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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그콘서트>에서 '할매가 뿔났다'라는 제목의 코미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코미디언 장동민이 괴팍한 성질의 노인으로 분해 가족들과 빚어지는 일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짤막한 코너다.

 

극 중 할머니는 딸의 행동이나 말을 오해해 화를 내기도 하고, 가물가물한 시력 탓에 염색약을 남편에게 먹였다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손자는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를 피해 집 언저리를 맴돈다. 불협화음 가득한 이 우스꽝스러운 가족의 중심에는 역시나 '할매'가 있다.

 

구부정한 허리를 한 손으로 짚어가며 비뚤배뚤하게 걷는 모습은 영락없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경계 대상 1호감이다.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법 없이 비꼬아서 이해하기 일쑤요, 남 흉보는 일을 업으로 삼아 동네를 어슬렁거리기 일쑤니까. 싸움 나면 중간에 끼어들어 일만 더 크게 만들고, 남의 호의도 부정적으로 해석해야 마음이 편하다. 말 그대로 제대로 뿔이 난 셈이다.

 

등 돌린 가족, 물과 기름처럼

 

내게도 그런 할머니가 있다. 팔순이 다 된 김희순 여사는 모시겠다는 자식들을 뿌리치고 열 평이 채 안 되는 반지하 방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젊었을 때 힘깨나 쓰셨다는 할머니는 당시 열 명(당시에는 삼촌·이모들과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았다)이 넘는 집안의 가장 강력한 권력자였다. 할아버지는 복덕방에서 장기를 두느라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가난한 전라도 아낙네는 서울에서 충청도 청년을 만나 살림을 꾸렸지만, 둘 다 돈 버는 재주는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내내 생활고에 시달렸던 일가의 아이들은 대학 문턱 한 번 구경하지 못한 채 십대 초중반의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사회에 뛰어들었다.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여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이스께끼'나 군고구마 장사, 유아용품 영업사원을 하다 을지로에서 자리를 잡아 인쇄기술자로 성장했다. 작은 아버진 국졸 출신이었고, 위암으로 돌아가시기까지 공사판을 전전했다. 세 딸 중에서는 막내가 공부에 재능이 있었지만, 끝내 돈이 없어 호텔에 취직해야 했다. 막내고모는 성적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나서, 방안에 틀어박힌 채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불만 많은 대가족을 이끌어가야 했던 할머니에게 아들·딸들 괴롭히는 일은 일상 그 자체였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발가벗겨 매를 들었다.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결코 참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집밖을 맴도는 할아버지보다 더 강력하고 무서운 독재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일찌감치 폐암으로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시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그 관계는 서서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병들고 늙어버린 할머니는 어느새 자식 눈치를 보게 되었고, 아버지는 할머니만 보면 으르렁거렸다.

 

둘은 마치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았다. 만나면 5분도 안 되어 목소리가 커졌고, 이내 서로 등을 돌렸다. 아버지는 전라도 사람은 무조건 싫다고 했다. 충청도 분이면서도 그는 항상 전라도 사람들은 만나지도 않고, 말도 섞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뿔난 할매가 오르는 마지막 계단

 

언젠가부터 할머니는 <개그콘서트>의 그 '할매'처럼 뿔난 노인이 되어버렸다.

 

내게 전화를 걸어 친척 누군가가 괴롭힌다며 하소연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입에도 담지 못할 욕을 했다고 하고, 때로는 아버지가 자신을 때렸다며 내게 '존속학대'가 적힌 종이쪽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과거의 영광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진 할머니는 아직까지도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친척이나 가족 간의 다툼도 늘어났다. 누군가는 할매의 말을 믿었고, 그 때문에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윽고 등을 돌렸다.

 

일가는 점점 '콩가루'가 되어갔다. 일가의 큰 집안행사가 있어도 다 모이는 일이 드물었고, 이따금씩 돈 봉투만 보내는 경우가 흔했다.

 

아버지나 내 여동생, 그리고 그에 동의하는 친척 몇몇은 소곤거리며 할머니에 대해 말했다. "치매, 가실 때가 된 거야. 못 살겠네, 정말." 할매의 이해 받지 못할 행동과 독선은 차츰 가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 할매가 최근 내게 전화를 걸었다. "어떡하니, 한쪽 눈이 아예 보이지 않아. 나머지 눈도 점점 흐릿해져 가는데…." 자존심 강한 할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들 노안(老眼)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 생긴 거라 병원에서도 어쩔 수 없다고 약을 챙겨줄 뿐이었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남은 생 동안 한쪽 눈은 볼 수 없다는 현실은 할머니에게 얼마나 큰 좌절감을 안겨 주었을까.

 

이후부터 할머니는 매일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시들어가는 육체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던 할머니는 '성령',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는 독실한 신자로 다시 태어났다.

 

최근 병든 할매를 위해 모처럼 친척들이 다시 모였다. 돼지 갈비를 뜯었고, 나를 비롯한 손자들은 노래방에서 춤추며 노래를 불렀다. 서로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다들 할머니의 남은 인생을 걱정하고 있었다. 무뚝뚝한 아버지도 이따금 담배를 피우며 할매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수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뿔난 할매의 성격을 쉽게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팔십 년 동안 굳어버린 마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있을까.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충청도 총각에게 시집와 평생을 자신으로 살아보지 못했던 사람. 몇 걸음만 걸어도 죽을 것 같다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할매는 이제 생의 마지막 계단을 향해 오르고 있다.

 

그곳에는 할매가 바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까. "너도 꼭 교회에 나가서 기도해." 기독교 신자가 아닌 나는 할매의 그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할매가 믿는 그 신을, '만들어진, 허황된 신'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었다. 할매의 길이, 남은 그 여정이 좀 더 찬란하게 빛나는 꽃밭이었으면 한다. 뿔난 할매여, 만만세.

덧붙이는 글 | '가족에게 길을 묻다' 응모글입니다. 


태그:#할매가뿔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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