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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동갑내기인 사촌 여동생이 있다. 어린시절 같은 동네에서 살아 소꿉동무이기도 한 아이(?)였다. 나보다 꼭 열하루 늦게 태어난 그 애, 왠만한 집이라면 그냥 이름을 불러도 되련만 우리집은 참 유난스럽게 까다로웠다.

꼭 이맘 때일 것이다. 우린 쌍동이처럼 친구처럼 늘 붙어다녔다.
▲ 우리의 어린시절 꼭 이맘 때일 것이다. 우린 쌍동이처럼 친구처럼 늘 붙어다녔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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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두 언니 동생이 있는 데 어데 언니 이름을 함부로 부르나! 어림도 없다. 꼭 언니라고 불러라.'

우리 엄마의 엄명은 여지없이 통했다. 그래서 난 평생 언니였고 그 아이, 옥자는 며칠 상관에 동생이었다. 얄궂게 초등학교 때도 줄곧 한 반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래서 옥자는 반 아이들에게 놀림도 받았단다.

"야, 넌 동갑에다 한 반 친군데, 무슨 언니라고 하냐. 그냥 이름 부르지."

그래도 막무가내. 옥자는 어려서부터 습관이 된지라 도무지 내 이름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단다. 그냥 현숙언니가 내 이름으로 굳었던 셈. 눈치 챘겠지만 우린 사촌 자매이면서 라이벌이었다. 우리 집은 큰 집, 걔네 집은 작은 집. 그 땐 꼭 큰댁이나 작은 댁이라 해야 어른들한테 혼나지 않았다.

규칙, 규칙! 우리집엔 규칙이 참 많았다. 난 그 놈의 규칙이 무지 싫어서 저녁 때가 되도 집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뭔가가 나를 옭아매는 것 같은 억압된 분위기가 싫었던 것이다. 언니들이 영화를 보러 가겠다고 해서 내가 나서면 여지없이 내 꿈을 박살내던 말.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뛰는구나.'

그 말 한 마디면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구석에 박혀 있어야 하는 막내 처지였다. 그 놈의 위계질서 탓이었다. 아무튼 이웃에 사는 그 애 역시 내게는 늘 신경 쓰이는 존재, 특히 맛난 거 먹을 때나 나들이 갈 때가 그랬다. 같이 가자니 번거롭고 혼자 가자니 뒤통수가 땡기는... 먹거리 앞에서는 가끔 얄미웠다. 군것질 거리가 변변치 않았던 60년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주로 잔치집이나 제사 지낸 집에서 음식을 가져왔을 때다.

우리는 항상 대식구였다. 할머니 할아버지에 부모님과 형제들까지. 우리 때는 무조건 어른 몫을 떼어놓아야 아이들이 먹을 수 있어 우리가 먹을 양은 실상 많지 않았다. 그런데 저희 몫(옥자네 몫은 주로 따로 가져 왔다)은 옆에 놓고 우리 것을 다 먹은 다음에 저희 몫을 들고 지네 집으로 간다. 우리 엄만 먹는 것 같고 아이들에게 야박하게 구는 큰엄마가 아니었으니 말 한 마디 없으셨고, 우린 늘 불만이었다.

작은 아버지(소래염전의 염부장이셨다) 월급날도 마찬가지. 거기는 식구가 작으니까 고기 한근, 또는 사탕 한 봉지를 사와도 오손도손 모여 앉아 오붓하게 먹을 수 있었다. 난 그게 참 부러웠다. 먹을 것만 생기면 사람들이 우우 몰려들어 우리 입에 들어가는 것도 별로 없는 우리 집에 비하면 분위기도 아주 좋아보였다.

옥자는 내 고등학교 졸업 때, 시몬느 베이유의 '운명의 시련 속에서' 라는 책을 사들고 왔다
▲ 고등학교 졸업식 때 옥자는 내 고등학교 졸업 때, 시몬느 베이유의 '운명의 시련 속에서' 라는 책을 사들고 왔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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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서도 우린 친구처럼 혹은 쌍둥이처럼 매일 붙어다니며 놀았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는 부천에 있는 우리 큰언니네 집에서 같이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결혼 적령기에 결혼해 다시 싱글이 되는 악순환을 겪었지만 그 앤 30이 훨씬 넘도록 직장생활을 하며 혼자 살았다.

내가 다시 언니 노릇을 시작한 건 그 즈음. 우리 엄마는 생일 날을 그냥 넘어가지 않지만 그 방면에 둔감한 작은 엄마는 생일 같은 건 기억조차 하지 않는 분이었다. 나는 때로는 전화로 때로는 그 애가 자취하는 집으로 찾아가 생일을 챙겨주었다. 나보다 열하루 늦게니 날짜 기억도 쉬웠다.

