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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학사, 신흥강습소가 있었던 추가가 마을 뒷산 대고산
ⓒ 박도
독립군 기지를 닦은 사람들

11: 30, 우리 일행을 미행하던 공안들은 두 팀으로 나눠 전승향 마을 어귀와 마을 뒤 나무 그늘에 숨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이런 공포 분위기에 우리 일행은 촬영 팀(안동 MBC)이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 터 스케치를 마치자마자 곧장 마을을 벗어났다.

▲ 삼원포로 가는 길
ⓒ 박도
신흥무관학교 옛 터와 가까운 전승향 조선족소학교도 취재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계속 뒤따르기에 조금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 그냥 지나쳤다. 누군가 미행하고 감시한다는 것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당하는 처지에서는 무척이나 불안하고 초조했다.

12: 20, 유하현 삼원포 시가지를 지나 서쪽으로 4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추가가(현, 명성촌)에 도착했다. 원래 이 마을에는 추가(鄒哥) 성을 가진 이가 많아서 지명조차 ‘추지가’ 또는 ‘추가’가 되었다고 한다.

삼원포(三源浦)는 세 골의 물이 합한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땅이 기름지고 물이 흔해 농사 특히, 벼농사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정착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땅으로, 한 세기 전 우리의 망명 지사들이 이곳에다 처음으로 해외 독립기지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뒤,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그러자 삼원포 일대에 부민단, 한족회, 신흥학우단(신흥학교 교직원과 졸업생들의 결속과 건학정신의 구현을 위해 조직한 단체), 서로군정서, 백서농장 등이 들어서서 국외 독립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다.

추가가 마을과 뒷산 대고산은 필자가 들렀던 5년 전이나 조금도 다름없었다. 여기서는 공안들이 우리 일행을 놓칠세라 20~30미터 거리로 아예 바짝 뒤따랐다.

이 마을 현지 주민들도 만나서 조상들의 유적지를 느긋하게 취재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접고, 이국성씨의 고증과 필자가 지난번 답사 때 만났던 조선족의 증언을 토대로 일대를 둘러보았다.

▲ 삼원포 거리
ⓒ 박도
그런데 아무리 추가가 마을 일대를 살펴도 경학사, 신흥강습소의 옛 터 표지는 전혀 없었다. 항일유적지 답사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이런 역사의 현장에 표지석 하나 세우지 못한 정부와 관계기관을 원망치 않을 수 없다.

이대로 방치하면 후세 역사학자나 항일 유적지 답사자들이 누가 이 마을을 독립운동의 요람지로 알겠는가.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나라는 사실상 국권을 잃었다. "집이 가난해지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家貧則思良妻, 國亂則思良相)"고 한즉, 그 어려운 가운데도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지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의 조선 병탄이 노골화된 1908~1910년경부터 후일을 대비하여 해외에다 독립기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망국을 전후하여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이 시기에 집단적으로 이주한 항일 지사와 가족들은 다음과 같다.

▲ 추가가 마을 표지판
ⓒ 박도
서울과 그 부근에서 이회영 6형제(석영·철영·회영·시영 등)와 그 가족 대소가, 이동녕 장녕 일가, 장유순, 김창환, 이관직, 윤기섭, 여준 등, 경북 안동과 그 부근에서 이상룡·준형 부자와 아우 봉의·문형 부자 등 대소가, 김대락 ·형식 부자 대소가와 김동삼 일가 및 그들이 이끈 문중 청장년과 경북 구미 임은에서 허위의 중형인 허형·발 부자 등 대소가, 권팔도 일가 등이었다.

특히 이회영 형제들은 삼한갑족 명문세가로, 이석영의 1만여 석 재산과 토지를 모두 처분하여 서간도 독립운동과 독립군 기지 건설에 종자돈으로 썼다.

초기 망명객들이 이곳에 정착하기까지는 피눈물로 얼룩졌다. 우선 만주의 겨울 추위는 보통 영하 30~40도다.

