀴 같은 공장 생활을 접고 실력 있는 전문 번역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틈틈이 번역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한 달 월급을 털어 넣어 번역학원에도 등록 했다. 수업 방식은 주로 전화나 우편을 이용한 통신강좌였다. 주말이면 서울로 올라가서 전문 강사의 일대일 첨삭지도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번역사가 되기 위한 나의 첫 번째 시도는 채 석 달도 안돼서 끝나 버리고 말았다.

처음 번역 공부를 시작할 당시에 거금 오십만원을 들여서 산 번역 교재이다. 우편을 통한 첨삭 지도였다. 교재는 전부 50권이었는데 다시 보니 30권 까지 끝마친 상태였다.
▲ 번역 교재 처음 번역 공부를 시작할 당시에 거금 오십만원을 들여서 산 번역 교재이다. 우편을 통한 첨삭 지도였다. 교재는 전부 50권이었는데 다시 보니 30권 까지 끝마친 상태였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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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문과 장문이 있는데 이 번역물은 장문에 속했다. 3급 번역 과제를 칠때는 이보다 조금 더 긴 지문이 제시되었다.
▲ 첨삭 과제물 단문과 장문이 있는데 이 번역물은 장문에 속했다. 3급 번역 과제를 칠때는 이보다 조금 더 긴 지문이 제시되었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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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삭지도를 해주는 강사도 자주 바뀌고 전화와 우편을 통한 첨삭지도 자체가 상당히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뒤 그 번역 학원은 문을 닫아 버렸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꿈을 접을 수 없었다. 번역에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모인 카페에서 활동도 열심히 했고 함께 공동 번역을 해보기도 했다. 다른 번역 학원에 통신 강좌를 다시 신청하기도 했다.

3급 번역사 시험 낙방만 일곱 차례

꼭 자격증을 따야만 전문 번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직접 번역한 원고나 기획서를 가지고 출판사를 찾아 갈 수도 있었다. 더구나 번역사 시험이 국가 공인 자격증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당시 번역사가 되는 길은 오로지 자격증을 취득하는 방법뿐이라고 생각했다. 전문 번역사라는 타이틀이 탐이 나기도 했지만 번역사 시험에 합격만 하면 해당 번역 회사에서 일거리를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번역에 자신이 생긴 나는 한국 번역가 협회에서 주관하는 3급 시험에 도전했다. 연습 삼아 두 차례 낙방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이번엔 합격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탈락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번역사 시험 도전기는 시작되었다.

1999년이면 지금부터 10년 전이다. 3급 번역사 시험에 3번째 낙방을 하고 무척 우울해 하며 남한 산성을 오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 번역 실무능력 평가시험 수엄표 1999년이면 지금부터 10년 전이다. 3급 번역사 시험에 3번째 낙방을 하고 무척 우울해 하며 남한 산성을 오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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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과연 반역일까?

번역사라는 직업은 언뜻 생각하기엔 아주 낭만적인 직업이다. 사전이나 노트북을 들고서 거리로 나선다. 카페나 혹은 잔잔한 바람이 부는 고즈넉한 강가에서 여유롭게 일을 하고 웬만한 셀러리맨보다 많은 돈을 번다면 얼마나 환상적인 직업일까? 하지만 막상 번역 공부를 시작하자 그것은 단지 환상이었다.

번역이란 1차 언어인 '출발어'와 2차 언어인 '도착어'가 가능하다면 등가를 이루게 하는 것이 진정한 번역이라고들 한다.

그러니까 '출발어'와 '도착어'를 저울에 올려놓았을 때 가능하면 수평을 이루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번역이다. 수평을 이루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그것은 오역이나, 더 나아가서는 반역이 될 개연성이 다분하다. 특히나 의역이 많은 문학번역이 아니라 기술번역(계약서)쪽이라면 더욱 그렇다. 관사 하나의 유무에 따라서 아주 다른 의미가 되어 버리는 영어(언어)의 속성상 한번 잘못된 번역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번역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학우들은 종종 내게 논문 초벌 번역을 의뢰하고는 했다. 나는 번역 공부도 할 겸해서 열장 스무 장 되는 원서나 논문을 번역해 주고는 했다. 일주일을 넘게 끙끙대며 번역해준 원고료는 대부분 술이나, 저녁식사로 받았다. 그리고 다시 번역 시험 일정이 나오면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원문번역에 매달렸다. 그렇게 햇수로 6년을 매달렸지만 나는 결국 번역사가 되지 못했다. 전문 번역사는 물론 3급 시험도 합격하지 못했을 뿐더러 어느 사이 번역사가 되고 싶다는 열정이 사라져 버렸다.

