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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혜
대목장이라 그런지 썰렁하던 시골 5일장이 제법 왁자지껄하다. 생선이며 나물거리며 여러 가지 제수용품들로 장은 어느 때보다 떠들썩하다. 노점에 펼쳐진 과일가게, 신발가게, 양말가게, 옷가게도 평소의 한산함은 자취를 감추고 모처럼 사람들로 붐빈다.

색색의 옷들이 아기자기하게 걸려진 옷가게 앞에 한껏 등을 구부린 할머니께서 옷을 고르고 계신다. 아마 손녀의 설빔을 장만하시려는 듯싶다.

"올해 여덟 살인데…. 어떤 게 좋은겨? 이게 좋을까? 아니야 저게 좀 나아 보이기도 하구먼."
"할머니. 이건 어때요? 값이 좀 비싸기는 해도 이게 요즘 제일 많이 나가는 옷이에요."

앞가슴에 노란 해바라기가 수놓아진 초록색 스웨터.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볼에도 갖다 대보고…. 할머니는 흡족하신지 그거로 달라신다. 주섬주섬 허리춤을 뒤지시던 할머니께서 뭔가를 꺼내신다.

어찌나 야물게 동여매 놓았던지 매듭을 푸는데도 한참이나 걸린 할머니의 손수건 뭉치. 곱게 접힌 만 원짜리 두 장을 손수건 뭉치에서 꺼내 옷값을 치르신다. 할머니는 초록색 스웨터가 든 봉지를 보물보따리처럼 가슴에 안고 채소전으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한 발 두 발, 시야 밖으로 멀어져 가는 할머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코끝이 시큰해진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선 속에서 할머니는 점점 멀어져가고 급기야 내 두 눈에선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주루룩 흘러내린다. 어느새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떠들썩한 대목장 풍경만 눈물에 어른거린다.

엄마와 떨어져 할머니 손에서 자란 10여년의 세월. 마흔을 훌쩍 넘은 지금에도 그 10년의 기억 속엔 늘 할머니가 계시고, 그 기억 끄트머리엔 슬픈 상여소리에 멀어져 가던 할머니의 곱디고운 꽃상여가 있다. 그건 아마도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 내 유년에 대한 애틋한 슬픔이 가슴 깊은 곳에 슬픈 옹이로 박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의 아픈 손가락인 아버지

ⓒ 김정혜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할머니에게 있어 내 아버지는 유독 더 아픈 손가락이었다. 10남매 자식 중 하나라도 공부시켜 출세시킬 요량으로, 소위 땅 팔고 소 팔아 뒷바라지하는 우리네 농사꾼 부모들처럼 할머니도 아버지를 위한 희생어린 삶의 노고를 마다않으셨다.

'이 자식만이라도 출세하여 농군의 아들이 되지 않기를, 여러 형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기를….'

맑은 정화수 장독대에 올려놓고, 이른 새벽에도 달 밝은 한밤에도 할머니는 빌고 또 빌었다고 하신다.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덕분이었을까. 생전에 할머니 말씀을 빌리자면, 내 아버지는 이 빠진 입천장에 찰떡 달라붙듯 대학에 착 달라붙었다고 하신다.

바야흐로 개천에서 난 용이 되신 것이다. 돼지잡고 떡 해서 동네잔치 벌인 건 당연지사. 모르긴 몰라도 할머니는 더 절절하게 비셨을 것이다. 아들의 금의환향을 손바닥이 닿도록 비셨을 것이다.

ⓒ 김정혜
어느 날. 개천에서 용 된 내 아버지는 솜털 보송보송한 열아홉 처녀의 손을 잡고 할머니를 찾았다. 처녀의 배는 남산 만하게 솟아 있었다. 문고리에 손이 쩍쩍 달라붙던 지독히도 춥던 이듬해 겨울 정월 열 이튿날 새벽.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는 우렁찬 울음소리로 세상과 처음 만났다.

그 후. 할머니의 고달픈 세월이야 말해 무엇 하리. 유독 아픈 손가락의 금지옥엽은 할머니 치마폭에 맡겨졌다. 아들은 휘황찬란한 꿈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도시에서, 한 자락 꿈을 잡으려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고 있었고, 유독 아픈 손가락의 금지옥엽은 원하지도 않았건만 할머니의 등걸 같은 손길에 맡겨져야 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엄마란 말보단 할머니란 말을 더 빨리 배운 내가 무명 손수건 가슴에 달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그때까지도 아버지의 성공소식은 좀체 들려오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돈을 해주면 다음번엔 기어이 성공 할 것이라는 아들의 간청에 땅 팔고 소 팔아 아버지의 손에 돈다발을 쥐어 주셨던 할머니의 등걸 같던 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동구 밖 까치소리에 이내 희색이 만연하시다가도 어느새 먹장구름이 드리워지던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 무심한 세월이라니….

