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육체적·정신적으로 성인이 되는 시기"를 말한다. 갑작스런 변화에 심리적 혼란이 뒤따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도 부른다. 1990년대 중반,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이 사춘기를 오롯이 담은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MBC 청소년 성장드라마 <사춘기>다.
한국판 <케빈은 열두 살> <사춘기>는 요새 표현대로라면 '시즌'이 있었던 드라마다. 1993년 4월부터 95년 2월까지 1기 '동민(정준 분)의 사춘기'가 방영된 데 이어 95년 3월부터 96년 8월까지 2기 '재경(서재경 분)의 사춘기'가 방영됐다. 동민이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재경이라는 중학생의 사춘기로 이야기가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속설처럼 많은 사랑을 받은 건 단연 '동민의 <사춘기>(이하 사춘기)'다. 이런 까닭에 '동민'의 <사춘기>를 돌아보려 한다.
<사춘기>는 제목 그대로 사춘기를 맞은 중학생 동민의 이야기. 한국판 <케빈은 열두 살>이라고 볼 수 있다. 주로 자아, 친구관계, 짝사랑, 가족 등과 얽힌 동민의 고민으로 이뤄졌다.
사춘기 시절 누구나 경험할 법한 상황을 설정하고 이를 헤쳐나가는 동민의 모습을 재미있게 그려낸 것이다. 더욱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동민의 독백은 사춘기 소년의 심리를 섬세하게 전달해 한결 큰 공감을 얻었다. 한 편 한 편이 곧 동민의 일기였던 셈이다.
이런 사춘기는 '청소년' 성장드라마였음에도 당시 고른 연령대의 사랑을 받았다. 청소년들이 사춘기를 보며 고민을 나눴다면, 성인들은 추억을 회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준이 아닌 동민의 <사춘기>
동민 역은 실제 중학생이었던 정준(현재 29살)이 연기했다. 그래서인지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엉뚱한 정준의 연기는 옆집에 사는 중학생 동민이 튀어나온 것처럼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와 닿았고, 그만큼 동민은 많은 이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물론 최근 나온 성장드라마 <반올림>의 '옥림이(고아라 분)'나 <최강! 울엄마>의 '최강(진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범한 정준의 외모도 친숙함을 더하는 데 한몫했다.
사실 이 때문에 정준은 <사춘기>의 동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다. <사춘기> 종영 후 출연한 여러 편의 드라마·영화가 인기를 얻었음에도, 정작 정준의 포털사이트 연관검색어는 아직도 '사춘기'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사춘기 소년 동민 같았기에 받은 훈장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이 외에 '서원'이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인 박성희가 동민의 애틋한 첫사랑 성희 역으로 나왔고, 한때 그룹 야다의 멤버로 활동한 장덕수를 비롯해 이정호, 조명식, 박소정 박인선 등이 동민의 친구로 분했다. 또 체육선생님 역으로 김상중이 출연했던 것도 지금 보면 새롭다.
춘천을 알린 최초의 드라마<사춘기>의 또 다른 매력은 서울이 아닌 강원도 춘천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었다.(춘천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춘천 가는 기차'라는 노래처럼, 춘천에 대한 사람들의 낭만과 사춘기 중학생의 순수함이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춘기>는 이야기 곳곳에 춘천의 경치를 담아 그 강점을 제대로 살렸다. 그래서 '<사춘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자전거를 탄 채 호수를 끼고 달리는 동민과 친구들의 모습이다.
특히 동민과 친구들이 다니던 아름다운 학교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탁 트인 전경, 나무가 우거진 교정, 넓은 운동장과 잔디밭은 작은 대학캠퍼스를 연상시켰다. 강원사대부중으로 나왔던 이 학교는 실은 중학교가 아닌 고등학교로 춘천 후평3동에 위치한 강원사대부고다.
이처럼 드라마에 대한 동경이 춘천, 그중에서도 강원사대부고로 옮아가 <사춘기>를 추억하고자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사춘기>야말로 <겨울연가>보다 앞서 춘천을 알린 최초의 드라마다.
대본이 교과서에 실리기도S# 1 학교 강당
신체검사 날이다. 여기저기 신체검사 하는 모습이 죽 보인다. 키를 재는 아이, 몸무게를 재는 아이……. 담임선생님이 저울 눈금을 읽으면 부반장인 지연은 옆에서 기록을 한다. 저울 앞에 줄 서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여학생들은 울상이 되어 동동거리고 있다. 뚱뚱한 수진, 바들바들 떨며 저울 위에 한쪽 발만 살짝 올려놓는다.
담임선생님이 수진에게 똑바로 서라고 말하자, 수진은 마지못해 바로 올라서며 조마조마해한다. 담임선생님, 눈금을 보며 "25!"하고 외치자, 아이들 모두 놀라는데, 다시 담임선생님이 "곱하기 2"를 덧붙인다. 수진, 창피해하며 들어가고 아이들 웃는다. (후략)
<사춘기>는 드라마 대본으로써는 처음으로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1993년 4월 29일 방영한 <사춘기> '육체미 소동 편'의 대본이 2001년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 5단원 '삶과 갈등'에 20여 쪽에 걸쳐 실린 것이다. 학생들의 이해를 돕고자 참고자료로 비디오도 감상한다고 하니, 덕분에 <사춘기>는 요즈음 사춘기 소년·소녀들에게도 익숙한 드라마가 됐다.
'육체미 소동 편'은 1994년 6월 독일 뮌헨에서 열렸던 제16회 국제청소년방송제에서 청소년 픽션 부문 3위에 오르기도 한 수작. 남성적인 몸매에 관심을 두게 된 동민이 브래지어로 만든 가짜 가슴 근육을 착용하고 다니다 선생님에게 발각되면서 곤욕을 겪는다는 내용이다.
학교 신체검사에 긴장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체중계엔 깃털처럼 오르고 신장계에선 까치발을 드는 여학생들. 가슴둘레가 많이 나오게 하려고 신체검사 전 팔굽혀펴기를 하고 힘껏 숨을 들이마시는 남학생들. <사춘기>는 이렇게 평범한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냈기에 사랑받은 드라마다.
<사춘기>가 그리운 까닭어느덧 <사춘기>가 종영한 지도 12년.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사춘기>를 잊지 못한다. 2층 방 창문을 열고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사춘기 소년 동민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춘기>를 다시 보는 일은 녹록지 않다. 워낙 오래전 드라마다 보니 MBC에도 다시 보기는커녕 변변한 자료조차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MBC 프로덕션에서 편당 2∼3만원 정도에 디브이디(DVD)와 비디오를 판매하긴 하지만 동민의 사춘기만 106회에 달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 또한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다. 세월과 함께 늘어져 버린 비디오테이프가 야속하기만 하다.
또 드라마에 이어 나온 다섯 권의 <사춘기> 소설이 있지만 이미 절판돼 구하기가 쉽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그나마 사람들은 수업자료라 구하기 수월한 '육체미 소동 편'을 비롯해 몇몇 동영상과 인터넷 음원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춘기> OST 등의 흔적으로 아련한 옛 드라마를 추억할 따름이다
(<사춘기> OST 듣기).
이런 정보와 자료를 공유할 수 있는 곳으로는 인터넷 커뮤니티 '정준의 사춘기(cafe.daum.net/june94)'와 'MBC 청소년 성장드라마 사춘기(cafe.naver.com/127pp)'가 대표적이다. 이중 '정준의 사춘기'에는 그 시절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던 파일도 올라와 있다.
유독 <사춘기>가 그리운 건 돌이켜 보면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그 시절, 사춘기에 대한 애틋함과 맞물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