선배, 글 솜씨 보통 아닌데, 소설 한번 써보지

뒤늦게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곳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였다. 4학년 무렵 국문과 후배 중 한 명이 학교 홈페이지에 종종 과 활동내용이나 주변이야기를 올리던 글을 보고 나서는 글 솜씨가 괜찮다며 자기가 속해있던 문학 동아리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러면서 소설 한번 써보라고 권유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깜냥이 안 된다며 매번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 나이 많은 후배는 틈만 나면 나를 동아리 모임에 데리고 다녔다. 열심히 귀동냥만 하고 돌아오고는 했다.

대학 졸업 후 방황하던 나, 그래 소설이나 한 번 써보자

어느 날 동생이 많이 아팠다. 언덕이 보이는 하얀 병동에 입원과 퇴원을 거듭했다. 어머니는 동생이 발작을 일으키는 날이면 전화통에 눈물을 쏟으셨다. 뒤늦게 학교를 졸업하고 학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영어를 가르치던 나는 경제적 능력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몸속에 있던 장기 중 하나가 갑자기 작동을 멈춰 버렸다. 의사는 완치는 불가능하지만 운동과 식사 요법만 잘하면 합병증도 늦추고 정상인보다 더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이십대 후반의 내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나는 그렇게 이십대의 마지막을 힘들게 통과해야만 했다. 매일 아침 동이 틀 때까지 불면에 시달렸다. 그래 잠도 안 오는데 소설이나 한번 써보자. 신기했다. 글을 쓰면 내 고통이 온전히 그 글 속으로 스며들었다. 눈썹이 온통 하얗게 변할 것 같은 불면증마저도 글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처음으로 희열을 느꼈다. 아! 이런 것이구나. 나도 잘하는 것이 있구나.그리고 무작정 써대기 시작했다. 마침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 후배는 내게 한 문학 사이트를 알려주었다.

전태일 문학상, 그리고 전태일 동지를 만나다

집근처의 허름한 분식집에서 밥을 먹다 전화를 받은 나는 얼떨떨했다. 당선이 아닌 우수였다. 무슨 생각에서 이 소설을 쓰고 또 응모했냐는 심사위원의 물음에 나는 아무말도 못한 채 버벅거렸다.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아니 기대는 했으나 희망으로 접었으므로 나는 그분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사위원은 당선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과분했다. 수상 자체가 꿈만 같은 일이었으니까. 전태일 문학상이 주는 묵직함은 유력한 문예지의 신인상이나 신춘문예가 주는 화려함과는 달랐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으로 때로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왔다. 전태일이라는 이름, 그 이름 앞에 설 때면 나는 항상 부끄러웠다. 전태일은 알고 있었지만 전태일이 누군지 몰랐으므로.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우리는 그를 잘 모른다.

작년에 공부방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전태일 열사에 관하여…"
"전태일이 어째서 열사야. 열사라카면 얼마나 거리감이 생겨."

어머니는 전태일을 동지로 불러주기를 원하셨다. 전태일 동지를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스물 아홉의 봄과 겨울을 보내는 동안 내 미욱한 정신을 통째로 흔들어 댔던 '태백산맥과' 더불어 내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터닝 포인트'였다.

1970년 11월13일, 스물 두해, 짧았던 그의 삶의 방식 속에서 내 삶의 방식을 투영해 본다. 나는 이제껏 그와 같은 삶을 살아왔나? 살 수 있을까? 몇 번을 되물어도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역사는 이렇게 한순간에 변할 수도 있구나. 나는 결코 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이타적 행동이 역사라는 바다 위에서 이렇게 거대한 물결이 되어 나를 비롯한 수많은 영혼을 일깨워주는구나. 실제로 그를 알게 된 후로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 인생은 그로 인해 계속 바뀔 것이다.

번역사, 아니 무명 소설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꿈은 언제나 이상을 쫓기 마련이다. 이십대 후반의 나는 쳇바퀴 같은 공장 생활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래서 번역사라는 낭만적인 직업을 갖고 싶었다. 실력 있고 유능한 전문 번역사가 되고 싶었다. 부와 명성도 얻고 싶었다. 그 꿈과 이상에 닿기 위해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것이 아님을 알자 미련없이 포기했다. 아니 실패였다. 어쩌면 도피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여 곡절 끝에, 아니 그것은 필시 운명이었으리라. 나는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빌려 이름없는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아직 변변한 소설집 한 권 내지 못한 무명 소설가이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쓸 수 있을지 헤매고 있지만, 적어도 전태일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는 않도록, 나는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전태일, #번역사, #노벨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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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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