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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문득문득 옆과 뒤가 궁금하다. 가끔은 이리저리 둘러보고 참견도 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되돌아보고 둘러보다 보면 경쟁에서 뒤처질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온다. 그래서 앞만 보고 달리게 된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쯤은 되돌아보고 둘러볼 기회가 생긴다. 누구나 그럴 것이라 생각하기에 경쟁에 뒤처질 것 같은 조급한 마음도 덜 하다. 그것이 한해의 마지막 12월의 여유로움이다.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것은 빡빡한 일상에서 윤활유 같은 것이다. 윤활유 같은 12월의 여유로움을 마음껏 즐기는 것도 삶의 작은 기쁨이다.

심장이 터질 지경이 될 정도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쉴 새 없이 뛰었던 한해였다. 타고난 성격이 경쟁적이지 못한 내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의아할 정도로 열심히 뛰었다. '닥치면 할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격려에 힘입어 시작하게 된 일이었다. 때로는 그 일을 시작한 것이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결과에 관계없이 뿌듯하기도 하다.

경험도 없이 뛰어든 선거판

▲ 선거 공보물(디자인 전공한 친구가 무료봉사한 작품)
ⓒ 이민선
올 초에 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지방선거 출마 여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출마하기로 결정하고 3월경부터 예비후보로 등록하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선거운동을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경험이 없다는 점'이었다. 선거전에 돌입하기 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선거운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나름대로 학습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에 비하여 다른 후보들은 익숙하고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기초의원에 출마했다. 민주노동당은 해당 지역 기초의원에 처음 후보를 내는 것이었다. 도와준다고 발 벗고 나선 사람들도 경험이 없고, 후보도 아는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었다. 내가 출마했던 지역은 총 5명이 후보로 나왔다. 그중 두 명은 현역 지역구 시의원이었고, 1명은 출마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도 선거판에서 참모로 뛴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입지도 않는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선거판에 뛰어들었지만 막막하기만 했다. 어디를 가야 할지! 누구를 만나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달도 뜨지 않는 어두운 밤길을 촛불 하나 없이 걸어가는 심정이었다. 양복에 넥타이 매는 것도 논란이 있었다. '서민의 정당'을 자처하는 민주노동당 후보이기에 허름한 점퍼를 걸쳐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논란 끝에 양복에 넥타이를 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머리띠 두르고 시위하는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정당이기에 부드럽고 정중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에서다. 타 후보에 비해서 나이가 적다는 점도 작용했다. 마흔도 되지 않은 후보가 점퍼를 입으면 자칫 건방져 보일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컴컴한 길을 갈 때는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경험 많은 상대 후보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본 다음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면 모방하는 것이다. 선거운동 초반에 이 작전은 주효했다. 얼굴을 많이 알리는 것이 선거운동 초반기의 목표였는데, 경험 많은 타 정당 후보를 따라다니는 작전이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선거운동 초반기에는 후보들끼리 정보도 서로 교환하면서 그럭저럭 사이좋게 지냈다. 가끔은 후보들끼리 만나서 함께 소주잔을 기울인 적도 있다. 너무 자주 만나다 보니 경쟁자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친해졌다는 느낌도 들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 쌓였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선거가 치열해지기 이전이라 후보들 간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있었기에 내 작전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예비후보 기간이 끝나고 5월 18일부터는 본 선거전에 돌입했다. 이때부터, 후보들의 눈에서 여유로움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명함을 나누어주고 인사하고 악수하는 행위 하나 하나가 긴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을 때는 악수할 때 손을 잡은 느낌만으로도 지지자를 가려 낼 수 있었다. 극도로 긴장하고 정신을 집중하다보니 눈빛, 표정, 손으로 전해지는 느낌만으로도 그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5.31일, 투표 당일 아침은 오히려 담담했다. 전날까지 내 몸을 괴롭혔던 초조함이 어디로 갔는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상쾌한 기분으로 투표했다. 그리고 다른 투표장소를 돌면서 유권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투표시간이 모두 끝나고 개표할 때는 사정이 달랐다.

낙선 인사도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극도로 긴장하다보니 몸이 공중에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개표방송을 지켜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안보고 있으면 궁금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개표가 절반쯤 끝났을 때, 모든 기대감을 접어야 했다. 기대를 접고 나자 긴장도 사라지고 허공에 몸이 붕 떠있는 느낌도 사라졌다.

다음 날부터는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몸에서 기가 쏙 빠져버린 느낌! 처음 맛보는 기분이었다.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체중이 6kg 정도 줄기는 했다. 그러나 체중이 갑자기 줄어서 체력이 떨어진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매사가 귀찮고 짜증스러웠으며 아무리 애를 써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낙선인사'라는 것을 해야 했다.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지지해준 유권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해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일리 있다' '맞다' '당연히 해야 한다'고 머리는 생각하지만 몸이 잘 따르지 않았다. 때문에 생각한 만큼 당당하고 멋지게 낙선 인사를 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의 걱정도 큰 부담이었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선거에 떨어진 아들이 죽도 못 먹고 굶는 줄 알고 계셨다.

"선거에 떨어지면 거지 된다는데 쌀은 떨어지지 않았느냐? 그리고 너무 낙심하지 말거라. 살다보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더 많은 법이다."

부모님은 선거에 떨어진 못난 아들 때문에 귀한 손자, 손녀가 굶고 있는 줄 알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리고 낙심해서 의기소침 한 나머지 아들이 폐인처럼 지낼까봐 전전긍긍 하셨다.

"아버지 돈 많이 드는 선거운동 하지 않아서 괜찮아요. 요즘은 선거 떨어진다고 밥 굶는 사람 없어요. 그리고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전화 통화를 수도 없이 했지만 부모님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주말에 고향집으로 찾아가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경제적인 문제도 걱정스러웠지만 아들이 낙심해서 의기소침 할 것을 더 걱정스러워하셨다.

"선거 치르고 난 후 많이 유연해진 것 같아"

▲ 9살 하영이(첫눈 온 날)
ⓒ 이민선
항상 철없어 보이던 아홉 살 하영이가 대견스러웠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하영이는 아빠의 명함을 가방에 몇 개씩 넣어 가지고 다녔다. 처음에는 그저 화려한 선거용 명함이 예뻐 보여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반 아이들에게 명함을 나눠주며 나름대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하영이가 친구들에게 명함을 나눠주며 유권자인 엄마나 아빠에게 보여주라고 부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라고 시킨 적도 없다. 그러나 효과는 있었다. 학부모들이 하영이 아빠가 출마한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하영이 덕이라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도 참 기특한 딸이다.

"선거 치르고 난 후 많이 유연해지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깊어진 것 같아. 그 전에는 고집스럽기만 했는데."

이 말을 가까운 사람에게 들으면서 내 몸에서 전해지는 변화를 감지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는 동안 생각의 폭이 넓어졌음을 느낀다.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던 일에 대해서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나를 발견한다.

선거운동을 할 때는 주로 유권자들과 대화를 했지만 선거가 끝난 이후에는 자신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했다. 난 사람과 세상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무척 많이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결심한 것이 '아무 것도 섣부르게 단정 짓지 말고 두 번 세 번 더 생각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몸으로 전해져서 유연해진 모습으로 비쳐졌으리라 생각한다. 한해를 마무리하며 뜨거웠던 지난 시간을 찬찬히 되돌아본다.

덧붙이는 글 | 2006 나만의 특종 공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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