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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 전적지, 왼쪽 산봉우리가 초모정자산으로 그 아래가 중촌 마을이고 저수지 상류 산 아래 마을이 상촌이다.
ⓒ 박도
국경도시 도문

제8일 2004. 6. 1. 화. 맑음


연길은 조선족자치주라서 그런지 이곳에 오면 꼭 우리나라 어느 도시에 들른 기분이다. 거리의 간판도 한글이 먼저이고 다음에 한문으로 되어 있다. 이 도시의 주민 중 4할 정도가 조선족이다. 이 도시에서는 굳이 중국말을 몰라도 크게 불편치 않을 정도로 우리말이 통용되고 있다.

연변대학 빈관은 두 번째 묵는 곳으로 퍽 낯이 익었다. 간밤에 푹 잘 잤다. 오늘 일정은 오전에는 봉오동 전적지 일대고 오후에는 용정 시내의 항일유적지를 들르기로 했다.

07: 00. 빈관 찬청에서 간단히 요기를 했다. 곧 김태국 박사가 어제 그 기사를 데리고 빈관으로 왔다. 역사도 지리도 밝고 이곳 사정에도 밝은 특급 안내자였다. 그는 기왕이면 봉오동 전적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답사하자고 했다.

애초 우리들 생각은 도문 두만강변 봉오동 저수지에 있는 봉오동반일전적지 기념비만 보려고 하였는데, 김 박사는 봉오동 전투의 실마리가 되었던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의 일제 헌병 초소부터 삼둔자(현 지명 간평)로 후안산 마을, 초모정자산으로, 거기서 봉오동 저수지로 가서 봉오동 중촌과 상촌을 보자고 했다. 그러면 봉오동 전적지는 한 세트로 모두 답사하는 셈이다.

▲ 도문의 한 소학교 운동회
ⓒ 박도
08: 00, 연길을 출발했다. 거리에도 초등학교에도 온통 사람들이 붐볐다. 영문을 묻자 오늘이 국제아동절로 우리나라의 어린이날에 해당되기에 그렇다고 했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거나 무동을 태운 채 오가고 있었다.

▲ 도문시와 두만강
ⓒ 박도
도문을 지나자 곧 두만강이 나왔고 그 건너편이 북녘 땅이었다. 강물이 메마른 탓인지 강폭은 20미터 정도였고 수심도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았다. 웬만하면 건널 수 있는 강으로 보였다.

국경치고는 경비가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이 강을 건너 중국으로 많이 건너온다고 했다. 김 박사는 “일없다”고 했지만 우리 일행은 단동과 통화에서 공안에게 된통 당한 터라 몹시 긴장했다.

▲ 두만강 건너 강양동 일제 헌병 초소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 박도
강양동 초소는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바, 건물 중앙 상단에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이 자그맣게 보였다. 강줄기를 따라 조금 더 가자 간평(間坪) 마을이 나왔다. 그 마을이 옛 삼둔자 마을로 삼둔자(三屯子) 전투가 벌어진 전적지이다.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승첩지

▲ 간평(옛 삼둔자) 마을과 범진령
ⓒ 박도
이 일대가 1920년 6월 7일 항일 명장 홍범도(洪範圖)를 사령으로 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부대를 결성한 군단임) 부대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부대를 참패시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 승첩지(勝捷地)이다.

봉오동전투는 사흘 전인 1920년 6월 4일에 있었던, 두만강변 삼둔자전투에서 비롯되었다. 그 날 새벽 30여 명의 독립군 소부대는 국내 진공작전으로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으로 가서 일제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일본군 2개 중대는 이를 보복하려고 독립군 추격에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에 이르렀으나, 독립군을 발견치 못하자 그 분풀이로 애꿎은 조선족 양민을 무차별 살육했다. 이 소식을 접한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쪽 범진령 산기슭에 잠복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일본군을 섬멸시켜 버렸다.

▲ 독립군 소부대가 돌아가는 일본군 병력을 섬멸시킨 범진령 산기슭
ⓒ 박도
이에 함경북도 종성군 나남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19사단은 독이 바짝 올랐다. 그들은 삼둔자 전투 참패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월강 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대대적으로 편성했다.

이들 추격대대는 야스가와 소좌 인솔로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을 건너 이튿날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이런 낌새를 미리 알아 차렸던 홍범도 장군은 그들과 교전에 앞서 주민들을 산중으로 미리 대피시켜 마을을 비우게 했다. 그러고는 봉오동 상동 험준한 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시켜 놓은 다음, 추격대대를 이곳으로 유인하여 포위망 속에 가둬두고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1개 분대를 월강 추격대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에 내보내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후퇴케 하여 그들을 유인했다.

▲ 일제 월강추격대가 독립군을 추적했던 후안산으로 통하는 계곡
ⓒ 박도
그날 아침 8시 30분 무렵에 월강 추격대 첨병이 독립군 분대의 뒤를 쫓아 봉오동 들머리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온 일본군 추격대 첨병은 독립군 분대를 놓치고는 봉오동 하동을 정찰한 결과 독립군이 이미 겁을 먹고 죄다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추격대 본대를 불러서 하동 마을을 뒤지면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 월강 추격대는 봉오동 하동을 실컷 유린한 다음 오전 11시 30분에 다시 대오를 정돈하여 중동․상동을 향하여 진군했다.

그 날 오후 1시 무렵에는 일본군 전위부대가 사방 고지로 둘러싸인 상동 남쪽 300미터 지점까지 진출하여 완전히 독립군 포위망 속에 걸려들었으나 홍범도 장군은 곧장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주력부대를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전위부대에 이어 주력부대도 기관총을 앞세우고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 초모정자산, 산 아래마을이 봉오동 중촌이었다.
ⓒ 박도
그제야 홍범도 장군은 일제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이에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었던 독립군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뜻밖에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돌격해 왔다.

하지만 유리한 지형을 미리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추격대는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그들은 독립군 포위망 속에서 3시간 이상 끈질기게 버텼으나 이미 작전상 허를 찔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전투는 무모했음을 알아차리고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 월강 추격대를 혼비백산케 했다. 통쾌한 승전이었다.

봉오동전투에 대한 전상자 피해는 독립군 일본군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비교적 객관적 자료인 당시 중국〈상해시보〉에 따르면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 추격대를 150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이겼다고 보도했다.
- 필자의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68-70쪽


▲ 연변대 민족연구원 김태국 박사
ⓒ 박도
김태국 박사는 거기서 다시 후안산 마을로 가서 초모정자산을 보여주고 봉오동반일 전적비가 있는 봉오동 저수지로 안내했다. 그는 담당 직원을 만나고 돌이오더니 저수지 위로 가도 좋다고 허락받았다고 했다.

필자가 5년 전 답사할 때에는 그곳에 가지 못하고 기념비만 보고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봉오동 전적지 현장을 멀리서 바라보고 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저수지 둑을 오르자 한창 모내기철이라서 저수지 반 정도는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물이 줄어있었다. 초모정자 산 아래가 봉오동 중촌이요, 저수지 상류가 상촌이라고 했다.

11: 00, 우리 일행은 봉오동반일전적비에서 깊은 묵념을 드린 후 다시 연길로 돌아왔다.

▲ 봉오동 반일전적지 기념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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