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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 합니하에 있는 신흥무관학교 옛 터
ⓒ 박도
마침내 통화에 이르다

제3일 2004. 5. 27. 목. 흐리다가 이따금 비.


02: 30, 긴 여로 끝에 통화현 광달빈관에 도착했다. 무려 8시간이나 걸렸다. 지도상으로는 단동에서 통화까지 약 300킬로미터 내외로 도로조차 붉은 색으로 표시돼 있어서 기껏 해야 4~5시간이면 충분히 닿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달려보니까 거리는 그 정도였지만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고 거기다가 한밤중인데다가 이정표가 별로 없어서 몇 곳에서 헤맸기에 예상보다 곱절이나 더 걸렸다.

▲ 통화중심가에 있는 백화점
ⓒ 박도
진수영 기사가 졸까봐 김시준 선생은 옆 자리에서 계속 말을 시키며 졸음운전을 예방했다. 한밤중이라 바깥은 자세히 살피지는 못하였지만, 산길 들길이 대부분이었고 고갯길 비탈길도 많았다. 이 길이 우리 선조들이 마차로, 도보로 이동했던 길이다.

자동차로 달려도 이렇게 힘든 길을 마차를 타거나 괴나리봇짐을 지고 걸어왔을 때 그 고초가 어떠했을까? 그때의 기록을 보면 날만 저물면 길가의 여사에 들러 하룻밤 묵고 이튿날 새벽 다시 출발하였다는데, 단동에서 통화까지 10~15일 걸렸다고 한다.

우당기념관 윤흥묵 이사로부터 소개받은 이국성씨는 항일유적지와 그때의 역사에 밝은 조선족 향토사학자라고 하였다. 이번 답사 길은 필자가 5년 전에 한번 거쳐간 곳이지만 아무래도 익지 않는 곳이라 걱정하던 차에 이국성씨는 현지 사정이 밝은 분이기에 백만 원군을 얻은 양 든든했다. 그래서 삼원포 일대 항일유적지 길 안내를 부탁드렸다.

당신은 매화구에서 이곳까지 일부러 달려와서 그때까지 주무시지 않고 빈관을 마련해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면이었지만 정식 인사도 생략한 채 모두 지쳐서 빈관으로 들어가서 대충 닦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녘인데다가 만주 땅 한복판이라 그런지 몹시 추웠다. 이불을 두 겹으로 덮고 눈을 감았다.

07: 00, 10시까지 취침하기로 했지만 잠이 깼다. 디지털 카메라에 든 사진을 노트북에 저장코자 전원을 연결했으나 작동이 되지 않았다. 순간 뜨끔했다. 이번 답사 길은 디지털 카메라만 가져왔고 칩도 하나밖에 없기에 큰일이었다. 이미 150여 장을 촬영했기에 여분이 90여 장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 통화시가지
ⓒ 박도
고국에 있는 아들에게 손전화를 걸어서 물었더니 자기도 직접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면서 컴퓨터 대리점에 가서 AS를 받으라고 했다. 그런데 심양이나 단동 같은 큰 도시면 모르겠으나 이런 중소도시에 그런 곳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코드를 다시 연결하고 몇 번을 켰으나 종내 먹통이었다.

간밤에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많이 덜컹거렸는데 그때 충격으로 손상이 가지 않았나 싶었다. 1차 답사 때도 하필이면 백두산 등정을 코앞에 두고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상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젊은 친구들에게 부탁해도 그들도 잘 몰랐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카메라에 저장된 이제까지 찍은 장면 중에서 중복되거나 잘 나오지 않은 것은 모두 지웠다. 그러다가 단동 역사까지 지워버렸다.

광화로 가는 길

오싹한 한기 탓인지 모두 일찍 일어났다. 한 방에 모두 모여 일정을 상의한 결과, 오늘 답사는 두 팀으로 나눠서 한 팀은 관광 목적에 맞게 통화 시내를 두루 돌다가 점심 식사 후 매화구로 이동키로 하고, 또 한 팀은 택시를 빌려 타고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 터로 가기로 정했다.

아무래도 단동의 공안이 통화로 연락했을 것 같은 예감으로 일단은 그들의 요구대로 관광만 하는 것으로 비치는 게 남은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09: 00. 빈관을 출발하여 통화 중심지로 갔다. 예나 지금이나 통화는 길림성의 교통 중심지다. 민족지도자들이 최초로 독립기지를 건설한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로 갈 때 반드시 거쳐 가는 길목의 도시다.

이 일대는 부민단을 비롯한 한인 자치단체와 대종교 등 민족운동단체가 결성되었던 초기 독립운동의 요람지다. ‘아리랑’이라는 조선족 밥집에서 아침을 먹은 후 두 팀으로 나눴다.

▲ 광화로 가는 길에서 만난 소달구지를 탄 일가족
ⓒ 박도
이국성씨, 권 PD, 최종태씨, 필자는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답사 팀에, 다른 분들은 급조된 관광 팀으로 밥집 앞에서 헤어졌다. 이 선생님에게 통화시내 다니면서 컴퓨터 가게가 눈에 띄거든 수선해 보라고 부탁드렸다.

10: 00, 통화에서 광화로 출발했다. 이곳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 터는 1차 답사 때 들르지 못해서 매우 아쉬웠던 참이었다. 그때도 교통이 매우 불편하다고 해서 지나쳤던 곳이다.

<신흥무관학교>를 펴낸 서울교육대학 안천 교수도 이곳을 찾는데 매우 고생했다고 하였다. 1차 답사 후 5년 만에 다시 이 일대를 둘러보니 그새 중국도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도 벽지는 비포장도로에 길이 험했다.

11: 30, 마침내‘광화(光華)’라고 새긴 큰 문루가 나왔다. 거기서 20여 분 들길 산길을 달리자 마침내 합니하가 나오고 신흥무관학교 옛 터라는 산마을이 나왔다.

▲ 첩첩 산중의 광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런 곳에다 무관학교를 세웠다
ⓒ 박도
삼원포 추가가에 세운 신흥강습소가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로 확대 발전하면서, 유하현 고산자에는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 간부를 양성했고, 통화현 합니하, 칠도구, 괘대모자 등에는 신흥무관학교 분교를 두어 초등군사반을 편성하여 3개월간의 일반 훈련과 6개월간의 후보 훈련을 담당케 했다.

당시 고등군사반의 초대 학장에는 이시영, 교장 이세영, 부교장 양규열, 학감 윤기섭, 훈련감 김창환, 교성대장 이청천, 교관 오광선·신팔균·이범석·김광서·성준용·원병상·박장섭·김성로·계용보, 의무감 안사영 등이 있었고, 합니하 초등군사반의 교장에는 이장녕, 학도대장 성준용, 교관 박두희·오광선·이범석·홍종락·홍종린 등이 있었다.

▲ 광화진 들머리의 문루
ⓒ 박도


▲ 신흥무관학교 옛 터를 고증하는 조선족 향토사학자 이국성 씨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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