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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이 차지했던 거실벽 한가운데 입니다. 녀석이 떠난 자리에는 아쉬움이라고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 이경운
<주몽>을 시작으로 <연개소문>과 <대조영>으로 이어지는 일주일간의 드라마 릴레이를 포기하고 산 지 석 달쯤 되었나 보다. 몇 주간 계속되던 금단현상도 이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여유롭다.

석 달 전만 하더라도 거실 벽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텔레비전이라는 녀석은 우리 가족의 일부분이었다. 정확하게는 우리 부부의 일부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와 아내는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나면 거실 소파에 앉아 그놈의 네모상자에 거의 넋을 잃다시피했다. 다섯 살 난 아들 녀석과 돌 지난 딸이 그 수많은 드라마들의 한 장면이라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무척 미안하다.

아내와 나는 어땠나.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둘은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무엇인가 함께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되고 말았다. 드라마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그저 보채는 아이들 달래가며 잠을 재우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거의 매일의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도 밤늦게야 잠이 드는 일이 빈번하게 되었다.

토요일, 일요일은 또 어땠나. 평일에 보는 드라마와 같은 시간대에 하던 다른 방송국의 드라마를 재방송으로 보겠다며 또 거실의 벽 한가운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휴일의 대부분을 보내기가 다반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역시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아들 녀석이 자꾸 텔레비전을 끄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한창 재미있던 장면이었는데, 드라마에 빠졌던 나는 버럭 큰소리로 아들 녀석을 야단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녀석 눈물을 그렁그렁하더니 한마디 던졌다.

"아빤 맨날 텔레비전만 보고 나랑 안 놀아 주잖아!"

난 그때 눈물 줄줄 흘리며 아빠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아들 녀석의 눈망울을 보고 말았다. '아차' 싶었다.

그날 난 아내와 텔레비전을 집에서 방출하는 건으로 심각하게 가족회의를 했다. 물론 다섯 살 아들 녀석도 함께.

아내는 일단 밤에 심심함을 어떻게 달랠까 걱정했지만 텔레비전이 가정생활에 방해가 된다는 것에는 동의했고, 없애 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잡았다. 텔레비전이 없으면 좋아하는 만화 비디오를 볼 수 없으니 다섯 살이지만 아들 녀석의 의견도 물어봐야 했다. 개념이 별로 없어서인지 어쩐지 아들 녀석도 텔레비전 방출에 동의.

아내와 나는 일단 텔레비전을 가까운 처가에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의 결정을 처가에 말씀드렸더니 장인어른이 말씀하셨다.

"심심해서 살 수 있겠나?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가져가게."

이렇게 우리 집 거실을 점령했던 네모난 텔레비전이라는 녀석은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 곁을 떠나게 되었다.

▲ 아들 녀석은 아빠가 읽어주는 동화책이 제일 재미있는 모양입니다.
ⓒ 이경운
녀석을 보낸 지도 석 달이 지났다. 그 석 달 동안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텔레비전의 소음들이 가득 찼던 거실은 아름다운 음악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돌 지난 딸아이는 음악에 맞춰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닌다.

아들 녀석은 텔레비전 방출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었다. 아빠가 매일 잃어주는 동화책에 흠뻑 빠져서 잠이 든다. 목욕하고 잠들 준비가 되면 꼭 다섯 권씩 동화책을 읽어주는데, 피곤해서 세 권만 잃자고 그러면 안 된다고 난리가 난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동화책 다섯 권을 읽고 나면 무슨 수면제라도 먹은 것처럼 금방 잠들어서 다음날 아침까지 잘도 잔다.

덕분에 아들 녀석의 취침시간도 한 시간 정도 빨라졌다. 요즘 아이들이 수면부족에 시달린다는데, 무척 다행이다.

▲ 오늘은 조금 일찍 재웠습니다. 특별히 한 권 더 읽어주고. 하하하!
ⓒ 이경운
아내는 딸아이와 놀아주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 드라마 때문에 아이들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적이 많았는데, 이제는 주로 딸아이와 놀아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으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텔레비전이 없어진 후 무척 바빠졌다. 야근이나 모임으로 피곤하게 집에 들어와도 아들 녀석 동화책 다섯 권 때문에 그냥 쓰러져 잠을 잘 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주말이면 온 가족을 태우고 미술관이며 동물원에 다녀야 한다. 주말 계획을 세우는 것도 여간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런 걸 즐거운 고민이라고나 해야 하나?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아내와 나는 텔레비전을 집에서 내보낸 일을 올해의 최고 사건이자 가장 잘한 일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다. 텔레비전을 없애고 나서야 우리 가족들이 그 녀석의 지배하에서 얼마나 단절되고, 무관심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여간 지금 우리 가족은 텔레비전 방출 후 최소 열 배는 행복해졌다.

텔레비전이 무슨 죄냐며, 시간 정해 놓고 보면 되지 그렇게 의지가 약해서야 어떻게 세상 살겠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텔레비전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한번들 생각해 보시라. 혹시 거실을 텔레비전이라는 녀석에게 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2006년 나만의 특종>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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