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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은 갈빛 도토리 속에도 물든다
ⓒ 이종찬
무공해 건강식 도토리

시월 중순, 숲길에 가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갈빛 도토리가 투둑투둑 떨어지고 있다. 도토리를 한 톨이라도 더 줍기 위해 일부러 도토리나무 가지를 잡고 손으로 마구 흔들거나 밑둥치를 발로 차지 않아도 된다. 저마다 독특한 모양의 열매를 영글고 있는 풀숲 곳곳에 갈빛으로 물든 예쁜 도토리가 수북히 뒹굴고 있기 때문이다.

도토리는 예로부터 묵을 만들어 구황식(평소에는 거의 먹지 않지만 천재나 전쟁 등을 당했을 때 식량이 부족할 때 먹는 자연식품)이나 별식으로 많이 먹었다. 하지만 먹고 살기가 좋아진 요즈음의 도토리묵은 끼니를 떼우기 위해서 먹는다기보다는 간식이나 반찬거리 혹은 술안주로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도토리묵을 만드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손이 많이 간다. 먼저 가을에 주운 도토리의 껍질을 까서 가을햇살에 말려 절구에 빻은 뒤 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려낸다. 그리고 윗물 아래 있는 앙금만을 모아 솥에 물을 붓고 넣고 끓인 뒤 사각이 진 틀에 넣고 식혀 그대로 굳히면 된다.

잘 만든 도토리묵은 쉬이 부서지지 않으며, 탄력이 있다. 게다가 입에 넣으면 약간 떫은 맛이 나면서도 독특한 향기가 나며, 쫄깃하게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도토리묵은 무공해 식품으로 탄닌 성분이 많아 소화가 아주 잘 되며,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만든다. 강원도 삼척에서는 도토리묵을 '밤묵'이라 부르고, 경상도 창원 마산에서는 '꿀밤묵'이라 부른다.

▲ 도토리묵을 만들기 위해 가을햇살에 말리고 있는 도토리
ⓒ 이종찬
▲ 2006년 가을은 그렇게 도토리묵과 함께 나그네의 품에 포옥 안겼다
ⓒ 이종찬
"니, 퍼뜩 가서 꿀밤 주워 온나" 어린 시절 추억 담긴 도토리

1970~80년대, 내가 스무다섯 해까지 살았던 동산마을(지금의 창원시 상남동)에는 꿀밤나무(도토리나무)가 참 많았다. 해마다 시월이 되면 마을 앞을 실뱀처럼 휘어져 흐르는 도랑 둑 곳곳에 마을 지킴이처럼 우뚝우뚝 서 있는 꿀밤나무에서는 갈빛으로 빛나는 예쁜 꿀밤이 투둑투둑 떨어져 내렸다.

그때 나와 동무들은 머리를 톡 톡 때리며 떨어지는 그 꿀밤을 주워 팽이를 만들어 돌리기도 했고, 그대로 이빨로 깨물어 반으로 쪼갠 뒤 노오란 속을 파먹기도 했다. 꿀밤은 몹시 떫었다. 하지만 눈깔사탕을 사 먹을 형편도 되지 않았던 나와 우리 마을 아이들은 그 떫은 꿀밤을 인상을 찌푸려가면서 오도독오도독 씹어먹었다.

"니, 퍼뜩 가서 꿀밤 좀 주워 온나. 꿀밤 줍다가 하나 둘 까먹지 말고."
"도랑 둑 곳곳에 흔해 빠진 기 꿀밤인데, 와 까묵지(까먹지) 말라 캅니꺼?"
"생꿀밤을 너무 많이 먹으모 통시(화장실)에 가서도 뒤를 보기가 에렵다(어렵다)카이."
"꿀밤묵을 먹을라카모 오래 기다려야 된다 아입니꺼?"
"요새 가을볕이 하도 좋아서 한 이틀 말리모 될 끼다."


그랬다. 그 맛난 꿀밤묵을 먹으려면 일주일쯤 꾸욱 참고 기다려야만 했다. 어머니께서는 갈빛 꿀밤이 가을햇살에 바싹 마른 뒤에서야 도구통(절구통)에 마른 꿀밤을 수북히 넣고 절구로 콩콩콩 찧었다. 그리고 곱게 찧은 꿀밤가루를 하룻밤쯤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꿀밤가루를 건져내 쇠죽솥에 넣고 팔팔 끓여 도토리묵을 만들었다.

▲ 팔공산 은해사 아래 가면 도토리 천국이 있다
ⓒ 이종찬
▲ 물에 불리고 있는 갈빛 도토리
ⓒ 이종찬
우리집 가을은 갈빛 도토리에서 시작됐다

"아까부터 와 한쪽 방향으로만 자꾸 젓는데예?"
"그래야 도토리묵에 구멍이 숭숭 안 뚫린다 아이가. 너거들이 공부할 때 머리를 쓰는 거 맨치로 음식 한 가지를 만드는 데도 머리로 잘 써야 보기 좋고 맛있는 음식이 되는 기다."


