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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레의 정기가 우뚝 솟은 백두의 영봉들
ⓒ 박도
드디어 백두산 멧부리에 오르다

07: 00, 우리 일행은 짐을 꾸려 김태국 박사가 연길에서 빌려온 새 차에 싣고 장백산 대우 호텔을 떠났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진다'고 하더니 그 새 통화에서부터 우리 일행을 안내해 준 이국성씨와 기사는 조반 후 곧장 매화구로 떠났다. 여기서부터는 김태국 박사가 안내했다.

답사 여행에서는 안내자를 잘 만나야 한다. 그래야 시간과 수고를 덜 수 있다. 비단 여행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도 마찬가지이리라.

김태국 박사는 연변대학 민족연구원 교수다. 연변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의 국민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쳐서 한중 두 나라의 역사와 생활상에 매우 밝았다.

오늘 일정은 장백폭포를 둘러본 뒤, 08시에 곧장 천지 들머리 매표소로 가서 다른 등산객보다 먼저, 가능한 제1착으로 백두산에 오르기로 했다. 백두산 정상에서 온 누리를 조망한 뒤 하산하여 청산리 어랑촌 전적지를 답사하면서 연길로 이동, 연변대학 빈관에 투숙하기로 하였다.

이곳 백두산 일대를 처음 보는 안동 MBC 취재팀은 날씨와 언저리 경치에 줄곧 감탄사를 쏟았다. 그들은 백두산 장백폭포와 그 일대의 장엄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김 박사도 여러 번 백두산을 왔지만 오늘처럼 쾌청한 날은 처음이라고, 우리 일행에게 덕담을 늘어놓았다. 백두산의 날씨는 변화무쌍한데다가 부정(不淨)한 사람에게는 좀처럼 그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산행에 오르기 전, 목욕재계를 해도 여간해서 그 장엄함을 볼 수 없다고 했다.

이국에서 한 세기 전 조상의 발자취를 더듬는 우리 일행을 기쁘게 하기 위한 김 박사의 조크로 받아들였다. 세 치 혀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고 기분을 바뀌 놓기도 한다.

▲ 백두산 정상과 천지로 가는 마지막 관문
ⓒ 박도
08: 00, 백두산 정상을 오르고자 매표소로 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간밤에 백두산 정상과 정상에 오르는 길에 눈이 한 자 이상 내려서 한창 제설 작업을 하는 바, 그 작업이 끝나야 오를 수 있다고, 한두 시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별 수 없이 휴게소에서 머물자 잡상인들이 아주 귀찮게 했다. 그들은 주로 장뇌삼과 토산품을 팔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물건 값이 내려갔다. 중국에서 물건 살 때는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바가지를 쓰거나 위조품이나 불량품을 사기가 십상일 것 같다.

꼭 이곳에서 특산물을 사려면 여러 가게를 둘러본 다음이나, 아니면 느긋하게 기다린 후에 사면 크게 바가지를 쓰지 않을 게다. 김 박사가 백두산 정상은 바람이 차고 기온도 몹시 떨어져서 아무래도 옷을 두툼히 입는 게 좋겠다면서 가게에서 파카를 빌리고 면장갑을 샀다. 한 벌 빌리는데 20원이었지만, 여러 벌 빌린다고 15원씩 계산했다.

▲ 백두 정상으로 오르는 길섶의 자작나무 숲
ⓒ 박도
10: 00,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백두산을 오르는 전용 지프차에 오를 수 있었다. 입장료와 승차비가 별도였다. 정상 일대에서 언저리를 촬영도 하고, 조금 여유 있게 경치를 보자면, 기사에게 따로 봉사료를 줘야한다고 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돈이 있어야 제대로 움직일 수 있다. 돈은 자동차의 가솔린이요 윤활유와 같다. 이러다가 보니 온통 돈 때문에 별별 일들이 다 벌어지고 있다. "돈을 가지고 문을 두드리면 열리지 않은 문이 없다"라는 영국 속담은 아주 명언이다.

김 박사가 기사에게 넌지시 봉사료를 건네자 웃음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 새 제설작업을 하였다고 했지만 등산로 언저리에는 그 때까지 눈이 쌓여 몹시 위태했다. 그의 손발 끝에 우리 일행의 목숨이 달려 있다. 어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랴. 산을 오를수록 광활한 천하가 눈앞에 펼쳐졌다.

