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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 터
ⓒ 박도
중국 공안의 미행 속에 답사

제4일 2004. 5. 28. 금. 맑음


비가 내린 다음날 아침이라 유난히 상쾌했다. 이른 아침 이국성씨는 이곳 지리를 잘 아는 기사를 데리고 왔다. 진 기사의 차와 같은 10인승 승합차였다.

오전 8시, 빈관 찬정(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후 곧장 출발했다. 모두 8인이었다. 시원스럽게 닦은 고속도로를 달렸다. 중국대륙이 워낙 넓은 까닭인지 아직 도로에 차가 붐비지 않았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에 가려고 고속도로에서 좁은 들길로 빠졌다. 들에는 한창 모내기철로 여념 없었다. 우리나라 2,30년 전처럼 모내기를 아직도 손으로 하고 있었다. 들판에 사람들이 백로 떼처럼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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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동북3성의 무논 대부분은 우리 조상들이 개간했다.
ⓒ 박도
이 만주 땅에 벼농사를 전파한 이도, 이곳 불모지에 논과 수로를 만든 이는 조선족이었다. 내가 그런 얘기를 하자 촬영 팀은 모내기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차를 세웠다.

10여분 차를 세워두면서 모내기 장면을 스케치하고 다시 차를 타고 달리는데, 앞뒤를 두리번거리던 안동문화방송 권 PD가 3XXX 차번호를 단 빨간색 승용차가 계속 우리의 뒤를 따른다고 했다.

차창으로 보니까 우리가 달리면 뒤따라오고 우리가 서면 그 자리에 서곤 했다. 자세히 살피자 한 대가 아니고 두 대가 뒤따랐다.

다른 한 차는 하얀 색깔이었다. 차에는 선글라스를 쓴 두 사람이 계속 우리 일행을 미행했다. 이국성씨는 그들은 중국 공안이 틀림없다고 했다. 개구리 노는 곳에 뱀이 어슬렁거리며 노려보듯 몹시 신경을 건드렸다.

우리가 용변도 볼 겸 시험 삼아 차를 세우면 그들도 그 자리에 섰다. 고산자에 가까이 이르자 그들은 우리의 행선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하얀 차는 우리를 앞질러가면서 길안내를 하다시피했다. 자연 우리 답사단은 긴장되고 졸아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고 100~200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앞뒤에서 감시만 했다. 기관원들이 미행 감시한다는 게 얼마나 사람을 불안케 하는지 짧은 시간이나마 실감했다.

1980년대 초, 당시 김대중 사형수의 막내아들 김홍걸군이 "선생님, 저희 집은 대문을 열어두어도 도둑들이 얼씬도 안 해요"라고 하던 말이 떠올라 그 얘기를 했더니, 일행들이 정말 그랬을 것 같다고 화답했다.

"우리가 범법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닌데 당당해야 한다"고 김, 이 두 선생은 독립운동가 후손답게 의연하였으며, 길 안내를 맡은 이국성씨는 매화구 공안 책임자를 잘 안다면서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행동은 삼가고 가급적 빨리 빨리 보고 가자고 했다.

망국민들의 한이 담긴 신흥무관학교

마침내 고산자 신흥무관하교 옛 터에 이르렀다. 이곳은 신흥무관학교 2년제 고등군사반이 있었던 곳이다. 필자는 1999년 이항증 선생과 함께 김중생(일송 김동삼 손자) 선생의 안내로 이곳을 다녀간 바 있기에 5년만에 다시 찾은 셈이다.

그새 5년이 지났지만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그때는 한여름이라 논에는 벼들이 한창 이삭이 패었는데, 지금은 한창 모내기철이고, 신흥무관학교 옛 터는 옥수수가 자라 한 길이 넘었는데 지금은 파종한 지 얼마 안 된 듯 파릇파릇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신흥무관학교 옛 터를 잘 몰라 밭주인 원금석 노인의 안내를 받았지만 지금은 필자도 이국성씨도 익은 곳이라 원 노인을 찾지 않았다. 마침 지나가는 조선족 동포에게 원 노인의 안부를 묻자 요즘은 편찮으셔서 누워계신다고 했다. 우리는 안부만 전했다.

▲ 할아버지 아버지의 유적지에서 눈물을 흘리는 김시준 선생
ⓒ 박도
▲ 수륙만리를 찾아왔으나 아무 흔적도 없는 유적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항증 선생
ⓒ 박도

동행 김시준 선생은 조부가 신흥무관학교 김규식 교관이었고, 아버지는 생도 김성로 선생이었다. 이항증 선생은 조상 3대가 이 학교와 관련이 있다. 김 선생은 여기가 바로 신흥무관학교 자리라고 하자 금세 눈물을 쏟았다. 남의 땅에서 온갖 설움 속에 풍찬노숙하면서 독립 운동하셨던 할아버지 아버지가 떠올라서 흘리는 눈물일 게다.

지난날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이 주경야독으로 개간하고 농사지었을 앞 들판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느라고 바빴다.

▲ 꽈배기 장수
ⓒ 박도
오토바이를 탄 중국인이 뭐라고 외쳤다. 가까이 가 보니 꽈배기 장수였다. 모내기꾼들이 새참거리로 사서 먹었다. 10원을 주니까 열 개를 주었다. 맛이 담박한 게 먹을 만했다.

권 PD와 카메라 기사는 짧은 시간에 쫓기듯 스케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 일행 앞뒤에서 중국 공안은 계속 이쪽을 두리번거렸다. 언제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르겠다.

한 세기 전, 망국민의 유랑민으로 이곳에 망명 오자 현지인들이 "너희 조선 놈들은 일본과 합하여 왜 우리 중국을 치려고 여기 왔느냐"고 망명객의 처지도 잘 모르는 말로 핍박했을 때 우리 조상들의 상심은 얼마나 컸을까?

조상들의 피눈물 속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요, 망국민들의 소망과 의지가 담긴 신흥무관학교였다.

▲ 신흥무관학교 옛 터에는 옥수수가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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