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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에 늦을까봐 택시를 탔는데, 2차선 도로를 꽉 메운 차들 때문에 차는 한 뼘도 움직일 엄두를 내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무슨 일은요. 여기 미술학원들 때문에 이 시간이면 늘 이래요.”

택시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그러고 보니 차선 하나는 아예 미술학원 버스와 학부모들이 타고 온 승용차들의 주차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미술 하는 학생이 참 많네요.”
감탄하듯 혼잣말처럼 흘린 말에 택시기사가 또 냉큼 답합니다.

“공부 못해도 돈만 있으면 대학 가는 게 미술이잖아요. 아주 극성들이에요.”
공부 못해도 돈만 있으면 갈 수 있는 미술대학...

▲ 내 기억 속 최초의 화실
ⓒ 김수자
집에 돈이 없는 줄 알았던 나는 미술대학에 가겠단 말을 차마 못했고,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는 대학이라 생각했던 부모는 부모대로 미술대학 얘긴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생대회만 나가면 상을 타오던 아이였지만, 형제자매가 내미는 우등상의 자랑에는 늘 뒤로 밀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미술을 하겠다 주장하지 못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내내 미술을 하고 싶다고 앓았나 봅니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에 처음 화실이란 걸 다니게 되었습니다. 혼자 앓는 누이를 보다 못한 오빠들이 나서서 간신히 성사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살림에 그럴 듯한 미술학원이나 이름난 교수를 찾아갈 엄두는 낼 수 없었지요.

오빠의 아는 이의 아는 이를 통해 알게 된 화가의 집이자 작업실이자 교습소이기도 한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국전이며 이런저런 미술대전에서 꽤 큰 상을 받아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숨이 턱에 닿는 아현동 고갯길을 올라가며 상상했지요. 고흐의 노란 방 같은 화실, 영화에서 본 모딜리아니의 여인숙 같은 작업실, 어쩌면 배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살풍경하면서도 포스트모던한 공간일지도 몰라.

고갯마루에서 골목을 이리저리 들어간 끝에 그 집이, 아니 그 방이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낡고 을씨년스런 일본식 목조가옥의 계단을 올라가자 화가의 방이 나왔습니다. 미술대학은 다니지 않았지만 스스로 일가를 이뤄 화단에선 꽤 알아주는 사람이란 오빠의 소개와 달리, 수염이 덥수룩한 그는 한눈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고 입성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수줍어하는 걸까, 싶을 만큼 말수 적은 그가 웅얼거리듯 앞으로의 교습에 대해 몇 마디 했습니다. 해가 아직 훤한 오후였는데도, 그 방은 커튼을 드리워 모든 자연광을 지우고 오로지 하얀 형광등만 형형했습니다. 라면을 끓여 먹었는지 방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라면 냄새가 자욱했습니다. 그날 이후 일주일에 두 번씩 이층 그 방을 찾을 때마다 그 냄새는 늘 거기서 나를 맞았습니다.

이제 막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화가는 두어 명의 학생을 가르쳐 라면과 오일과 캔버스와 방값을 대는 모양이었습니다. 4시에서 5시 사이, 내가 아현동 고갯길을 헐떡이며 걸어 올라가 그 방에 들어가면, 화가는 좀 전에 깬 듯한 부스스한 얼굴로 형광등 불빛 아래서 전날 밤의 작업을 곰곰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스스로에 대한 희열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는 이를 어처구니없게 만들기도 했지만, 대개는 뭔가 못마땅한 듯 노려보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가끔씩 화가의 애인이 찾아오면 라면 냄새 떠도는 그 작고 을씨년스런 공간도 조금 활기를 찾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데생과 수채화를 배우던 5개월 동안 그 햇빛 없는 방의 풍경과 냄새는 늘 비슷비슷했습니다. 아무 장식도 어떤 겉치레도 없는, 간이 씽크대와 석유 난로와 이젤 두 개와 나무 의자 몇 개, 침대 하나, 그리고 완성했거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캔버스들이 벽에 기대선 그 풍경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늘 밤을 새워 그림을 그리고 못마땅한 듯 보고 또 보는 병색이 깃든 화가의 모습도 그대로였습니다.

그 시절, 나는 그 방과 그의 모습이 화가의 전형이라고 믿었습니다. 가난한 열정은 화가의 신분증 같은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 아래에서 잠들 수 있으려면,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될 실패를 피하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을 해 가나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고 썼던 고흐의 심정을 아름다운 결의로만 받아들이던 청춘이었으니까요.

택시가 밀린 차들 사이를 간신히 비집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우뚝우뚝 솟은 미술학원들마다 00대학 회화과 20명 합격! 00대학 조소과 수석 입학! 따위의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학원 입구엔 분명 선생들의 붓질이 닿은 데생들이 학생들의 이름을 달고 늘어서 있습니다.

저들 중에 “적어도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 아래에서” 잠들 수만 있다면 성공이 아니라 실패와 맞서 전력을 다해 그림을 그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리석은 생각을 합니다.

내게 데생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던 그 가난한 화가의 이름을 나는 그 뒤로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간다는 미술대학을 다니지 못하고도 화가로서의 자부를 잃지 않았던 나의 첫 스승, 아현동 적산가옥에서 밤을 도와 그림에 매달렸던 그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부디 스스로 매명의 길을 덮었을 뿐, 지금도 모든 빛을 가린 채 형형한 형광등 아래서 꼭 그려야 할 그림을 그리고 있기를, 당신의 모자란 제자는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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