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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리 마을 뒷산에 우뚝 솟은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 박도
청산리로 가는 길

11:00, 장엄한 백두산 수많은 멧부리와 천지에 아쉬운 마음을 남긴 채 하산하여 파카를 가게에 반납하고 곧장 청산리 전적지로 떠났다. 애초 예정보다는 두 시간이 늦었다. 5년 전과는 달리 이도백하로 내려가는 길은 잘 포장이 되었다. 미인송 군락도 소나무들이 쭉쭉 곧게 뻗어 시원스럽게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오르는 길섶의 자작나무 숲
ⓒ 박도

▲ 백두산 들머리 미인송 군락지
ⓒ 박도

▲ 청산리 가는 도중 진흙길에 빠지다
ⓒ 박도
12:00, 이도백하를 지나면 마땅한 밥집이 없을 것 같아서 거기서 조선족 밥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백두산 산채들이 듬뿍 나왔다. 음식들이 맛깔스러웠고 보기에도 깨끔했다. 북한산 포도주를 한 병 사서 맛을 보자 향기가 좋았다. 산뜻한 점심을 든 후 다시 청산리로 달렸다.

백두산에서 연길로 가는 길은 두 갈래인 바, 청산리를 경유하는 길은 노면이 험하고 우회하기에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린다. 그래서 일반 관광객들은 이 길로 잘 다니지 않는다.

우리 일행은 송강에서 청산리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름이 없는 흙길에다 노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조금 달리자 길이 곤죽으로 승합차가 빠졌다. 하는 수 없이 그 지역은 차에서 내려 걸어서 통과했다.

▲ 멀리서 본 청산리 마을의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 박도
15:00, 마침내 청산리 마을에 도착했다. 5년 전, 이 마을에 와서 나무로 된 청산리 전적비를 찾느라 풀숲을 헤맸는데, 그 새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가 마을 뒷산에 우뚝 세워져 첫눈에 띄었다.

필자가 5년 전 이곳에 와서 초라한 나무 비를 보고 몹시 개탄한 바가 있는데 3년 전인 2001년 8월, 이곳에다 번듯한 기념비가 세워진 것을 보고 흐뭇했다.

▲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비문
ⓒ 박도
우리는 통칭으로 ‘청산리 전투’라고 알고 있지만, 청산리 전투는 이 일대의 여러 차례 전투를 합하여 일컫는 것으로, 백운평(白雲坪) 전투·천수평 전투·어랑촌 전투 등 10여 차례 전투가 모두 포함된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에서 가까운 백운평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지휘한 대한군정서군(大韓軍政署軍)이 치른 전투로 청산리대첩의 실마리를 열었다.

그해 10월 20일, 일본군 야마다 연대의 주력이 화룡현 삼도구로부터 청산리 골짜기로 침입해 온다는 첩보를 듣고, 대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은 백운평 일대의 고지마다 독립군을 전투 편제로 이중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여기에서 기다렸다.

백운평 전적지 일대는 백운평 계곡 중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가 공지로 오솔길이 나 있기에 일본군 주력 부대가 이곳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 한국 광복회의 정성어린 후원으로 세웠다는 기념비 추진위원회의 글
ⓒ 박도
10월 21일 아침 9시경,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하는 야마다 연대 전위부대는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는 줄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이 계곡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이때를 기다리던 600여 명의 독립군은 일본군이 10여 보 앞까지 이르자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전투가 시작된 지 30여 분만에 독립군은 약 200명으로 추산되는 일본군 전위부대를 섬멸했다. 전위부대에 이어 야마다 연대 주력부대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기관총과 포를 앞세우고 돌격해 왔다. 하지만 지형에서 우위를 차지한 독립군의 방어에 일본군은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이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10월 26일까지 천수평·어랑촌·완루구·고동하 등지에서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우리 독립군이 모두 승리하였다. 참으로 통쾌한 대첩이었다.

-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한국독립운동사> 요약


▲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백운평 계곡 원경
ⓒ 박도
이항증 김시준 선생은 이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제단에 바치고자 고향 안동소주를 여기까지 가지고 왔다. 두 선생은 조국을 되찾고자 이 산야에 산화한 이름 없는 영령들에게 당신들이 가지고 온 안동소주로 헌작하며 재배했다.

고향 마을의 이름을 붙인 ‘어랑촌’

16:30, 어랑촌 전적지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이 어랑촌 마을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사(漁浪社) 마을사람들이 이곳에 집단으로 옮겨와서 개척한 마을로, 이주민들이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어랑촌 전투는, 1920년 10월 22일 아침부터 어랑촌 마을을 중심으로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이날 어랑촌 전투에는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 최대의 전력을 투입하였다.

독립군 측은 백운평·천수평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둔 대한군정서(경술국치 이후 대종교의 중광단이 발전한 항일 무장단체. 청산리 전투 무렵에는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참모부장 이장녕, 사령관 김좌진, 교수부장 나중소, 교관 이범석 등이 맡았음. ‘북로군정서’라고도 불렀음) 600여 명과, 완루구 전투에서 승전한 뒤 이곳으로 이동해 온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부대 1500여 명이 총동원되었다.

이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의 구체적인 병력은 확인하기 어려우나 어랑촌 부근에 임시 본대를 두고 이도구[어랑촌], 삼도구[청산리]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아즈마 지대 소속의 보병, 기병, 포병 등 주력 5000여 명이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 어랑촌 마을
ⓒ 박도
일본군은 독립군에 비해 병력과 화력 면에서 월등히 우세했다. 그럼에도 투철한 항일 의지로 무장한 우리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과 게릴라 전술로 20여 분의 한 차례 전투에서만 일본군 3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것은 우리 독립군이 상대를 얕잡아 보며 돌격해 올라오는 일본군을 고지에서 내려다보며 조준 사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군 기병대는 천수평 서쪽 고지를 따라 독립군의 측면 공격을 시도하였으며, 포병과 보병은 독립군 진영의 정면에서 맹렬하게 공격해 왔다. 상오 9시부터 다시 시작된 일본군의 공세는 해가 질 때까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하지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독립군은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일본군 공세를 적절히 차단하고, 신출귀몰한 게릴라 전술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이 전투에 참전하였던 이범석 장군은 자서전 <우둥불>에서 일본군 전상자는 1000여명으로 추산하였고, 박은식 선생의 <韓國獨立運動之血史(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일본군 사상자가 1200명이었다고 기록하였다.

-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한국독립운동사> 요약


▲ 여태 남아 있는 1920년대 당시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초가집들
ⓒ 박도
오늘의 어랑촌은 50여 호 집들이 듬성듬성 어우러진 마을로 절반 가량의 집들은 아직도 1920~30년 당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토담집에 초가나 나무 널빤지로 지붕을 덮어서 허름했고 굴뚝은 홈을 판 통나무였다.

이항증 선생은 이런 허름한 초가집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고국에 대궐 같은 집(임청각)을 두고서 남의 나라에 와서 풍찬 노숙을 하거나,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면서, 이런 허름한 집에서 당신 조상들이 살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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