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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썰렁한 가을, 뽀글뽀글 끓는 된장찌개 드세요
ⓒ 이종찬
구수한 인정이 넘치는 따뜻한 음식이 그립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가을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사람의 마음도 깊어지는 가을을 따라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자주 찾았던 시원한 음식이 갑자기 보기 싫어지고 어느새 구수한 인정이 있는 따뜻한 음식이 그리워진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도 변하는 계절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간밤, 장대비보다는 거센 바람을 더 많이 품고 있다던 제13호 태풍 '산산'이 물러가면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그동안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도 태풍에 꼬리를 완전히 감춘 듯하다. 반소매를 입고 거리에 나서면 조금 춥다는 느낌까지 든다. 과수원 곳곳에 탐스럽게 매달린 노오란 대추와 동이감, 빠알간 사과 등도 어느새 저마다 아름다운 가을빛을 물고 늘어진다.

텃밭 곳곳에서도 검붉은 빛을 띤 고추가 빠알간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텃밭 둑을 치렁치렁 휘감고 있는 호박넝쿨을 들추면 동그란 애호박들이 그 누군가의 오랜 기다림처럼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검붉은 고추와 애호박을 바라보면 어릴 때 어머니께서 뽀글뽀글 끓여주시던 그 구수한 된장찌개가 그리워진다.

▲ 고향에 대한 그리움처럼 매달린 애호박 하나
ⓒ 이종찬
▲ 동글동글 맛깔스럽게 생긴 감자
ⓒ 이종찬
"된장찌개는 재료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이라카이"

1970년대 초반,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 어머니께서는 추석이 다가올 무렵이면 집 뒷마당에 있는 텃밭에 나가 여린 호박순과 아이 머리통만 한 애호박, 땡초와 붉은 고추를 따서 된장찌개를 자주 끓였다. 근데, 한 가지 신기한 일은 아침저녁으로 먹는 그 된장찌개의 맛이 먹을 때마다 다르다는 것이었다.

"옴마! 내가 보기에는 아침에 먹던 거나 저녁에 먹는 거나 다 똑같은 된장찌개인데, 우째 맛이 이리도 다르노?"
"쪼맨한 기 그래도 입맛은 있어가지고. 된장찌개에 들어있는 재료로 잘 봐라. 그기 아침에 먹던 거하고 저녁에 먹는 거하고 똑같은 재료로 쓴 것 같나?"

"내가 보기에는 똑같은 거 같은데. 내나(언제나) 된장에 호박하고 땡초하고 들어간 기 그기 그거 아이가."
"그기 퍼뜩 보기에는 같은 거 겉지마는 다 틀린 기라. 아침에는 된장찌개에 두부하고 조개가 들어갔지마는 저녁에는 감자하고 미더덕하고 버섯이 들어갔다 아이가. 그라이 먹을 때마다 맛이 틀리지. 된장찌개에는 재료를 어떤 걸 쓰느냐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이라카이."


그랬다. 어머니께서는 끼니때마다 똑같은 된장찌개를 밥상 위에 올린 게 아니었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머니께서는 계절에 따라 쉬이 구할 수 있는 재료를 된장찌개에 넣었던 것 같다. 겨울에는 주로 시레기를 많이 넣었고, 봄에는 두부와 미더덕, 봄동을 넣었다. 여름에는 감자와 버섯, 조개를, 그리고 요즈음처럼 가을에는 호박순과 애호박, 땡초를 재료로 사용했다.

▲ 멸치맛국물을 낼 때 무와 파뿌리, 다시마를 넣으면 시원한 맛이 그만이다
ⓒ 이종찬
▲ 된장찌개에 필요한 재료
ⓒ 이종찬
애호박과 땡초에 대파 숭숭 썰어 넣고 뽀글뽀글 끓이는 된장찌개

"아빠! 오늘 저녁 반찬은 뭐야?"
"왜? 또 뭐가 먹고 싶은데?"
"된장찌개 좀 끓여주면 안 돼?"
"그으래.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저녁에 된장찌개를 끓여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그럼 감자 많이 넣어줘."