그 시대 자취방이란 방문 바깥에 부엌살림이 있는 불편한 구조였다. 한 사람은 부엌에 한 사람은 방문을 열어 놓고 시시덕거리며 수다를 떨면서 나름 생일 음식을 해먹었다. 그 날도 난 생일을 맞아 찾아갔다. 마침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저녁을 먹고 자고 가기로 한 날이었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만 자자! 하고도 또 얘기. 그만 자자! 하고도 또 얘기. 그러다 불쑥 내가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옥자야 근데 말야. 난 너네가 참 부러웠다. 너넨 식구가 작아서 항상 먹는 게 오붓했잖아. 분위기도 좋았구 말야. 작은 아버지 월급날 말야. 난 그때 너네가 맛있는 거 해서 오손도손 방에 앉아 먹는 게 아주 좋아보였어. 우린 식구도 많은 데다 먹을 것만 있으면 너희들까지 다 와서 먹으니까, 항상 넉넉하게 먹어본 기억이 없어."
"나는 말야, 현숙언냐. 어려서부터 언니 때매 얼마나 억울하게 차별 받았는지 알어?"


아니 이건 또 무슨 말. 항상 지네 때매 우리가 힘들었는데. 나는 속으로만 꿍얼거렸고 차마 드러내놓고 반박을 하지 못했다. 형제간 같지 않고 사촌간에는 간혹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 금줄이라도 쳐놓고 절대 침범하면 안 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 같은 게 있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 나는 게 뭔지 알아? 현숙언니가 할머니하고 나들이 떠났을 때야. 난 나중에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어서 막 뛰어가 보면 정말 큰 집이 텅 비어 있는 거야. 급하게 마당으로 다시 나와서 사당굴 고개를 바라보니까, 할머니하고 언니가 막 그 고개를 넘어가는 거 있지. 그때 내가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알어. 정말 억울해서 혼자 팔딱팔딱 뛰다가 집으로 와서 엉엉 울어 버렸다구."

순간 난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 맞은 느낌이었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생생하게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당 끝에 서서 어찌 할 줄 모르고 방방 뛰는 작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엄마는 며칠 전부터 내게 입단속을 시켰다.

"너 말야, 할머니 따라 갈려거든 입 꼭 다물고 있어야 한다. 누가 알기라도 하면 금방 옥자가 눈치 챌 텐데, 그랬다간 너도 못 가는 줄 알어."

난 어릴 적부터 역마살이 심했던 거 같다. 어려서 좀 어리버리한 편이었는데도 엄마와의 약속은 단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나들이가 깨질 수도 있다는 긴장감으로 머릿속에 빨간 신호등이라도 달았던 모양인지... 암튼 할머니의 나들이는 미리 계획돼 있었고, 엄마의 고민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할머니 혼자 가시면 적적하실테고, 둘을 다 딸려 보내자니 할머니가 힘드실 것 같고. 그래서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 사이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사실 할머니에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계집아이 둘을 딸려 보내는 건 무리였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하지도 않은데다 십리를 걸어가서 버스를 타야 하고 보통 두 번은 갈아 타야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옥자는 차 멀미까지 하니 애초부터 선택권은 내게 있었던 것.

옥자가 그 얘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거의 30년이나 지났는데. 난 그때, 그리고 그 얘기를 듣기 직전까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우리집에서 사니까, 우리 할머니고 그러니 내가 가는 게 당연하다고. 아마 옥자도 그런 마음이 조금은 있었기에 그동안 말을 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런데도 그 말을 듣는 내 마음은 어찌나 쓰리고 아팠던지, 머릿속에선 30년 묵은 영상이 그대로 생중계 되고 있었다. 할머니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고개를 오르다가 숨을 몰아쉬며 돌아보았을 때,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우리 집 마당에 언제 왔는지 옥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애는 어찌 할 줄 모르고 방방 뛰다가 냅다 돌아서 사라져 버렸다.

난 그 광경을 몇 번 목격했지만 승리를 쟁취한 자만이 느끼는 통쾌함을 안고 유유히 고개를 넘었다. 아니 조금 안타까웠던 적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고백하건데, 버려진 동생의 상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할머니와 가는 나들이에만 신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 옥자에게 변변히 용서를 구하지도 못했다. 솔직히 그 방면에 둔감했던 난 너무나 당황했던 것이다. 너무나 당황해서 밤새도록 인간과 상처에 대해 생각했고, 몇 날 며칠이나 인간은 왜 상처 없이는 살 수 없는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물론 내 어린시절의 불만도 그 순간부터 눈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어쩌면 상처는 성숙한 인간을 만드는 영양분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건방지게. 그러고도 15년 세월이 흘렀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해야겠는데, 아무래도 생뚱맞다고 오히려 핀잔을 들을 것만 같다.

덧붙이는 글 | '차별의 기억' 응모글입니다.



태그:#차별,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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