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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추가소학교, 조선족 향토사학자 이국성씨는 이곳이 지난날 신흥강습소 옛 터로 추정된다고 고증했다.
ⓒ 박도
옥수수 창고에서 시작한 신흥강습소

이국성씨의 증언으로 이회영, 이상룡 선생이 사셨던 집터와 신흥강습소의 옛 터를 고증 받았다. 추가가 마을에서 대고산으로 오르는 길목의 왼쪽 집들이 이회영 형제들이 살았던 곳이요, 오른쪽 집들이 이상룡 등 안동 유림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했다. 거기서 조금 더 오르자 추가가소학교가 나왔다. 이국성씨는 그 자리가 바로 신흥강습소 옛 터라고 고증했다.

▲ 신흥무관학교 주춧돌을 놓은 우당 이회영
ⓒ 우당기념사업회
▲ 이주 초기에 이회영 형제들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집
ⓒ 박도

추가가에서 망명객들의 첫 교육은 옥수수를 저장했던 창고에서 시작하였다고 한다. 학교 이름을 '신흥(신흥)'이라고 붙인 바, 신민회의 '신(新)'자와 구국투쟁이 '흥기(興起)'하라는 의미의 '흥(興)'자를 합한 것이었다. 학교보다 등급이 낮은 강습소라고 한 것은 토착민들의 의혹을 피하고자 붙인 거라고 한다.

▲ 경학사의 기둥을 세운 석주 이상룡
ⓒ 석주기념사업회
▲ 이상룡을 비롯한 안동 유림 가족들이 살았다고 추정된 집들을 후손들이 살피고 있다
ⓒ 박도
이회영, 이상룡의 주선으로 망명지에서 입적과 토지 매매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자 이곳에서 떨어진 합니하에다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여 1912년 7월에 낙성식을 가졌다. 신흥무관학교, 신흥중학교가 명실상부 탄생케 된 것이다. 천연 요새에 훌륭한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데에는 이회영 형제들이 거금을 쾌척한 결과였다. 여기에 이동녕, 이상룡, 김대락 등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신흥강습소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까지 본교, 분교를 합하여 약 3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들은 청산리 전투의 주역으로, 의혈단의 단원으로, 독립전사를 기르는 여러 학교의 교사가 되는 등 대부분 항일독립 전선에 중추 인물이 되었다.

이국성씨는 추가가마을을 떠나면서 신흥무관학교가 1920년에 폐교된 게 아니고, 그 명맥이 1930년 초까지 이어졌다면서 굳이 그곳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 추가가 마을에서 이국성씨로부터 신흥강습소, 경학사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는 이항증(왼쪽), 김시준(가운데) 선생.
ⓒ 박도
추가가 들판에도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원래는 황무지와 다름없었던 이 들판을 개간하고 벼농사를 보급한 것은 당시 우리 조상들이었다. 카메라를 달리는 승합차 차창 밖으로 내밀고는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다.

우리를 미행하는 공안의 차도 계속 열심히 꽁무니를 따랐다. 그 곳으로 가는 도중에 식당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을 때도 그들은 차를 은폐시키고서는 우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척 짜증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때도 거르는 것 같아서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반만 년래 피로 지킨 옛 집

14: 30, 기관산 기슭 길락향(吉樂鄕)이라는 마을에 닿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군사 요새지로는 적격으로 보였다. 일제가 만주국을 세운 후 대토벌을 감행할 때 최후로 120여명의 생도가 살해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나라 독립운동사 어디에도 이에 관한 기록은 없다. 이국성씨는 다음날 만나게 될 조문기(중국 조선민족사학회 부이사장) 교수가 고증해 줄 거라고 했다.

▲ 1930년대 초까지 명맥을 이었다는 실락향의 재건된 신흥무관학교 (부흥무관학교) 옛 터로 학계의 검증이 요망된다.
ⓒ 박도
▲ 산으로 둘러싸인 실락향 마을
ⓒ 박도
독립운동사에 문외한인 필자로서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추측컨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세운 신흥학교 분교 중의 하나가 아닐까 여겨졌지만 사실 여부는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서북으로 흑룡 태원 남의 영절에
여러 만만 헌원 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것들 품에다 품어
젖 먹여 준 이가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결치며 돈다.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 낙원은
반만 년래 피로 지킨 옛 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종 설움 받은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가슴 치고 눈물 뿌려 통곡하여라
지옥의 쇳문이 온다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내어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두 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떴다.
<신흥무관학교 교가>


▲ 마을 곳곳의 담에 나붙은 산아제한 구호로 " 자녀를 적게 낳으면 빨리 부자가 되고, 소강(부자마을, 일종의 이상 마을)의 길로 간다"의 뜻이라고 한다
ⓒ 박도
▲ 매화구 시가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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