"된장찌개는 돌아가신 네 친할머니께서 참 맛있게 잘 끓였는데. 네 친할머니께서는 된장찌개는 가을에 제일 맛이 좋다고 그랬었지."
"친할머니께서도 아빠처럼 감자를 많이 넣고 된장찌개를 끓였어?"
"그럴 때도 있었지. 하지만 요즈음 같은 가을에는 애호박과 땡초에 대파 숭숭 썰어 넣고, 빻은 마늘 넣어 국물이 철철 넘치도록 포옥 끓이곤 하셨지. 참 맛이 좋았었는데…."


지난 15일(금)이었던가.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던 그날 저녁, 학원에서 돌아온 큰딸 푸름(16)이가 갑자기 감자를 많이 썰어 넣은 된장찌개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나 또한 그날 저녁에는 매콤하면서도 구수한 감칠맛이 맴도는 그 된장찌개, 어릴 때 어머니께서 뽀글뽀글 맛깔 나게 끓여주시던 그 된장찌개를 한번 끓여볼까 하던 참이었다.

마침 그날 아침 장인 어르신께서 텃밭에서 막 딴 애호박과 땡초를 수북이 주신 것도 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감자와 미더덕 등 된장찌개를 끓일 수 있는 재료가 몽땅 다 들어 있었다.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 일부러 가까운 마트에 가서 새로운 재료를 살 필요조차도 없었단 그 말이다.

▲ 예쁘게 잘 썰어놓은 된장찌개 재료
ⓒ 이종찬
▲ 된장찌개에 미더덕을 넣으면 시원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난다
ⓒ 이종찬
"그게 바로 가을 맛이라는 거야"

"아빠! 된장찌개 끓이는 데 오래 걸려?"
"왜? 배가 많이 고파?"
"오늘은 이상하게 배가 많이 고파."
"갑자기 날씨가 썰렁해지면 에너지 소모가 많아지기 때문에 배가 자주 고파지는 거야. 그래. 10∼20분만 기다려."


된장찌개를 맛나게 끓이기 위해서는 우선 멸치맛국물이 있어야 한다. 멸치맛국물의 깊은맛을 내기 위해서는 깨끗한 물에 국물 멸치를 넣은 뒤 무와 파뿌리(감기예방에 좋음), 다시마 등을 넣고 중간 불에서 1시간 정도 우려내는 것이 좋다. 하지만 된장찌개를 급히 만들어야 할 때에는 된장 푼 물에 국물 멸치를 그대로 넣고 조리한 뒤 나중에 건져내도 된다.

된장찌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멸치맛국물에 된장과 고추장을 3:1의 비율로 풀어 체에 거른 뒤 냄비에 담는다. 그리고 미리 손질해 둔 감자와 미더덕, 엇쓸기한 매운 고추와 붉은 고추, 양파, 빻은 마늘을 넣고 센 불에서 끓인다. 된장찌개가 뽀글뽀글 끓기 시작하면 애호박과 버섯, 엇쓸기한 대파를 넣고 고춧가루를 살짝 뿌린 뒤 한소끔 더 끓이면 끝.

"아빠! 감자하고 된장국물 좀 더 줘. 근데, 뭘 넣고 끓였기에 된장찌개 국물이 이렇게도 맛이 좋아?"
"그게 바로 가을 맛이라는 거야."
"가을 맛?"
"가을에 나는 애호박과 땡초를 넣으면 된장찌개의 맛이 훨씬 더 좋아진다는 그런 뜻이야."


▲ 체에 거른 된장국물
ⓒ 이종찬
▲ 마지막으로 버섯과 대파를 넣어 한소끔 끓이면 끝
ⓒ 이종찬
구수한 된장찌개가 그리운 계절이 돌아왔다. 아침저녁으로 이마와 목덜미가 제법 썰렁해지는 저녁. 오늘 저녁에는 가까운 텃밭에 나가 탐스럽게 매달린 애호박 하나 따고, 검붉게 익어가는 땡초 서너 개 따서 어머니의 손맛이 나는 그 된장찌개를 끓여보자. 된장찌개 한 그릇 속에 알찬 가을의 깊은맛이 끝없이 맴 도리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골아이', '시민의신문', '유포터', '씨앤비'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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