서간도의 겨울 추위는 엄청나다. 추운 날은 아예 공기의 느낌 자체가 다르다. 공기가 쨍하게 얼어붙은 것 같을 때도 있다. 어떤 때는 해도 안 보이고 온 천지에 눈서리가 꽉 끼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만 살아서 소리가 요란하다.
- 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무서운 것은 추위뿐 아니라 홍역·천연두·장질부사와 같은 전염병과 '수토병' 또는 '만주열'이라고 하는 풍토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거기다가 마적 떼의 습격과 토착민과의 갈등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토착민들은 "조선인들이 일본인과 합하여 중국을 치러 왔다"고, 어서 빨리 만주 땅을 떠나라고 윽박질렀다.

또 토착민들은 망명객에게 가옥과 토지를 팔지 않았다. 망명 지사들이 나서서 입적과 토지 매매 청원을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회영이 북경으로 가서 임오군란 때 인연이 있는 원세개를 만나 청원을 했다.

그러자 원세개는 그의 비서를 딸려 보내 이회영이 동삼성 총독을 만나게 주선해 주었다. 그리하여 이회영은 이계동(이상룡의 아우)과 함께 동삼성에 입적과 토지 매매 청원을 하여 마침내 정착할 수 있었다.

▲ 이회영, 이계동 양인이 동삼성 총독에게 입적과 토지매매 청원서를 낸 문서.
주경야독의 민단자치기관 '경학사'

추가가는 우리 독립군의 최초의 기지인 경학사가 뿌리를 내린 곳이다. 경학사는 민단 자치기관이었다. 이분들이 이곳에다가 독립기지를 건설한 이유는 신민회 사건 판결문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 백성들을 다수 이주시켜 이곳에다 토지를 구매하고 촌락을 만들어 새로운 영토로 삼고 민단을 세워서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며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실시하여 기회를 타서 조선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다."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이들은 그해(1911년) 4월 유하현 삼원포의 대고산에서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천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 노천 군중대회에서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다음의 5개항을 의결하였다.

첫째, 민단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둘째, 전통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셋째, 개농(皆農)주의에 입각한 생계 방도를 세울 것
넷째, 학교를 설립하여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다섯째,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하여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할 것

이 결의에 따라 경학사를 조직하여 내무·농무·재무·교무의 4개 부서를 두었다. 사장에는 이상룡이 추대되었으며, 내무부장에 이회영, 농무부장에 장유순, 재무부장에 이동녕, 교무부장에 유인식이 임명되었다.

▲ 경학사 노천 군중대회가 열렸던 대고산
ⓒ 박도
"…… 아아! 슬프다 한민족이여, 사랑해야 할 것은 한국이로다. 땅이 없으면 무엇을 먹고 살며, 나라가 없으면 어디서 살겠는가? 내 몸이 죽으면 어느 산에서 묻힐 것이며, 우리 아이가 자라면 어느 집에서 살게 하겠는가? …

차라리 칼을 빼어 자결하고 싶어도, 내 몸 죽여 도리어 적을 기쁘게 할 염려가 있다. 곡기를 끊어 굶어죽고 싶어도, 나라를 팔아먹고 이름만 사게 되는 일이니 어찌 차마 하겠는가? 눈물을 흘리며 하늘 끝까지 치욕을 받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힘을 길러 끝내 결과를 보겠는가? …

이에 남만주 땅에다 여러 사람의 뜨거운 마음을 합하여 하나의 단체를 조직하니 이름을 '경학사'라 한다. … 끓는 솥의 고기가 아무리 파닥거린들 무슨 희망이 있으며, 화롯가의 제비는 아무리 외친들 얼마나 시간이 있으랴.

오라, 오라! 우리 집단을 보전하는 것이 곧 우리 민족을 보전하는 것이요, 우리 경학사를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 오라! 오라! 기러기 떼 지어 날고 서풍은 날을 재촉하는 듯하지만, 금계(金鷄)가 한 번 울어대면 곧 동녘 하늘이 밝아올 것이다."
- '경학사 설립 취지서'


▲ 추가가 마을의 앞 들판, 온통 무논으로 대부분 우리 조상들이 개간하였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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