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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1남 5녀중 장남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30분 누님을 둔 이란성 쌍둥이다. 

이쯤이면 짐작을 할 것이다.

 

40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들이 많았다. 누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더블어 그동안의 아픈 짐을 이 기회를 빌어 풀어 보고자 한다. 오래전 드라마로 제작된 <아들과 딸>에서 귀남(최수종역)이와 후남(김희애역)이를 생각하면 될 거 같다. 몇가지 틀린 부분을 제외하고 거의 스토리가 같다.

 

유아시절 일이다. 유난히 어머니 젖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누님은 어머니 젖을 물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얼마 떨어져 있는 큰이모님댁으로 가야 했다고 한다. 집에서 떨어지기 싫어 몸부림치고 크게 울며 떠밀리다시피 끌려 갔다고 한다. 얼마동안 떨어져 다시 집으로 올때 핼쑥해진 누님을 보며 어머니는 함박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누님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내가 먼저 갔다. 집에서는 동생, 학교에서는 선배로 불려야 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했다. 같이 있을땐 상관없다. 그러나 누님 동창들과 함께 자리를 할 때 반말을 하는 누님 얼굴을 쳐다보던 후배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혹스럽기도 하려니와 후배들 모임 자리에는 참석치 않으려고 노력을 했던거 같다.

 

귀한 아들이었을까. 아버님은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를 한동안 자전거에 태우고 동네 한바퀴를 돌고 나서야 학교로 향했다고 한다. 아들을 동네방네 자랑하고픈 마음이었을게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작 아들을 당신 자랑거리로 생각하셨을런지도 모른다. 누님을 태우고 학교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또 한가지. 읍내로 이사를 나오기 전 초등학교 3학년까지 집에서는 농사를 지었다. 시골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답을 오고가며 일을 할 때다. 그런데 난 농사에 대한 기억이 없다. 큰누님부터 동생들까지 소일꺼리 한두까지쯤은 할때다.  난 그저 놀거나 집밖을 나가 본적이 없었던  거 같다. 지금 시대에 청천벽력같은 상황 전개지만 부모님 세대에 어느정도는 이해는 간다.

 

현재 쌍둥이 누님은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누님과 나는 몇개월 차를 두고 결혼을 했다. 다행히 결혼식만큼은 누님이 먼저 했다. 나름대로 다행이라고 생각을 한다.

 

성인이 되어 둘만의 대화를 가져 본 적이 있다. 선배와 후배가 아닌 누님과 동생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상황을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한동안은 어린 시절 기억 때문에 우울증까지 겪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충격으로 다가 왔었다. 그동안 얼마나 야속 했을까 생각하면 지금은 누님과 매형, 조카에게 잘해 줄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도 가끔은 반말을 한다. 고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튀어 나온다. 매형께는 호칭이 쉽게 되는데 누님께는 가끔 반말이 섞여서 나온다. 긴긴 세월동안 버릇이라고 치부하기 전에 내 자신이 먼저 고치려 노력하고 있다. 자연스레 조카가 생겨서 지금은 누구 엄마 또는 누님이라고 호칭을 하고 있다.

 

지지난주에 전라도 무안에 계시는 누님댁에 다녀왔다. 누님, 매형, 조카 올망졸망 잘 살고 계셨다. 무안 앞바다 뻘에 나가 세발낙지, 조개, 굴을 한바구니 따서 그날 밤 맛있게 같이 먹었다. 열손가락 물어 안아픈 손가락 어디 있겠냐마는 씁쓸한 차별의 기억이 이순간 사랑으로 다가 오는 듯하다.

 

누님 행복하게 잘 지내도록 해요.

덧붙이는 글 | "씁쓸했던 차별의 기억" 응모


태그:#차별의 기억, #쌍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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