10: 20, 마침내 백두산 천문봉 정상에 오르다. 천지는 여태 녹지 않고 간밤에 내린 눈에 덮였다. 뒤돌아 만주 벌판을 바라보자 일망무제, 아! 천하는 이렇게 장엄한가?

백두산! 예로부터 백두산은 우리 나라의 조종산(祖宗山)으로 일컬어져 왔다. 조종산이란 마을과 고을, 나아가 나라의 근본이 되는 산을 말한다. 백두산은 단군역사에 나오는 태백산을 말한다.

고기(古記)에 이렇게 전한다.

옛날에 환인(桓因, 하늘, 하느님)의 서자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몹시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을 내려다 보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분을 환웅 천왕이라 한다. - 일연 <삼국유사>


아, 천하는 이렇게도 넓고도 장엄한가!

백두산은 예로부터 여러 개의 이름을 지닌 바, 불함산·개마대산·도태산·태백산·백산·장백산·노백산 등으로 불려졌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의 건국 이후부터 백두산으로 통용되고 있음이 <고려사>에 나타나 있다.

백두산 정상은 일년 중, 두세 달을 빼놓고는 눈에 덮여 있을 뿐 아니라, 2500미터 이상의 산등성이 일대는 바람이 하도 세서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다고 한다.

정상 일대의 바위와 흙도 백색의 화산암으로 산봉우리가 마치 머리가 하얀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서 '백두(白頭)'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백두산 일대는 구한말 이래 항일 전적지로 독립군 전사들의 피와 눈물이 서려 있는 유서 깊은 땅이다. 일찍이 구한말 백두산 포수 홍범도 의병대를 시작으로 1945년 해방까지 숱한 항일 전사들이 일제 침략자들과 맞서 싸운 해방 공간이었다.

이 일대가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지가 된 것은 울창한 삼림으로 유격 전술을 펼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좋고, 또한 이 부근에는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어 그들로부터 인적, 물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지대 산악은 개마고원, 낭림산맥으로 이어져 무장투쟁 범위를 국내로 확대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 안내인 김태국 박사(왼쪽)와 권 PD
ⓒ 박도
백두산 일대의 항일전적지로 갑산·삼수·봉오동·청산리·무송현 동강·홍두산·마안산·내두산·보천보 등, 수많은 밀영들이 당시에는 독립군의 요새나 국내 진격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백두산은 겨레의 신령스러운 성산(聖山)만이 아니라, 항일무장 투쟁사를 안고 있는 역사의 산으로, 수많은 항일투사를 길러낸 보금자리였다. 그러므로 백두산 일대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바위 하나는 모두 독립 전사들의 피 어린 발자취가 아로새겨져 있는 항일 유적지다.

하지만 나그네로서 산삼이 묻힌 항일유적 보고(寶庫)를 눈앞에 두고도 자료 부족과 북한 지역은 접근할 수 없는 현실에 먼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에 오르자 바람이 무척 세게 불었다. 모자를 깊이 눌러썼건만 금세 바람이 앗아갔다. 데굴데굴 산 아래로 굴러갔다. 김 박사가 잽싸게 눈길을 달려서 주워왔다. 그의 젊음과 용기, 어른을 배려하는 마음에 가슴 뭉클했다.

▲ 낭떠러지 바위에 기대어 천지를 담는 최종태 기사
ⓒ 박도
백두산 정상 일대에서는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바람이 불었다. 산 아래 가게에서 파카를 잘 빌려 입고 왔다. 초여름에 이런 눈 구경을 어디에서 할 수 있으랴.

촬영팀들은 산뜻한 백두산 산봉우리와 천지에 감동하여 만세를 부르고는 줄곧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그들은 시청자들에게 더 생동감이 있는 좋은 화면을 보여주고자 위험한 낭떠러지에서는 땅바닥에 드러누워 카메라에 담았다.

천지에서 바라보는 만주벌판도 일대 장관이었다. 아, 천하는 이렇게도 넓고도 장엄한가!

▲ 천지를 품고 있는 백두의 봉우리들
ⓒ 박도

▲ 백두산 정상에서 바라본 만주 벌판
ⓒ 박도

▲ 백두의 봉우리들(천문봉 좌측)
ⓒ 박도

▲ 백두의 봉우리들(천문봉 우측)
ⓒ 박도

▲ 장백(비룡)폭포가 있는 계곡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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