한 가지 재미난 것은 도토리가루에 물을 붓고 끓일 때 어머니께서는 주걱으로 한 쪽 방향으로만 계속해서 휘젓는다는 것이다. 이어 뻑뻑한 도토리가루에서 거품이 푹푹 피어오르면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개비를 몇 개 빼내 불길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몇 번 더 저어주다가 사과박스에 비닐을 깔고 부어 식히면 그만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만든 도토리묵을 부엌칼로 두부 한 모 크기로 잘라 물에 담가 두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술상을 차릴 때나 끼니 때에 고춧가루와 참기름이 동동 뜬 양념장과 함께 상 위에 올렸다. 도토리묵을 물에 담가 두어야 말라붙지 않고, 먹을 때마다 혀끝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지면서도 쫄깃하게 씹힌다는 거였다.

어릴 때, 그러니까 십대 시절 나는 해마다 가을이 깊어갈 때면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던 그 갈빛 도토리묵을 참 많이도 먹었다. 또한 집 앞마당에 곳곳에 펴논 덕석에 수북히 깔린 갈빛 도토리가 따가운 가을햇살을 먹으며 딱딱하게 익어가고 있어야 비로소 우리집에도 가을이 다가온 것으로 여겼다.

▲ 도토리묵 드시고 가을의 품에 포옥 안기세요
ⓒ 이종찬
▲ 물에 담궈놓은 도토리묵
ⓒ 이종찬
설사 멎게 하는 데 효과

조선 중기 탁월한 의학자 허준(許浚, 1546 ~ 1615)이 쓴 <동의보감>에는 "배가 부글거리고 끓는 사람, 불규칙적으로 또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대변을 보는 사람, 소변을 자주 보는 사람, 몸이 자주 붓는 사람은 도토리묵을 먹으면 좋다"고 씌어져 있다. 이어 도토리묵을 먹으면 심한 설사가 당장 멈춘다고 되어 있다.

어디 그뿐이랴. 도토리묵은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고, 성인병 예방과 피로회복, 숙취회복 등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특히 요즈음에는 도토리묵이 여성들의 다이어트식품으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는 도토리묵이 칼로리가 낮고 물기가 많이 들어있어 조그만 먹어도 쉬이 배부름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한국문학평화포럼'에서 주최한 '영천문학축전'에 갔다가 시인 이승철, 이중기, 여행작가 김정수 등과 함께 천 년 고찰 팔공산 은해사 아래 있는 조그마한 도토리묵 전문점을 찾았다. 이 집에 들어서자 주인 할머니께서 팔공산 계곡에서 직접 주웠다는 갈빛 도토리가 마당 곳곳에 수북히 널려 있었다.

그 작은 마당에는 오늘 아침에 마악 주워온 도토리에서부터 물에 담가둔 도토리, 가을햇살에 바싹 마른 도토리를 절구통에 찧어 소금물에서 앙금을 내리고 있는 도토리가루, 마악 가마솥에서 쪄낸 따끈따끈한 도토리묵,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물에 담가둔 도토리묵 등 그야말로 길빛 도토리의 천국이었다.

▲ 막걸리 한 잔과 도토리묵이 놓여있는 가을풍경
ⓒ 이종찬
▲ 이 집 도토리묵의 특징은 땅콩을 빻아 만든 가루를 도토리묵 위에 뿌린다는 점이다
ⓒ 이종찬
이 집 도토리묵의 특징은 땅콩을 빻아 만든 가루를 도토리묵 위에 뿌린다는 점이다. 더불어 팔공산 계곡에 자라는 돌미나리와 살짝 구운 김가루, 집에서 직접 농사 지은 풋고추, 붉은고추, 오이 등을 양념장(고춧가루, 간장, 빻은 마늘, 참기름)에 버무려 막걸리 한 뚝배기와 함께 한 접시 푸짐하게 차려낸다.

특히 막걸리 한 잔 마시며 젓가락으로 찍어먹는 도토리묵의 향긋하고도 미끌미끌하게 씹히는 맛은 깊어가는 가을을 씹는 맛 그대로다. 게다가 약간 떫은 듯하면서도 쫄깃하게 혀끝으로 미끄러지는 도토리묵 맛과 할머니의 구수한 인생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시간이 어디로 흐르는 지도 모를 정도이다.

뜨물 같은 막걸리가 철철 넘치도록 담긴 뚝배기 두어 통을 비워도 자연산 도토리묵의 기막힌 맛에 포옥 빠진 탓인지 술도 잘 취하지 않는다. 막걸리 한 잔 꿀꺽꿀꺽 마시고 잘 버무려진 도토리묵 한 점 입에 넣으면 온몸이 갈빛으로 물든다. 세상사 시름이 도토리묵 한 접시에 깨끗하게 날아가고, 마주 않은 벗들의 얼굴도 어느새 단풍빛으로 곱게 물든다.

그날, 나그네는 갈빛 도토리묵 한 접시와 막걸리 한 잔 속에서 깊어가는 가을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갈빛 도토리묵 속에서 어릴 때 고향마을에 찾아든 그 갈빛 가을의 풍경과 도토리묵을 쑤는 어머니의 옆모습이 떠올랐다. 2006년 가을은 그렇게 도토리묵과 함께 나그네의 품에 포옥 안겼다.

▲ 막걸리 한 잔 꿀꺽꿀꺽 마시고 잘 버무려진 도토리묵 한 점 입에 넣으면 온몸이 갈빛으로 물든다
ⓒ 이종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골아이', '시민의신문', '유포터', '씨앤비'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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