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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해 농사 지은 고추를 방앗간에서 빻는 어머니, "고추가루는 그래도 똑딱 방아에 빻아야 제맛이여"
ⓒ 강기희

이 글을 쓰면서 몇 번이나 쓰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개인적 영역을 넘어 집안의 이야기라 많이 망설였다.

그렇다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정도로 거창한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어느 집이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굳이 들춰내야 할 일도 아닌 것이다. 부끄러운 집안의 부끄러운 스토리이기에 더욱 그렇다.

빚잔치로 집 날리고 서울로

내가 집을 떠난 건 1982년이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떠난 것이다. 그와 함께 부모님과도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물론 방학 동안에는 잠시 부모님과 함께 지낸 날이 있었지만 떨어져 살았던 기억이 더 많다.

철이 없었던지 아니면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 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던지 집을 떠나는 것에 슬픔이나 미련 같은 건 없었다. 자연스런 현상쯤으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살았다.

그러던 중 1990년초, 부모님은 옷가지만 챙겨 서울로 이사를 했다. 그 일로 인해 집과 함께 하던 모든 추억이 고스란히 사라졌다. 앨범은 물론이고 책과 일기장까지 다 버려졌다. 떠나있는 사이 집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내 소중한 것들을 챙겨오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도 할 수 없었다. 부모님께서 감당해야 할 아픔이 나보다 훨씬 더 컸을 테니까.

심한 멀미로 버스 한 번 타지 못했던 어머니의 서울행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육순이 넘은 아버지는 살던 집을 빚잔치로 날렸다. 아버지로서는 고향 땅에 남아있기가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정선 일대에서 가장 큰 약초상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광활'이라는 약재를 대량 재배하다 빚만 덜컹 지게 된 게 빚잔치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미 분가를 해 근동에서 살고 있던 큰 형이 집만 넘겨받았어도 굳이 빚잔치를 하지 않았어도 되었다. 그러나 큰 형은 집 맡기를 거부했고 아버지는 미련없이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동대문구 제기동에 월세방을 얻었다. 자식으로 바라보기 민망했지만 당시 내 처지도 그러했으므로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명절날이면 작은 방에 끼어서 잠을 자곤 했다. 연탄 가스가 스며드는 방이었지만 그래도 부모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좋았다.

"사내는 길에서 인생을 배워야지"

▲ 텃 밭에 심은 갓을 뜯는 어머니, 갓 김치 맛이 궁금하시죠?
ⓒ 강기희

부침이 많은 삶을 살아왔던 아버지는 지난 1999년에 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살던 집을 몇 번이고 팔아야 했던 일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어머니는 그 즈음부터 아버지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인 내게 아버지는 화끈하고 남자다워 좋았다. 고교시절 배낭을 꾸려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알아서 여비를 챙겨주시던 아버지였다. 그럴 때마다 겁이 많은 어머니는 무서운 세상이라며 여행길을 막아섰다.

"무섭긴, 사내자식은 길에서 인생을 배워야 하는 거여."

아버지는 그런 말로 아들을 여행지로 떠나보냈다. 1998년 초, 아버지는 고향인 정선으로 돌아가고 싶다 했다. 이미 칠순도 훌쩍 넘겨 초로의 늙은이가 된 후였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선평에 집을 구했다며 한 번 보고 오라 했다. 아버지가 구해놓은 집은 너무 낡아 수리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 와중에 큰 형 내외가 아버지가 근처로 오는 걸 극구 반대했다. 노부모를 모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관청에 알려지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다며 반대를 한 것이다. 당시 큰 형은 면사무소에 환경미화원으로 근무했는데, 그래도 공무원의 신분이었다.

아버지의 고향행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돌아오는 길 정선 버스터미널에서 생활 정보지 한 부를 챙겨왔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생활 정보지에서 빈 집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위치는 영월군 주천면이었다. 영월이면 고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데다 서울에서도 부담스런 거리는 아니었다.

다음 날 주천행 버스를 탔다. 주인에게 물어 빈 집을 찾아갔다. 대문을 들어서니 호두나무 한 그루가 마당가에 있었고 허물어지긴 했지만 담장도 쓸 만 했다. 주인에게 당장 집을 쓰겠노라 전화를 했다. 주인은 그래도 계약이니 전세금 형식으로 50만원이라도 걸으라고 했다.

그쯤이야, 하고 선뜻 냈다. 그리고 일주일 후부터 집수리를 시작했다. 혼자 먹고 자면서 뜯고 치우고 쌓고 세우고 바르고 묻고 칠하고를 한 달 가까이 했다. 수원에 사는 작은 형은 집수리에 필요한 자재를 날라다 주었다.

집수리를 끝내고 부모님을 모셨다. 그날은 동네 잔치를 곁들인 술자리까지 마련했다. 아버지는 그 집에서 행복해 했다. 마당엔 텃밭도 가꾸었다. 여름이면 가꾼 채소로 쌈도 쌌다.