등걸 같던 할머니의 손은 더욱더 갈퀴가 되어갔고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엔 더욱더 깊은 골이 패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더 살갑게 나를 물고 빨고 어루만지셨다. 어미 떨어져있는 내가, 유독 아픈 손가락의 자식인 내가 그리도 짠하셨을까. 어미캥거루가 새끼 캥거루를 밤낮주야 배주머니에 차고 다닌 것처럼, 늘 할머니의 치맛자락에 싸여 있었던 내 유년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10년 동안 어머니였던 할머니

ⓒ 김정혜
내가 열 살 되던 해 가을. 할머니께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셨다. 용하다는 병원은 다 수소문해 다녀 봐도 할머니는 좀체 기력을 되찾지 못하셨다. 도대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원인도 밝히지 못한 채 의사들은 하나같이 고개만 흔들어 댔다.

할머니는 매 끼니 멀건 미음만 드셨고, 자리에 그냥 누우신 채로 대소변을 보셨다. 점점 야위어 가던 할머니가 종당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스르르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그러다 한밤중이면 뜬금없이 숨을 헐떡이시며 가슴을 치셨다. 그리곤 주절거리셨다.

'저 불쌍한 거. 저거 지 어매한테 보내야 내가 눈을 감을 긴데….'

할머니는 숨을 헐떡거리며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주절거리셨다. 그런 밤이 몇 날이나 지났을까. 솜뭉치 같은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떨어지던 겨울 밤. 할머니는 기어이 숨을 거두셨다. 내 손을 꼭 부여잡은 채.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북망산천 나는 간다. 어허야 허야.
정든 집을 이별하고, 만년 집을 찾아가네. 어허야 허야.
황천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황천이네. 어허야 허야.
빈손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돌아가네. 어허야 허야.
인제 가면 언제 올꼬. 한번 가면 못 온다네. 어허야 허야.
북망산천 멀고멀어, 한번 가면 못 온다네. 어허야 허야.
하느님도 무심하고, 대왕님도 무심하다. 어허야 허야….


꼭지할아버지의 선창과 상두꾼들의 뒤 소리를 메아리로 남기며 할머니의 꽃상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끝이었다. 할머니와 나와의 영영 이별이었다. 생전에 사시던 기와집 지붕이 삐죽하게 내려다보이는 산골짜기 양지바른 곳으로 할머니는 자리를 옮겨 누우셨다. 폭설이 온 세상을 가두어버렸던 35년 전 그 겨울. 할머니는 그렇게 천상으로 떠나셨다.

ⓒ 김정혜
10년 세월, 할머니는 내게 어머니였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주시며, 빈 젖꼭지 물려가며, 밤새 등을 토닥이시다 앙상한 가슴팍으로 숨 막히게 나를 끌어안고 주무셨다. 할머니 냄새에 익숙했고 할머니 손맛에 익숙했고 꺼칠꺼칠한 할머니 손길에 길들여졌었다. 어머니가 사다주시던 온갖 맛난 과자들보다 할머니의 허리춤에 감추어 두었던 눈깔사탕이 더 달짝지근했었으니….

"언제나 곁에서 지켜주마. 그러니 어려울 때, 힘들 때, 이 할미가 천상에서 도와주고 지켜준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네게 이 할미가 언제나 함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더러, 세상살이에 지쳐 삶의 고단함이 깊은 한숨으로 터져 나올 때면 나는 늘 할머니 생각을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신기하게도 새로운 힘이 솟고 그리하여 세상 살아갈 힘을 다시 얻는다. 나는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나를 무릎에 누이고 잠이 들 때까지 등을 토닥이시며 늘 주절거리시던 할머니의 그 말씀이 아마도 내겐 마법의 주문이라는 것을….

ⓒ 김정혜
마흔 넷의 대목장에서 만난 등 굽은 할머니, 손녀의 설빔으로 고운 초록색 스웨터를 사시던 그 할머니는 바로 내 할머니 모습이었다. 어찌 그 할머니뿐일까. 당신은 목 늘어난 헌 양말 신으셨어도 손자손녀 양말은 제일 좋은 걸로 서너 켤레나 달라시는 할머니, 조롱조롱 봉지마다 온통 손자손녀 먹을거리로 가득 채우고도 뭐 하나 더 먹일 게 없나 싶어 한 나절이나 발품을 파시는 할머니….

ⓒ 김정혜
설을 앞둔 시골 5일장, 일찌감치 장에 나오신 할머니들은 천생 내 할머니 모습 그대로이다. 추억이란 것은, 이렇듯 먼 세월을 지나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하여 그 아련함에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태그:#설 대목, #시장, #할머니, #자식 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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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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