아버지의 행복은 채 2년도 가지 않았다. 1999년 초 위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는 그해 10월 중순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76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문제였다. 무서움을 많이 타는 어머니는 혼자서는 죽어도 못 살겠다고 했다. 결국 막내 여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했다. 마침 아이들이 어린 탓에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였다. 어머니는 천마산 아래에 있는 여동생 집에서 7년을 살았다.

길지 않았던 아버지의 행복

▲ 어머니가 심은 배추, 포기가 안지 못해 배추 김치는 담그지 못했다.
ⓒ 강기희

아이들이 커가면서 어머니는 정선으로 갔으면 했다. 그럴 때마다 큰 형의 대답은 '노'였다. 어느 날인가 술 한잔을 하고 큰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굳이 장남이 아니라도 자식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나 의무가 없느냐고 따졌다.

"배운 놈이 어머이 모셔!"

큰형의 말이었다. 가슴이 턱 막혔다. 할말도 없었다. 전화를 끊고 많은 생각을 했다. 배운 게 죄라면 그렇게 해야겠지. 그러나 당시만 해도 도시에 살고 있었으니 그럴 재주도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려면 정선으로 가야만 했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다. 지난 해 가을, 느닷없이 5000만원이란 거금이 어머니의 통장으로 들어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 형이 퇴직을 하면서 받은 퇴직금을 어머니 앞으로 분산시켜 놓았던 것이다. 처음엔 돈이 잘못 입금되거나 아버지의 돈인 줄 알았다.

15년 간이나 어머니를 찾지 않던 큰형 내외는 자신들의 돈을 찾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 돈으로 인해 어머니는 몇 번이나 정선에 와야만 했다. 돈 주인인 큰 형이 지급정지를 신청했고, 지급정지를 풀려면 어머니가 직접 도장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큰형이 진짜 아들이고 형이 맞느냐고 물었다. 맞단다. 어머니는 첫 아들이라 온갖 귀한 것을 먹여 키웠더니 이제 와서 어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못 가르친 게 마음에 걸리지만 그 땐 다들 그렇게 살았어. 아버지가 실패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쯤 한 자리했을 테지만 사는 게 어디 맘대로 되던 시절이었더냐."

가슴이 턱 막힌 한마디 "배운 놈이 모셔!"

나와 큰형과는 나이 차이가 13년이나 났다. 그러니까 큰형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는 금광에 돈을 쏟아붓다 집까지 날렸다고 한다. 그 일로 큰 형은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1960년 초의 일이다.

그때 작은형은 큰형에게 모시지 않을 거라면 어머니가 정선에서 머물 방을 구해 드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어차피 통장에 있는 돈이라면 어머니를 위해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도장이 필요했던 큰 형은 그러마 했지만 올해 설날 만났을 때는 말이 달랐다.

"배운 놈이 어머이 책임져!"

큰형이 전에 했던 말을 또 하고 있었다. 화가 치밀었다. 나는 "알았어, 모시면 될 거 아냐"라며 어머니를 모시고 나왔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정선 가리왕산 자락에 집을 구했다. 당시 살고 있던 평창의 집보다도 커 어머니가 지내기에도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겨울에 시작한 집수리는 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봄이 완연해진 5월 8일 어머니를 모셨다. 그날은 마침 어버이 날이었다. 어머니는 동생이 달아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꿈에도 그리던 정선으로 왔다.

"어머이, 다옹다옹 하면서 잘 살아봅시다. 먹을 게 지천으로 널렸는데 설마 굶기야 하겠소."

24년 만에 시작한 '지각 효도'

▲ 겨울을 맞은 어머니, 시골살이가 좋은지 건강한 모습이다.
ⓒ 강기희

함께 살면서 처음 한동안은 어머니와 다툼도 있었다. 다툼은 늘 사소한 일로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내 생활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어머니의 메마른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아픈 세월을 치유하려면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 같았다.

얼마 전부터는 다툼도 시들해졌다. 어머니가 하는 일에 간섭을 하지 않으니 다툼도 자연히 줄어들었다. 엊그제는 농구공 만한 말벌 집 하나를 구해왔는데, 그걸 본 어머니가 "이 귀한 걸" 하며 활짝 웃었다.

다툼이 시들해지니 적막한 시골살이에 중요한 양념 하나가 빠진 것 같다. 어떤 날은 심심한 탓에 일부러 시비를 건다. 그런 날은 다툼도 일찍 끝난다. 요즘엔 입을 한발이나 빼물고도 며칠씩 견디던 날이 그립다. 오늘은 어머니께 어떤 시비를 걸어볼까.

덧붙이는 글 | * '어머이'는 '어머니'라는 뜻의 강원도 정선의 사투리이다. '아버지'는 '아버이' 이고, '할머니'는 '할머이', '할아버지'는 '할아버이' 라고 했다. 요즘엔 많이 쓰이지 않는다.

* '2006, 나만의 특종' 응모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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